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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3화)
제2장 이름을 알리다
“어디로 가고 계신 건가요?”
“간장과 막사의 화로로 가고 있소.”
한참이나 말없이 혁련호의 뒤를 따르던 여인은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가 숲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궁금해 하고 있음을 진작 눈치 챈 혁련호는 그녀가 묻기 무섭게 대답해 주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숲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진효린.
독기에 가득 찬 복수를 원하는 여인치고는 너무나 어수룩하고, 또 순박했다.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혁련호는 마침내 수북한 풀숲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깨까지 자란 풀숲의 저 너머로 산삼의 잎사귀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인가요? 아무리 보아도 화로로 보이는 곳은…….”
혁련호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혁련호는 빙긋 웃으며 목도를 꺼내 들었다.
파사삭!
“……!”
목도가 풀숲을 일시에 쳐 내자, 그제야 그 뒤로 까마득하게 깎인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혁련호를 바라보았다.
“화로?”
“이곳이 화로요. 그리고 천마의 진전은…….”
혁련호는 손가락으로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그녀는 경악한 듯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다 혁련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은 누구시지요? 누구이기에 천마의 진전이 있는 곳을 아시는 것이지요?”
“그거야말로 내가 소저에게 묻고 싶은 말이오.”
혁련호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 대신 궁금했던 것을 진효린에게로 넘겼다.
진효린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난처한 얼굴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혁련호가 내리는 그녀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발걸음은 더욱더 심하게 떨려 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절벽 뒤에 선 혁련호와 마주쳤다.
혁련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겠어요.”
휘익!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뒤 진효린의 신형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계곡의 바람과 여인의 몸이 부딪쳐 만들어 내는 가공할 파공음만이 혁련호의 귓가를 울렸다.
“흐아압!”
혁련호도 그제야 마음을 굳혔다. 그의 신형이 기합성과 함께 절벽 아래로 쏘아져 나갔다.
후우웅!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린 혁련호는 거의 혼절 직전인 여인을 재빨리 낚아챘다.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아져 나온 목도에 새하얀 검기가 서렸다.
쿠콰쾅!
혁련호의 검이 연달아 세 번 호를 그리자, 좌우의 절벽에서 가공할 폭발이 일어났다.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들을 이리저리 피한 혁련호는 곧장 그 돌덩이들을 박차며 솟구쳐 올랐다.
“하, 하아…….”
절벽 위에 안착한 혁련호가 진효린을 내려놓자, 반쯤 혼절했던 그녀는 나지막한 한숨만을 토해 냈다.
그제야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군요.”
그녀는 몽롱한 눈동자로 혁련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혁련호는 빙긋 웃었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자, 혁련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진효린이라 하였소? 당신이 지금 내 손을 잡는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당신의 복수를 돕겠소.”
“잡지 않으면요?”
진효린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 보며 초연히 물었다.
혁련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천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소저를 죽여야겠지.”
“하지만…… 공자님은 저를 어찌 믿고 복수를 도와주신다고 하는 거지요?”
진효린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혁련호의 말을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혁련호라는 인물 자체가 그녀에게는 의문투성이일 터였다.
“소저는 나를 믿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소?”
“…….”
진효린은 이해할 수 없는 사내, 혁련호를 뚫어져라 올려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도 먹물이 번지듯 미소가 번져 나갔다.
“하지만 전 아직 공자님의 이름도 모르는걸요.”
혁련호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유쾌하게 웃은 혁련호는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대인(大人) 독고유(獨孤流)요. 강호에 홀로 흐르는 대인이지.”
혁련호, 아니 독고유는 말을 마치며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올려 보는 진효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럼 앞으로 대인이라 부르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진효린은 독고유의 손을 잡고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독고유는 손사래를 치고는 걸음을 돌렸다.
“이상한 분……. 믿어 보자.”
자신의 운명이 그의 두 어깨에 달려 있음에도 독고유의 뒤를 따르는 진효린의 얼굴에는 후회가 아닌 결심의 빛이 가득했다.
제3장 일보를 내딛다(1)
“꼭 그걸 다 안 들고 가셔도 저한테 돈이 있는데…….”
“이 곰 가죽의 가치를 몰라서 하는 말이오. 잔말 말고 두고 보시오.”
독고유는 등에 멘 곰 가죽을 들썩이며 걸음을 옮겼다. 진효린은 한숨을 쉬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던 독고유는 문득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녀의 복수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 운명을 바꾸고 천의를 뒤집기 위한 첫걸음이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마치 하늘과 대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늘에 무엇이라도 있나요?”
“뭐요? 풋! 아니오. 그보다 관도가 저 앞이니 곧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거요.”
독고유가 저 멀리의 관도를 가리키자 진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날 며칠 동안 관도를 걸었던 그녀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저 멀리에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
마차라도 얻어 타고 갈 수 있다면 훨씬 더 빠른 시간 내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
안력을 돋워 관도 너머를 바라본 독고유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푸른 도복을 입은 세 인마(人馬).
그가 기억하는 그 사내들이라면 분명…….
“멈추시오.”
독고유의 걸음이 불현듯 멈추었다.
진효린은 영문도 모른 채 걸음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말발굽 소리에 집중하던 독고유는 발굽 소리가 자신들을 지나쳐 멀어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마적이라도 될까 봐 그러셨던 건가요?”
진효린이 알아보기엔 너무 먼 거리였지만, 그녀도 말발굽 소리는 확실히 들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아니오. 혹 급한 일이 있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관도를 막아 방해해서는 안 되잖소.”
