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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11화)
제7장 신의를 지키다(3)
월하장.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꼭 달 아래에 위치한 것 같아 보이기에 붙여진 이름.
그 이름에 걸맞게 월하장의 지붕 바로 위에 달이 둥실 떠 있었다.
꼬박 한나절을 걸어 구룡산에 도착한 주합은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하지만 초석이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아서인지 이번만큼은 한마디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월하장을 올려 보는 독고유는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월하장에 들어 해야 할 일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었다.
한 번에 두 마리, 아니 세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한다.
“칼부림도 각오해야 하는가.”
일대일이라면 손속에 사정을 두고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월하장의 장주와 월하객들이 모조리 덤벼든다면 그로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자칫하여 한 명이라도 죽인다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다.
“독고 대형, 어서 오릅시다. 아마 다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나뒹굴고 있을 거요.”
독고유의 낯빛이 굳어진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앞서 나가는 초석이 그를 재촉했다.
독고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을 일찌감치 눈치 챈 것은 진효린이었다.
“뭔가 있으신 걸까, 월하장에?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나.”
독고유에게 물어도 절대 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직접 봐야 답을 알 수 있을 터인데, 굳어진 독고유의 얼굴을 보니 왠지 겁이 나기도 했다.
“소저.”
“네, 네에?”
마침내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진효린은 옮기던 걸음도 화들짝 멈춘 채 황급히 대답했다.
독고유의 진중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아까부터 자꾸 내 얼굴만 바라보는 것을 보니, 혹…….”
“…….”
“드디어 이 대인에게 반한 것이오? 허어, 드디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연모하는 마음이 커진 것이구려!”
“아니에요!”
독고유가 기쁜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 순간 진효린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앞서 가던 초석과 주합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두 분은 서로 사모하는 사이시오?”
“둘 다 약간 이상한 사람들이니 난 알다가도 모르겠소.”
초석은 주합의 심드렁한 대답에 피식 웃고는 진효린에게 외쳤다.
“독고 대형은 정말 괜찮은 사내 같소! 안 그렇소, 소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초석의 어울리지 않는 짓궂은 농담에 진효린은 귓불까지 빨갛게 익어 버럭 외쳤다.
독고유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것 보시오! 주위 사람들도 다 눈치 챘잖소! 푸하하! 소저는 조금 더 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겠소!”
“흥! 빨리 월하장에나 올라가 보아요! 그래야 저들이 우리의……. 앗!”
앙칼진 목소리로 외치던 진효린이 순간 토끼 눈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초석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저들이 우리의…… 뭐요?”
“호, 호호…….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확실히 말해 줄, 그럴 거라고요. 호호…….”
진효린이 황급히 덧붙였다. 초석이 꺼림칙함을 묻기도 전에 독고유의 웃음소리가 재차 터져 나왔다.
“월하객들도 우리가 연정을 나누는 사이 같다고 하면, 소저 어쩌려고 그러오? 하하핫!”
초석은 독고유의 목소리에 피식 웃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진효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효린이 자기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앞서 나가자, 독고유의 표정이 다시 무표정하게 변해 갔다.
그의 시선이 달빛에 비친 월하장의 현판으로 향했다.
‘그때는 이 현판을 단박에 두 동강 내 버렸었지.’
불현듯 과거의 일이 떠오르자,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무모한 행동이었다.
월하장을 힘으로 제압하고 힘으로 설득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번에는 말로 결판을 볼 것이다. 그때와는 다르다.’
마도천하를 막기 위해 꼭 손을 써야 하는 곳, 월하장.
그들 개개인이 모두 극악한 마두라면 모르되, 그들 모두가 실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무인들임을 아는 이상 결코 그들을 죽음이나 끝없는 허무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도착했수. 들어가 봅시다.”
독고유의 눈빛이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났다.
그럼에도 초석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월하장의 대문을 박차며 힘차게 들어섰다.
“형님, 이 막내가 쌀과 손님을 잔뜩 이고 왔소! 응?”
우렁차게 외쳐 배를 주리고 있을 형님들을 찾은 초석의 얼굴에 이내 경악의 빛이 어렸다.
십팔 인의 월하객들과 월하장주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멧돼지를 구워 먹고 있지 않은가!
“구, 굶고 있는 게 아니었소?”
초석이 허탈하게 묻자, 가장 끝에 앉아 있던 월하객 구검(九劍)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산에 짐승들 천지인데 굶고 있었겠냐. 쌀 이고 오느라 수고했다. 어서 와서 고기라도 한 점 뜯어라.”
초석뿐만 아니라 주합의 얼굴에도 허탈함이 번져 나갔다. 그렇다면 이토록 힘들여 쌀을 잔뜩 가져올 필요가 없었지 않은가.
“막내가 손님을 모시고 왔구나.”
멧돼지 고기를 질겅질겅 씹던 월하장주 문추가 독고유 일행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긴 했으되, 표정과 어투에서는 관심도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월하장주 문추. 별호는 빙마도(氷魔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 움직이고 사람을 사귀는, 그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차가운 사내다.
그나마 독고유 일행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월하장을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판단하기에 월하장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는 자라면 또한 가차 없이 베어 버릴 터였다.
“아, 이분은 독고…….”
“대인 독고유요. 월하장에 볼일이 있어 찾아왔소.”
