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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10화)
제7장 신의를 지키다(2)
“너, 너무 빨라요!”
“한나절 내에 구룡산까지 가려면 이 수밖에 없소. 조금만 참으시오!”
독고유의 등에 업힌 진효린의 입에서 우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독고유의 신형이 느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십여 장이나 위로 치솟아 오른 독고유는 마치 한 마리의 운룡(雲龍)처럼 허공을 미끄러지듯 주유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화살이 끝없이 쏘아져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아오! 내가 사서 왜 이 고생인지!”
쿵! 쿵!
지상으로는 주합이 불만을 토로하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네 발로 땅을 짚고 한 번 뛰쳐 오를 때마다 삼십여 장씩 호를 그리며 앞으로 날아들었다.
벌써 반나절을 이렇게 달리고 있었다.
산이 나오면 산을 타 넘고, 강이 나오면 강을 뛰어넘는 독고유의 신형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산적인가?”
작은 동산 하나를 뛰어넘은 독고유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적어도 이백여 기는 될 법한 산적들과 혈혈단신의 사내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 쓰지 말고 갑시다!”
뒤를 따르던 주합이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미 독고유는 마음을 굳힌 후였다.
“멈춰라!”
쿠우웅!
독고유가 산적들의 뒤편으로 내려서며 뇌성벽력 같은 호통을 터뜨렸다.
이백여 산적들의 고개가 삽시에 돌아갔다.
“이보시오, 무슨 일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사내들과 맞서고 있는 거요?”
독고유의 시선은 산적들 건너편의 사내에게 향해 있었다. 팔 척은 훨씬 넘어 보이는 거한의 사내에게 흥미가 동한 것이다.
사내의 등에는 쌀이 다섯 가마니나 지어져 있었다.
“이런 도적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대협께선 개의치 말고 가던 길 가시오!”
사내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굵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산적들의 두목이 발끈하여 외쳤다.
“우리 산채의 쌀을 훔쳐 간 도적놈이 우리에게 도적이라 하는구나!”
“흥! 도적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 게다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식솔들이 이십이나 있으니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길을 터라!”
땅이 울리도록 외친 사내가 한 걸음을 내딛자, 산적들이 움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산적 두목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한 놈에 불과하니 겁내지 마라!”
번쩍!
산적 두목의 거도(巨刀)가 번뜩이자, 주위의 산적들도 힘을 얻은 듯 사내에게로 다가들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진효린이 슬쩍 묻자, 독고유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주합도 짜증스런 기색을 거두고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후회하지 마라!”
산적들이 한 걸음씩 다가서자, 사내는 호기롭게 외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발아래의 땅이 움푹움푹 들어갔다.
“목을 베어라!”
쇄애액!
산적 두목의 외침이 떨어지자, 주위를 둘러싼 산적들이 단숨에 쇄도했다.
산적들의 병장기가 사내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병장기가 코앞까지 다가들었음에도 사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까가가강!
일시에 병장기들이 사내의 몸을 난도질했지만, 들려온 것은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사내의 몸에 병장기를 가져다 댄 산적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사내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투투투툭!
웃음에 놀란 산적들이 흠칫 물러섰다.
그 순간 산적들의 손에 들린 무기들이 일제히 반으로 부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겨우 그 정도가 다냐?”
경악은 공포로 바뀌었다.
사내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호기롭게 말하자, 산적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힘만 센 거한이 아니다. 외공의 고수다!
“그럼 이번엔 이 초석(礎石)님의 힘을 보여 줘야겠군! 각오해라!”
벼락처럼 외친 사내가 한쪽 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순간 만근거석이 내리누르는 듯 커다란 압력이 사내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쿵!
사내의 발이 힘차게 땅을 내리찍자, 주위의 땅이 함몰되는 것 같은 충격이 삽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땅거죽이 파도치듯 우르르 일어나고 산적들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땅바닥에 박혀 있던 병장기들이 사내의 몸 주위로 튀어 올랐다.
“흐어!”
사내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오자, 둥실 떠올랐던 병장기들이 수십의 칼날로 돌변해 사방의 산적들에게로 쏘아졌다.
서거걱!
살이 베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혈무(血霧)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사내 주위에 모여선 산적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쿵!
사내가 한 번 더 발을 구르자, 피안개가 삽시에 걷히며 주위에 늘어선 산적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내렸다.
서 있는 자들은 고작 오십여 명.
일격에 이백여 산적들 중 과반수가 피륙이 되어 스러진 것이다.
“가, 강해요.”
진효린이 독고유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척!
독고유의 미간으로 날아든 도(刀)의 날이 그의 검지와 중지에 붙잡혀 멈추어 섰다.
“히, 히익!”
