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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5화)
제4장 파리 떼가 쫓아오다(2)


바다라고 믿을 터였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호수는 이곳저곳에 늘어진 버드나무와 꽃향기가 어울려 신선들이 노닐 법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괜히 항주의 명관이 아니군요.”
진효린도 탄성을 터뜨리며 물가를 향해 달려갔다. 독고유는 이미 넋을 잃은 후였다.
연꽃이 잔뜩 피어난 정자로 달려간 독고유는 취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바로 곡원풍하(曲院風荷)라오. 아름답지 않소?”
“아름다운 정도가 아닙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노서생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가오자, 독고유는 어린아이처럼 외쳤다.
노서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소공자의 나이 즈음에 서호에 들어왔소.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갈 수 없었으니, 이 나이가 되도록 서호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오.”
“사시사철 풍기는 아름다움이 달라진다니,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지요.”
독고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런 곳이 마인들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런 곳에서 주지육림을…….”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던 독고유는 마두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그들 모두 마두가 아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곳에 오리라.
다짐하듯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런데 공자는 어디서 온 것이오? 명문가의 분이신 듯한데…….”
“하하, 저는 무인입니다.”
독고유가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하자, 노서생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허허……. 강호인들은 서호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소이다. 혹여 서호의 절경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서호의 아름다움을 즐기러 온 것이지, 무력을 자랑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요.”
독고유가 포권을 취하며 공손하게 답하자, 노서생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다면 좋소. 서호의 절경을 만끽하시구려.”
노서생의 인자한 미소를 본 독고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이내 독고유는 노서생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무슨 일이오?”
노서생이 당황한 듯 물었지만, 독고유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무슨……. 으엇!”
어리둥절해 하던 서생의 작은 눈이 삽시에 부릅떠졌다. 그를 감싸 안은 독고유의 신형이 그대로 서호 위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찰팍!
독고유의 신형이 나비처럼 수면을 박찼다. 새파란 호수 위를 헤엄치듯 독고유의 신형이 치솟아 올랐다 다시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본 적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아, 아름답소.”
노서생의 입에서 감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 그 한가운데에 서자 속세의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소공자 덕에 진귀한 경험을 하였구려. 서호의 문인들 중에서도 호수 안에서 경치를 맛본 이들은 별로 없을 거요.”
“저도 덕분에 거리낌 없이 서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독고유는 정자로 되돌아가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절정의 경신술이다. 조금이라도 균형이 흐트러진다면 그대로 물속에 빠질 수도 있을 터였다.
“대인! 대인!”
하지만 독고유의 평화는 일각도 되지 않아 깨졌다. 진효린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뭐요, 버드나무라도 쓰러졌소?”
독고유가 심드렁하게 묻자, 진효린이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아니요, 더 큰일이에요.”
독고유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이내 씩 웃은 독고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파리들이라도 따라붙은 모양이군.”
진효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독고유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벽조목 흑목도가 독고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서호는 절강의 중심이자 항주의 명소, 문인들의 터전에서 강호인이 이리 난동을 피우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노서생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나 주욱 도열한 오십여 무인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군신문의 문도에게 검을 들이댄 사내가 이곳에 있소. 강호의 율법이니 세외인은 관여하지 마시오!”
무인들의 중심에 선 장문인이 버럭 외쳤다. 은은한 내공이 어려 있었기에 서생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 이곳은 강호가 아니오! 이곳은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의 터전. 강호의 율법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소!”
노서생이 지지 않고 마주 외쳤다. 장문인의 한쪽 안면이 꿈틀거렸다.
“붓만 놀리는 쭉정이들이 입만 살았군.”
챠릉!
군신문의 장문인 하무군(廈武軍)이 팔을 들자, 오십여 군신문 무인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하무군의 손에 쥐어진 검이 그의 앞에 선 노서생에게로 향했다.
“우선 그 혀부터 베어야겠소.”
챠르르륵!
하무군의 신형이 검광을 흩뿌리며 쏘아져 들었다. 목전까지 날아든 검에 노서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채애앵!
“으아악!”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것은 자신의 목이 베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노서생의 목에 닿기 직전이던 검이 우뚝 멈추어 서더니 거미줄처럼 금이 가 터져 나갔던 것이다.
하무군의 오른손 손가락도 정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조금 빗나갔군.”
“크, 크으……. 네놈이로구나!”
손을 수습한 하무군이 고개를 휙 돌렸다. 서생들 사이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독고유가 손에 쥔 목도를 들어 올렸다.
“이곳이 피로 물든 것을 본 적이 있나?”
“무슨 헛소리냐!”
하무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독고유는 목도를 스윽 훑어 군신문 무인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그런 풍경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죽이지는 않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물러가라.”
독고유가 단호하게 말하자, 하무군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깟 목도로 우리 군신문의 일대제자들과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제자에게 새 검을 받은 하무군이 독고유의 목도 따위는 단숨에 잘라 버릴 듯 쉭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독고유의 눈빛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는 목도를 축 늘어뜨린 채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인 이전에 사람이 덜 된 놈들이로군.”
“뭣이? 노옴!”
