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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12화)
제8장 두 번의 자비는 없다(1)


“이곳이 바로 천하인가…….”
굳건히 선 문추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월하장 벽면에 새겨진 천하(天下).
대인이라는 사내가 목도를 들어 새긴 거대한 문구였다.
‘네가 있는 곳이 바로 천하다!’
독고유의 목소리가 문추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대인의 그늘 아래가 곧 천하이니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그의 뜻이 문추의 가슴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형님…….”
그의 뒤로 다가온 초석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초석의 눈빛을 본 문추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초석은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하시는 일이 곧 형님다운 거요.”
말을 마친 초석은 문추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음장 같은 미소 대신 아침 햇살 같은 포근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은…….”
웃음 짓는 문추의 입에서 그답지 않은 따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순간만은 월하장주가 아닌 너희의 형으로 있고 싶구나.”
“하핫! 이 순간만이 아니라 형님은 언제나 모두의 대형(大兄)이오!”
초석이 웃음을 터뜨리자, 문추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천하라는 글자에서, 그의 마음을 흔든 독고유의 얼굴이 겹쳐졌다.
‘대형이 향하셨으니 군신문도 강호에서 지워지겠군. 우리들의 원한도…….’

“아우, 삭신이 쑤시는군!”
“그것도 힘 좀 쓴 거라고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요? 그냥 걷기 싫은 거지?”
주합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월하장을 나온 독고유는 비명이라는 비명은 모조리 질러 대며 엄살을 부렸고, 결국 자신이 업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독고유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전신 기혈이 찌르듯 아파 왔던 것이다.
유(柔)한 기운이 폭(暴)의 기세로 변했을 때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반작용이 이토록 크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러게 멋 부릴 때부터 알아봤수!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초 형이 두들겨 팰 때 가만히 놔둘 것을…….”
“그래도 두꺼비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는걸.”
주합이 투덜거리자, 진효린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주합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흥! 이 주합에게 의리를 빼면 시체요!”
“의리는 무슨, 나서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아이고, 허리야…….”
독고유가 비실대며 말하자 주합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 갈등했다.
이대로 땅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말은 그리했어도 독고유는 주합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뒷골목 파락호들이 반할 만한 의리와 힘을 지닌 사내. 술버릇만 조금 고쳐 놓으면 분명 대형이라 불리리라.
진효린에게도 주합의 존재는 큰 의의가 있었다.
의리와 정이라고는 태어나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그녀가 아닌가.
“몸 상태가 이래서야 날파리 소굴을 무너뜨리기도 힘들겠는걸.”
독고유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군신문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들의 의뢰가 실패한 것을 알면 더한 공격을 해 올 터다.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냥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죽이실 건가요?”
생각에 잠긴 독고유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자, 진효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상념을 걷어 낸 독고유가 빙긋 웃었다.
“글쎄, 잘 모르겠소. 녀석들이 강하면 죽고, 약하면 살겠지.”
그의 선문답에 진효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약하길 바라야겠네요.”
독고유를 빤히 바라본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주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놈들이 강해 봤자지요. 형님이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될 거요.”
“아…….”
주합의 말에 진효린은 그제야 독고유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약하다면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있기에 살겠지만, 강하다면 사정을 둘 수 없으니 죽는다.
‘그렇다면 대인의 진신 무공은……?’
실실 웃고 있는 독고유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효린은 등골에 오한이 들었다.
얼마나 살초가 난무하는 무공일까.
“아씨, 하필 이런 때에…….”
독고유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효린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멈추시오!”
푸푸푹!
물러서는 그녀를 주합이 황급히 끌어당겼다.
그녀가 서 있던 땅으로 비도가 벌집처럼 날아와 박혔다.
“살수인가요?”
진효린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방에 풀숲이 무성하기만 할 뿐, 살수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살기도 없다.
진효린은 느끼지 못하고 독고유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갈무리된 살기이리라.
“이번엔 또 누가 보낸 거지?”
주합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독고유가 투덜댔다.
그의 피부로 바늘 같은 살기가 찌릿찌릿하게 느껴졌다.
“주합, 소저를 잘 지켜라.”