‘또 다 죽이게 될까 봐’라는 말을 꿀꺽 삼킨 독고유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하자, 진효린은 다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무공 수위가 높다고 해도 아직 어리다. 혹여 일어날 싸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 어서 갑시다. 작은 것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풋! 네에.”
곰 가죽을 고쳐 멘 독고유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진효린도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정말 알 수 없는 분이야.’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독고유의 뒷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진효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의 인물이다.
매우 강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 출신 성분도 알 수 없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만나 온 무인들 중 어느 누구와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걸음이 느리시오?”
“아, 아아! 죄송해요. 잠시 잡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저만치로 멀어진 독고유가 걸음을 멈추고 핀잔을 주었다. 생각을 거둔 진효린은 뒷목을 긁적이고는 재빨리 독고유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제 곧 덕청(德淸)에 당도할 거요.”
“덕청에서 가죽을 파실 건가요?”
“당연한 말을 자꾸 하는구려.”
독고유의 입가에 큰 미소가 번져 나갔다.
“오, 저기 보이는군! 갑시다!”
이내 관도 너머에 현(縣)의 모습이 보이자, 독고유는 참을 수 없는 듯 외치고는 쏜살같이 신형을 내달렸다.
덕청에는 서호(西湖)로 향하는 문인들과 풍류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덕청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서호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진귀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바로 독고유와 진효린의 모습 때문이었다.
십육칠 세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의 등에는 자신보다 더 무게가 나가 보이는 가죽이 한가득 메여 있었고, 그 뒤를 조신하게 따르는 여인은 청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품위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니 시선을 끄는 것이 당연했다.
“포목간이 이 근처 어딘가에…….”
하지만 독고유는 그런 시선들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번뜩이는 눈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며 포목점을 찾았다.
“오! 저긴가?”
순간 독고유의 눈빛이 번뜩였다. 도시 구석에 자리한 포목점을 발견한 것이다.
“대, 대인!”
독고유가 쏜살같이 포목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진효린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독고유와 달리 그녀는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자, 막사산 우두머리 곰의 가죽이오! 얼마를 쳐줄 거요?”
쿵!
포목점에 뛰어든 독고유가 상 위에 가죽을 내던지며 외쳤다. 놀란 표정의 포목점 주인이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왔다.
“직접 잡으신 겁니까?”
십이삼 척은 되어 보이는 곰 가죽을 살피던 포목점 주인이 탄성을 터뜨리며 물었다. 독고유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이 가슴의 상처가 놈이 남긴 거라오.”
“적어도 은자 백 냥은 할 겁니다.”
가죽을 스윽 둘러본 주인이 말하자, 뒤따라온 진효린이 화들짝 놀라 독고유를 바라보았다.
백 냥이면 여간 큰돈이 아니지 않은가!
“후훗. 두둑이 챙겨 주시오.”
독고유는 진효린에게 뽐내듯 눈짓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목점을 나서는 독고유의 손에는 은자가 짤랑이는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생각보다 값이 많이 나가는군. 어떻소, 소저?”
“제 말대로 두고 왔다면 큰 실수를 할 뻔했네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진효린이 순순히 대답하자, 독고유는 빤하다는 듯 자신의 옷을 흔들었다.
“일단 묵은 때 좀 벗기고 시작해야겠소.”
“어, 어디로? 대인?”
독고유가 발걸음을 옮기자, 진효린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시려는 건가요?”
“여기요. 흐흐.”
독고유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든 진효린의 얼굴이 삽시에 붉게 물들었다.
독고유는 굳은 진효린을 남겨둔 채 청루(靑樓) 안으로 의기양양한 발걸음을 옮겼다.
진효린은 차마 그를 따라 청루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청루에서 일하는 기녀들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독고유가 들어간 지 채 일각도 되지 않아 코를 막은 기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던 것이다.
독고유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제대로 된 목욕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은 청루밖에 없지 않은가.
청루의 고급 기녀들이 건물 밖으로 나서자, 삽시에 주위로 사내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후아―! 시원하군!”
독고유가 건물 밖으로 나온 것은 한 식경이 지난 후였다. 진효린은 놀란 표정으로 독고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햇볕에 탄 줄 알았던 피부는 때를 벗겨 내자 하얀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고, 산에서 살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아직 좀 덜 닦였소? 아니면 이 대인의 옥안에 넋을 잃은 거요?”
“대, 대인! 짓궂은 농담은 그만 하셔요.”
독고유가 웃음을 터뜨리며 묻자, 진효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젊은 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도의 내가심법의 영향인지 전에 없는 여유와 경쾌함이 독고유의 전신에 끓어 넘쳤다.
“백의로 한 벌 주시오.”
독고유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옷가게였다. 이내 그의 앞에 비단으로 만든 백의가 대령되었다.
백의, 완전무결한 순수함을 상징하는 색이다.
대인천하를 위한 대인지로의 일보를 내디뎠으니 독고유 자신에게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 백의에 걸맞은 처신을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소, 보기에 나쁘지 않소?”
“네에? 아…….”
옷을 갈아입은 독고유가 양팔을 들며 물었다. 이내 진효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어느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산에서만 살던 사내라 말하겠는가. 비단으로 만든 백색 장의(長衣)는 본래부터 독고유와 하나였던 듯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긴 머리까지 한데 정갈하게 묶은 독고유는 자신이 보아도 만족스러웠는지 씩 웃었다.
“잘 어울리셔요. 멋집니다.”
“하핫! 역시 소저는 보는 눈이 있소.”
독고유는 진효린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때 갑자기 독고유와 진효린의 배에서 동시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네?”
독고유가 진효린의 손을 잡아끌며 말하자, 진효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진효린을 향해 고개를 돌린 독고유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