하무군과 군신문의 무인들이 기합성과 함께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순간, 진효린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독고유의 왼손이 번개 같은 속도로 지풍을 쏘아 내는 것을 말이다.
채챙! 푸스슥!
수십 가닥의 지풍은 달려드는 무인들의 검을 그대로 부숴 버렸다.
“으아악!”
“저런, 아프겠군.”
팔목에 바람구멍이 생긴 무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독고유는 뒷목을 긁적이며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새까만 목도가 햇빛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노오옴!”
후우웅!
그제야 독고유의 곁에 다가든 하무군과 무인들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휘둘러진 것은 검병뿐, 검신은 이미 조각조각으로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엇?”
의문의 목소리가 하무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독고유의 목도가 그의 배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욱!
“컥!”
푸푸푹! 푹!
독고유의 목도가 삽시에 십여 개로 분하여 주위를 둘러싼 무인들의 복부로 찔러 들었다.
무인들은 토악질을 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파리라 톡 쳐도 쓰러지는군.”
빠바박!
이번에는 머리였다. 무릎을 꿇은 무인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목도가 한 바퀴 돌고 나자, 무인들의 몸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서호는 감상하는 곳이지 네놈들의 냄새 나는 검을 들이미는 곳이 아니야. 선생, 어쩔까요? 이놈들에게 서호의 물맛이라도 보여 줄까요?”
신음하는 하무군의 등을 지그시 밟은 독고유는 노서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노서생은 독고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호의 물은 아주 맑소.”
독고유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다면 인간이 덜 된 놈들이 더럽혀서는 안 되겠군요.”
“이, 이놈……. 크헉!”
빠각!
말을 잇던 하무군의 신형이 타격음과 함께 축 처졌다.
목도를 다시 허리춤에 끼워 넣은 독고유는 신음하는 군신문 무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싶다면 다시는 서호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군신문 무인들은 비틀대며 일어나 기절한 하무군을 질질 끌고 황급히 도망쳤다.
독고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서호에 개의치 않고 베어 버렸을 터였다.
어찌 보면 강호에 나온 이후 만난 모든 것이 하늘의 시험같이 느껴졌다.
진효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문인들이 하나 둘 독고유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대협일세!”
“군신문 놈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당하는 것은 처음 보았네!”
문인들의 입에서 독고유에 대한 칭송이 연신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독고유는 오로지 노서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인들의 사이를 뚫고 독고유에게로 다가온 노서생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고맙네. 하지만 서호는 문인들을 위한 것, 역시 도검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네.”
서생의 말에 독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언젠가 제 손에 도 대신 붓을 든다면, 그때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포권을 취한 독고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효린은 당황하며 독고유와 문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국은 축객령이로군요.”
“당연한 일이오. 서호를 보았으니 나는 만족하오.”
독고유의 얼굴에는 진효린의 생각과 달리 만족감이 가득했다.
돌아올 곳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보다 군신문 무인들이 걱정이네요. 그토록 심한 수치를 당하였으니 대인에게 원한을 품을 터인데…….”
진효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독고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죽여 버린다면 차라리 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서는 과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글쎄……. 똑똑한 놈들이라면 그쯤에서 꼬리를 내릴 테고, 멍청한 놈들이라면 파리들을 좀 더 이끌고 날 쫓겠지.”
“이번에 또 쫓아오면 어쩌실 셈인가요?”
진효린이 혹시나 하는 어조로 물었다.
독고유의 한쪽 입 끝이 스윽 올라갔다.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섬뜩한 웃음이었다.
“파리가 너무 많이 들러붙으면 별수 있소? 다 눌러 죽일 수밖에.”
“그렇다면 쫓아오지 않길 기도해야겠어요.”
“푸하핫! 내가 그래서 소저를 좋아하오!”
진효린이 단호하게 답하자, 독고유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더 이상 쫓아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말은 그리했어도 독고유의 속마음은 말처럼 잔혹하지 못했다.

“제기랄! 망할 연놈들…….”
하무군이 주먹을 쾅 내리치며 욕을 내뱉자, 주위에 둘러선 군신문 무인들이 움찔 몸을 숙였다.
머리와 얼굴에 생긴 멍에 얼음찜질을 하는 하무군은 독고유와 진효린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들! 그러고도 군신문의 문도란 말이냐! 이름도 없는 도객에게 당한 것을 알면 절강의 무인들이 우리를 뭐로 보겠냔 말이다!”
“하, 하지만 장문인께서도…….”
“닥쳐라! 내가 네놈들을 그따위로 가르쳤더냐!”
더듬대며 입을 열던 일대제자 하나가 하무군의 벼락같은 호통에 사색이 되어 물러섰다.
이를 으득 간 하무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 월하장에 전갈을 보내라! 보수는 얼마든지 줄 테니 그 연놈의 목을 베어 오라 해!”
“하,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셈이냐!”
하무군이 주먹을 쾅쾅 내려치며 외치자, 일대제자들이 황급히 장문인실 밖으로 몸을 돌렸다.
“기필코 네놈들의 머리로 두주(頭酒)를 빚으리라. 망할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