독고유가 목도를 뽑아 들며 말하자, 주합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효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숨을 내쉰 독고유의 얼굴에 짜증과 단호함의 기색이 서렸다.
“단박에 끝내야겠군.”
목도가 독고유의 양손에 굳게 쥐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진효린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독고유의 손에 쥐어진 목도가 천천히 횡으로 당겨지는 순간, 주위의 모든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스으윽!
독고유의 목도가 당겨진 것과 같은 느릿한 속도로 호를 그렸다.
진효린의 눈에 목도가 그린 새하얀 호가 비춰졌다.
파사삭!
목도에서 뿜어져 나온 도기에 십오 장 내에 있던 풀숲과 나무들이 깨끗이 베여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틈으로 십여 명의 새까만 인영들이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오옷?”
일격을 피해 낼 줄은 몰랐기에 독고유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단련된 살수들이다. 못되어도 일류는 될 터였다.
“그렇단 말이지?”
흥미롭다는 듯 외친 독고유가 자신이 베어 낸 풀숲으로 달려들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살수들의 시선이 독고유에게로 향했다.
갈무리된 살기가 독고유에게로 쏟아졌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옭아매는 족쇄가 될 터이다.
촤르르륵!
독고유가 잘린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솟구쳐 오르자, 살수들의 신형이 핑그르르 돌며 기백의 비도들을 쏘아 냈다.
만천화우와 같은 기세다.
하지만 독고유는 오히려 그 비도들의 중심으로 솟구쳐 올랐다.
목도를 쥔 그의 몸이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효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느릿느릿 몸을 돌리는 독고유의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물결치듯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촤르륵!
그의 전신으로 쇄도한 비도들은 그 기운의 끄트머리에 닿자, 일시에 움직임이 멈추었다.
비도에 에워싸인 독고유의 몸이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허공에 우뚝 멈추어 선 비도들이 독고유의 기운에 따라 천천히 그의 몸 주위로 돌기 시작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같기도 하고, 검의 최고 경지라는 신검일체(身劍一體)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살수들의 눈빛에도 경악이 서렸다.
비도를 막는 자들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날아드는 비도를 내공을 이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촤르르륵!
모두들 경악하여 멈추어 선 가운데 독고유의 신형이 물 흐르듯 허공을 주유했다.
그의 손길 한 번에 비도들은 급류를 탄 듯 휘몰아쳤고, 그의 발이 허공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흐르는 비도들은 더욱 크고 격렬하게 회전했다.
피해야 한다!
그제야 살수들은 현실을 인지했다. 독고유의 움직임에 넋을 빼고 있다간 당장에라도 목숨을 잃을 것이었다.
서로 눈빛을 맞춘 살수들은 삽시에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들의 신형이 독고유 대신 진효린에게로 쇄도했다.
“이놈들이!”
진효린의 앞에 선 주합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콰아앙!
주합이 땅을 내려찍자, 흙이 튀어 오르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살수들의 신형이 좌우 두 갈래로 갈라졌다.
“……!”
좌우로 갈라진 살수들의 눈이 삽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땅으로 내려온 독고유가 춤을 추듯 목도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살수들의 좌우로 급류 치듯 날아든 비도들이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후두둑!
피륙으로 변한 살수들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독고유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후우…….”
아직은 몸이 머릿속의 무학을 따라가지 못한다.
온몸의 기혈이 고통스럽게 요동쳤고 숨도 턱까지 차올랐다.
“형님, 괜찮소?”
독고유가 비틀대자, 주합이 황급히 달려와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는 주합을 슬쩍 밀어내며 이마를 닦았다.
“괜찮다. 그보다 이놈들은 어디서 온 거지?”
“생각보다 강한 녀석들이었수. 형님의 일격은 나도 쉽게 피하리라 생각 못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는데…….”
주합이 인상을 찌푸리며 살수들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진효린도 갈가리 찢긴 살수들을 내려다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혀가 없군. 어금니 안쪽에 독주머니도 들어 있어. 일급 살수들이다. 이런 살수들을 고용할 수 있는 곳은 몇 없을 텐데…….”
살수 하나의 복면을 벗긴 독고유는 신음을 흘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스스로 혀를 자르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독주머니까지 구비한 살수들이라면 분명 절대 밝혀져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의뢰를 받는 쪽이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형님이 아니라 누님을 노렸소. 혹시 의심 가는 상대는 없소?”