초석이 독고유를 소개하려는 찰나, 독고유가 포권을 취하며 앞으로 나섰다.
독고유를 소개하려던 초석의 눈가가 순간 꿈틀거렸다.
“볼일이라니 무슨?”
문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다.
독고유는 품에 간직했던 월하장의 목패를 그의 발치에 던지며 물었다.
“혹시 이곳에 철륜을 무기로 쓰는 형제가 묵고 있지 않았소?”
“공 형님들 말이오?”
놀란 듯 독고유를 바라보고 있던 초석이 번개처럼 물었다.
하지만 문추의 시선은 목패에 향해 있었다. 그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가 다시 독고유에게로 향했다.
“이건 그 녀석들의 것인데, 녀석들은 어찌 되었소?”
주합의 침 삼키는 소리가 독고유의 귓가로 들려왔다.
문추와 시선을 맞부딪치던 독고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소.”
“……!”
초석의 경악한 눈동자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식사에 전념하던 월하객들의 움직임도 일시에 멈추었다.
“대, 대인, 도대체 어쩌시려고…….”
심장까지 얼릴 듯 가라앉은 분위기에 진효린만 독고유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선 독고유의 등은 여전히 당당하기만 했다.
독고유를 바라보는 문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국 죽었는가. 군신문 같은 놈들과 어울리더니…….”
독고유의 한쪽 입 끝이 스윽 올라갔다.
득의양양한 미소가 금방이라도 얼굴에 피어오를 듯했다.
독고유가 기억하는 월하객들 중 철륜을 무기로 쓰는 형제는 없었다.
자신이 월하장과 처음 인연을 맺었던 것은 지금보다 몇 달이나 뒤. 그 사이에 그 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짐작한 것이 제대로 맞아 들어간 것이다.
“비록 공 형제가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나 쉽게 당할 이들은 아닐 터인데.”
독고유를 바라보는 문추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독고유를 얕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인배는 몇백 몇천이 달려들어도 이 대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소.”
하지만 독고유는 그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문추가 자신을 어찌 보는지는 이미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모든 일이 독고유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문추의 유리알 같은 시선이 독고유의 눈빛과 마주쳤다.
“대인이라? 하핫! 스스로를 대인이라 칭하는 광오한 인물이 아직 강호에 남아 있었다니!”
독고유를 바라보던 문추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기만 하던 그의 전신에 실오라기 같은 기운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는 독고유! 강호에 홀로 흐르는 대인이오!”
이에 독고유의 입에서 뇌성벽력과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위로 스멀스멀 퍼져 나가던 문추의 기세가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초석의 태산과 같은 신형이 날아들었다.
“형님들의 원수라면 대인이라도 베겠소!”
콰앙!
강철 같은 초석의 주먹이 독고유의 머리를 으깨 놓으려는 찰나, 두꺼운 팔뚝이 그 앞을 막아섰다.
어느새 주합이 독고유의 앞에 나서 있었다.
“방금 내가 초 형의 목숨을 구했소.”
주합이 씩 웃으며 초석에게 말했다.
초석이 이를 으득 갈며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멈춰라, 초석.”
주먹이 한 번 더 허공을 가르려는 순간, 차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문추의 목소리였다.
놀란 초석의 눈빛을 외면한 채, 그는 독고유의 자신만만한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인이라면 응당 대의(大義)를 안고 있을 터. 그것이 월하장주인 이 문추의 앞에서 당당히 밝힐 만큼 대단한 것인가?”
폭류와 같은 기세가 독고유의 전신을 따끔따끔하게 찔러 들어왔다.
문추의 송곳과 같은 목소리가 독고유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파스슷!
독고유의 머리칼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원(怨)과 한(恨)이 모여 만들어 낸 대의라면, 이 대인의 웅지에 털끝만큼도 미치지 못한다!”
독고유의 외침이 벼락처럼 월하장주에게로 내리꽂혔다.
문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월하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의 기운이 독고유의 기세에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쩌정!
독고유의 전신에서 응어리져 있던 기운이 일시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월하장의 대문이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나갔다.
새하얀 달빛이 독고유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역천(逆天)을 꿈꾸지 말라! 강호는 정파의, 사파의, 마도의 것도 아니니! 피의 길 끝에 남는 것은 규탄과 허무뿐!”
월하장주와 월하객들의 안색이 삽시에 새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이 사내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나아가 자신들의 미래까지도 모조리 읽어 내고 있는 듯했다.
독고유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와룡(臥龍)의 기세로 때를 기다리라! 그대들의 원한은 이 대인의 손으로도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것인즉! 그것으로 천하를 뒤엎을 꿈을 꾸지 말라!”
“그 말은 곧…….”
창백하게 질린 문추의 입에서 바람 새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빛을 가득 짊어진 독고유의 모습이 그의 뇌리 가득 각인되고 있었다.
“이 대인의 그늘 아래서 강호를 보라! 그대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 이 대인이 만들어 낼 강호의 미래에 해묵은 은원이 설 자리는 없다!”
“우리가 당신을 믿는다면, 분명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쟁취할 수 있는가?”
문추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느릿느릿 물었다.
독고유는 참아 왔던 웃음을 얼굴에 가득 보이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대인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분명 할 수 있겠지.”
문추는 웃음 속에 감추어진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응시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