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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4화)
제3장 일보를 내딛다(2)


“후우, 좋군.”
소면의 국물을 단번에 들이켠 독고유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자, 그럼 이야기해 보시오.”
“무엇을요?”
독고유가 먹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진효린은 그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되물었다.
“놈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오. 원수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에게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았잖소?”
“아, 그, 그렇군요.”
진효린은 당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독고유의 손에 이끌려 다니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다.
“당시 저는 인근의 현에 출타한 상태였기에 가문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서는 있었지요.”
진효린의 눈에 침통한 빛이 흘렀다. 하지만 독고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주(蛇酒)를 입에 털어 넣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죽기 직전에 쓰신 ‘하(下)’라는 글자가 전부였습니다. 정신을 잃어 가면서도 단서를 남기고자 하셨는지, 몸에서 흐르는 피를 찍어 글을 남기신 거지요.”
진효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독고유는 술을 한 잔 더 따르면서 중얼거렸다.
“하(下)라…….”
눈물을 훔친 진효린은 술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탕!’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눈물을 삼킨 그녀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단서가 시원치 않으니, 여기저기 분탕질을 쳐 볼 수밖에 없겠구려.”
“…….”
독고유의 목소리는 장난치는 아이처럼 가볍기만 했다. 진효린은 놀란 표정으로 독고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독고유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다.
‘혼자 하기에는 힘든 일임에 분명한데…… 어째서 이렇게 믿음이 가는 거지?’
진효린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강호 초출의 무인에게 이렇게 믿음이 가는 것일까. 그의 자신감과 신비로움 때문일까,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가졌기 때문일까.
“소저와 관련 있는 곳부터 하나씩 거치다 보면 단서가 나오지 않겠소? 그전에 ‘하’라는 글자와 관련 있는 곳부터 한두 군데 거쳐 보고.”
“대인…….”
독고유가 기대된다는 듯 말하고는 미소를 짓자,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진효린의 입술이 달싹였다.
“만약 대인이 저를 끝까지 도우신다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적들을 상대하셔야 할지도 몰라요. 광동 진가를 하룻밤에 무너뜨린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도우실 건가요?”
독고유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진효린을 바라보았다. 진효린의 입 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천의(天意)라는 것이 있소. 그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에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지.”
“……?”
이윽고 독고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태연자약한 목소리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천의를 뒤집고자 한다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좋소. 그렇기에 나는 전력을 다해 소저를 도울 생각이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진효린은 태평한 표정의 독고유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사내였다.
“혹시 내 무공이 못 미더운 거요?”
독고유가 불쑥 입을 열자, 진효린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독고유가 얼마나 강한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던 자신을 구할 때 보인 무위는 분명 범상치 않았다.
“뭐, 소저가 자꾸 그런 말을 꺼내면 내 강함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한번 제대로 보여 줄 수도 있소. 물론 한 문파, 혹은 하나의 성도가 통째로 피바다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겠지만.”
꿀꺽!
진효린의 입가로 침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독고유의 눈에 순간 차가운 빛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하하! 농담이오. 알고 보면 나도 굉장히 가벼운 사람이라오. 내가 즐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소저에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소.”
웃음을 터뜨린 독고유의 눈이 다시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그것으로 돌아왔다. 진효린은 그제야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는 대인을 의심하지 않겠어요.”
말을 마친 진효린이 젓가락을 들자, 독고유는 흡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소저의 그런 모습이 좋소. 하하!”
진효린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독고유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런데 말이오.”
“네?”
즐거이 웃으며 식사를 마친 독고유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진효린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독고유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소저도 꽤나 아름답소?”
“네에? 풋.”
독고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진효린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여기서 대인과 더 이야기를 했다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네요. 나가요.”
한참을 웃던 진효린은 물을 들이켜고는 벌떡 일어섰다. 독고유도 적당히 배가 찬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소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독고유에게로 달려왔다.
“꺅?”
객잔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진효린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객잔 안으로 들어서던 사내들과 부딪친 것이다.
“어이, 소저. 앞을 잘 보고 다니시오.”
넘어진 진효린을 내려다보며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진효린은 눈을 치켜떴다. 갈색 도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무례한 자들이다. 큰 문파의 문도라는 것을 믿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부주의했네요.”
재빨리 눈빛을 숨긴 진효린은 도복을 털며 일어섰다. 그녀가 객잔 밖으로 걸음을 돌리자,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소저가 부딪치는 바람에 도복이 구겨지고 시간이 지체되었지 않소.”
입술을 질끈 깨문 진효린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노골적인 음흉함이 감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진효린이 포권을 취하며 사과했다. 이런 이들과 부딪쳐 보아야 득 될 것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효린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하, 고작 한다는 말이 죄송하다는 거요? 법도를 좀 아는 낭자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오?”
진효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소리도 어느새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찌해 드려야 하지요?”
“글쎄? 우선 우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소?”
음흉하게 웃은 사내가 진효린의 팔을 움켜쥐었다. 진효린의 눈썹이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사내의 악력과 함께 은은한 내공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소저, 나가 기다리지 않고 왜 여기 서 있는 거요?”
진효린의 입이 달싹이려는 찰나, 사내들의 뒤편에서 독고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웬만큼 겁이 없지 않고서야 무인 다섯이 있는 틈바구니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내들을 일절 무시한 독고유는 진효린에게로 다가가 씩 웃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아, 그, 그럼요. 후훗.”
당황해 하던 진효린도 독고유의 심중을 헤아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내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자신들을 무시한 채 빠져나가겠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네놈은 또……!”
독고유에게 입을 열려던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독고유가 그의 팔을 붙잡자, 말 못할 고통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일단 서호부터 들르는 게 좋겠소. 항주에 살면서도 한 번도 들르지 못했으니.”
“그래요. 혹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사내의 팔을 뿌리친 독고유와 진효린은 문밖으로 나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를 나누었다.
사내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들 중 가장 덩치 큰 사내가 독고유의 뒤로 성큼 다가섰다.
턱!
독고유의 어깨로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순간 독고유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어이, 형씨. 우리가 누군 줄 아나?”
“날파리들한테도 이름이 있나? 요상한 세상일세.”
독고유가 피식 비웃으며 말하자, 사내들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파리가 말을 하네? 소저는 말하는 파리를 본 적 있소?”
“풋!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저도 처음이네요.”
이제는 진효린까지 나서서 사내들을 비웃었다. 독고유가 사내들을 비웃는 이상, 진효린도 그리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파리한테 죽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겠군. 안 그런가?”
챠르릉!
덩치 큰 사내가 차갑게 뇌까리자, 나머지 네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다.
삽시에 객잔 내부가 조용해졌다. 점소이와 객잔 주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객잔 입구를 응시했다.
“파리라 다행이군, 죽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독고유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내들의 이가 으득 갈렸다.
사내들이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하자, 독고유는 짐짓 겁을 먹은 듯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파리는 본래 장사 안 되는 집에 들어와야 되는 법이야. 여긴 장사가 잘되니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뭐야? 네놈……!”
챙강! 파사삭!
사내들이 저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더니 날이 산산이 부서져 그들의 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부서진 날이 손에 박히자,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독고유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진효린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진효린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독고유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역시 날파리라 검도 형편없군.”
독고유와 진효린은 그대로 객잔 밖으로 사라졌다. 다섯 무인들은 손을 부여잡고 낑낑대다가 이를 으득 갈며 객잔 밖으로 사라졌다.