살아남은 산적들은 공포에 질린 신음을 흘리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노려보다 버럭 외쳤다.
“꺼져라!”
“히익!”
산적 두목을 필두로 살아남은 산적들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사내는 그런 산적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돌렸다.
“이보시오!”
독고유는 멀어져 가는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사내의 야수 같은 눈동자가 독고유에게로 슬쩍 돌아갔다.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가던 길 가시오.”
“그게 아니라…….”
독고유가 쌀가마니에 손을 가져다 대자 사내가 단호히 말했다. 피식 웃은 독고유는 손에 쥔 도의 날을 터진 쌀가마니의 구멍에 가져다 대었다.
“가마니가 터졌소. 식솔이 이십인데 쌀 한 톨이라도 흘려선 안 되잖소?”
독고유가 씩 웃자,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내가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재미있으신 분이구만! 내 이름은 초석이오! 대협의 이름은 무엇이오?”
“내 이름은 독고유요. 외공이 대단하시오.”
독고유가 포권을 취하며 칭찬하자, 초석도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날린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내는 독고 대협도 대단했소. 혹 시간이 괜찮다면 이 초석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함께 가지 않겠소? 대협이라면 분명 모두 환영할 거요.”
초석이 선뜻 말하자, 독고유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영광이오. 그런데 머무는 곳이…….”
독고유가 말을 줄이자 초석이 이가 모두 드러나게 씨익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월하장이요! 혹시 알고 계시오?”
진효린의 얼굴에 순간 긴장의 빛이 어렸다.
월하장에 살고 있는 사내였단 말인가!
“아, 월하장? 잘되었네! 우리도 거기로, 읍!”
하품을 하며 말을 잇던 주합의 입이 턱 막혔다.
독고유가 팔을 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주합을 힐끗 쳐다보는 독고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월하장의 이름은 당연히 들어 보았소.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차였소.”
“흐흐, 잘되었구먼! 갑시다!”
초석은 웃음을 터뜨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다.
“내 아우 녀석이 힘 좀 쓰니 겸연치 마시오.”
독고유가 씩 웃으며 초석을 바라보았다.
초석은 그의 뒤에 선 주합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 젠장…….”
욕지거리를 연신 토해 내는 주합의 등에는 쌀가마니가 둘이나 얹어져 있었다.
“진정 사나이일세!”
그 모습을 바라본 초석이 호탕하게 외쳤다.
투덜대던 주합이 우뚝 멈추었다.
“흥! 이 술두꺼비님이 사나이가 아니면 누가 사나이란 말인가! 앞으로 열 가마니는 더 들 수 있소!”
“그으래?”
의기양양하게 말을 토해 낸 주합의 등 뒤로 독고유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합의 얼굴이 작게 꿈틀거렸다.
“하핫! 잡담은 그만 하고 어서 갑시다! 형님들이 기다리고 있소!”
주합을 독고유의 마수에서 구해 준 것은 초석이었다.
초석이 걸음을 옮기자, 주합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초 형이 월하장의 막내요?”
독고유의 눈치를 본 주합이 황급히 묻자, 초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막내요. 내가 가장 나중에 들어왔으니 막내지.”
주합이 놀란 표정을 짓자, 초석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형을 죽이고 역적이 된 날 받아 준 것이 형님들이라오. 나에게는 구명의 은인들이지.”
“사형을요?”
뒤에 따르던 진효린이 흥미가 동한 듯 물었다.
사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만한 이들이라면, 자신들의 가문도 공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임에 분명했다.
“사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음적이었소! 내 누이를 건드렸으니 죽어도 싸지!”
주합이 아까와 다른 기세로 버럭 외쳤다.
진효린은 그제야 수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어째서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하는 거요?”
독고유가 조용하자, 주합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잠깐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독고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주합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져 나갔다.
“무슨 생각이요? 혹시 형님도 사형을 때려죽였소?”
비실비실 웃던 주합은 독고유의 한쪽 눈썹이 꿈틀대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흐음…….”
독고유는 감흥이 새로운 눈빛으로 초석을 바라보았다.
월하장주 문추를 비롯한 십구 인의 월하객(月下客)이 앞장서서 정파인들을 도륙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번에는 그리되지 않게 해야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독고유가 굳은 다짐으로 눈을 빛내는 찰나, 진효린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대인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말을 마친 진효린은 혀를 날름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독고유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나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는 법이라오.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하는 것도 대인에 대한 결례요.”
독고유가 장난기를 가득 담아 말하자, 진효린은 독고유의 눈을 올려 보며 이가 드러나게 씨익 웃었다.
어쩐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독고유는 황급히 앞서 걸어 나갔다.
“대인도……. 서툰 면이 있으시다니까.”
일행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가는 독고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웃음을 터뜨리는 진효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