이런 종류에는 해박한 주합이다.
주합이 날카롭게 묻자, 진효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를 노려서 죽일 만한 상대…….
“분명 우리 가문의 원수일 거예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입막음을 하려 한 모양이네요.”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살아 있으니 의뢰를 한 것인가.”
살수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독고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가를 몰살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완벽한 끝맺음까지 꿈꾸고 있는 흉수(兇手).
“이런 암살 집단은 우리 하오문 외에는 몇 없수. 하오문의 살수들은 대부분 기녀나 창기들인 데다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으니 하오문은 아닐 거요. 그렇다면 살문(殺門)이나 은첩문(隱疊門) 중 하나일 텐데…….”
살수들의 잠행복으로는 두 문파를 구별해 낼 수 없다.
잡히더라도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살수들의 복장은 모두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검은 잠행복이었다.
“주합.”
“왜, 왜 그러시오, 형님?”
독고유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주합이 숨을 들이켜며 그를 바라보았다.
독고유는 살수들의 시신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살문과 은첩문에 가도 의뢰인의 이름을 알 수는 없겠지?”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오? 문주를 잡아 족쳐도 그건 알 수 없을 거요.”
“그럼 됐다.”
독고유는 그제야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합이 당황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뭐 더 어떻게 하지는 않는 거요?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저기서 뭔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냐?”
독고유가 어깨를 두드리며 묻자, 주합은 뜨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방법이 없지. 내가 괜히 나서서 살문이건 은첩문이건 박살내 버린다면 오히려 그 흉수를 더 알 수 없을 게 아니냐.”
“그, 그것도 그렇소.”
“게다가 소저도 점점 속이 메스꺼워지는 모양이니 그냥 가는 게 나을 거다. 아직 소저가 죽지는 않았으니 흉수는 또 공격해 올 게 분명해. 더 강하고 더 잔혹한 방법으로 말이지.”
“그렇군. 쳇! 도대체 머릿속에 능구렁이가 댓 마리는 들어앉은 모양이우.”
독고유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주합은 더 할 말이 없는 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 듯 독고유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깐, 그 말은 곧 나도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잖수?”
“지금 내 손에 죽으나 나중에 딴 놈에게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지. 안 그래? 그러니까 그전에 흉수를 찾으면 되는 거지.”
“제, 젠장…….”
주합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다. 독고유가 그렇게 정한 이상 필사적으로 따르는 수밖에는.
사실 독고유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위험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전까지 저를 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진효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위험하다는 사실도 그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릿속에 온통 원수에 대한 생각만 가득한 것이 분명했다.
“누님은 겁도 안 나오? 그 원수는 다시 누님의 목숨을 노릴 거요.”
“원수가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내 몸 따윈 죽어 없어져도 상관없어. 대인께서 원수를 갚아 주실 테니까.”
진효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합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과…….”
그저 맘에 안 드는 놈들은 두들겨 패고, 술이나 마시면서 살아오던 주합이다.
목숨이 위험한 곳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무엇인가. 짚단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름통까지 챙길 인물들이 아닌가.
“에이, 젠장! 적당히 따라다니다가 몸을 빼든가 해야지.”
결국 주합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은 독고유와 진효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술두꺼비, 저게 날파리 소굴이냐?”
숲이 우거진 길이 끝나자, 큰 장원이 딸린 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유가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키자 주합은 건물들을 죽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수.”
“가 볼까? 대인의 앞걸음을 막아서는 날파리들에게 자비로울 필요는 없겠지?”
독고유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주합의 고개가 아래위로 진효린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좋아, 의견이 일치하는군.”
“부, 분명 달랐는데요?”
독고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자, 진효린이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냅두슈. 아무리 누님이라도 저 똥고집은 못 말릴 거요.”
“주합아, 이 주위는 불에 잘 타는데 우리 한 번 더 할까?”
“아, 아니오! 어, 어서 갑시다!”
사색이 된 주합이 앞서 걸어 나갔다.
주합을 앞세운 세 사람은 군신문의 본관으로 유유히 발걸음을 옮겨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