제4장 파리 떼가 쫓아오다(1)


“정말 서호로 가실 건가요?”
객잔을 나온 독고유는 그대로 현을 벗어났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서호임에 틀림없었다.
“음, 갈 생각이오. 아니,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독고유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던 진효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서호 구경이 하고 싶은 거지요?”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오. 다만…….”
독고유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서호를 보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서호의 정취를 만끽하지 못했다.
마인들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기기 위한 정자들을 곳곳에 세우면서 완전히 망가진 모습들만 봐 오지 않았던가.
“좋아요. 그렇다면 아까 그 무인들의 검을 어찌 부쉈는지 가르쳐 주세요. 그렇다면 저도 아무 말 않고 따라가겠어요.”
“별것 아닌 잡기술이오.”
독고유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스쳐 갔다. 진효린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인 순간, 진효린이 멘 봇짐의 끈이 툭 떨어졌다.
“아앗!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푸하핫! 나는 분명히 보였소!”
독고유는 대소를 터뜨리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분한 외침을 내지른 진효린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독고유의 뒤를 따랐다.
서호가 가까워지자, 문구(文具)를 등에 짊어진 문인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서호로 향하는 이들이었기에 독고유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가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도록, 자신에게 또 하나의 지켜야 할 것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대인, 서호예요!”
한나절을 걸었을까, 진효린이 탄성과 함께 손을 들었다. 독고유의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