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명부마도 1권(14화)
제9장 광인의 사랑(1)
무이산(武夷山).
신선이 노닐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 산의 계곡들은 안개를 가득 머금고 서른여섯 개의 봉우리 사이로 굽이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산의 풍경이 그대로 비치는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찰랑.
작은 파장이 구곡계(九曲溪)의 수면 위로 퍼져 나갔다.
찰랑.
그 파장은 호를 그리며 조금 더 멀리서 다시 일어났다.
신선과 같은 새하얀 인영이 강물 위를 노닐고 있었다.
파장은 그의 발끝에서 피어났다.
속세의 흐름을 잊은 듯 백의 미공자의 표정은 고요하고 또한 고귀해 보였다.
찰팍!
강물 위를 노닐던 미공자의 몸이 강물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로 물이 피어올랐지만 미공자의 몸은 전혀 물에 빠지지 않았다.
미공자의 옥안(玉顔)이 수면에 비쳤다.
아름답고 고귀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공허한 눈빛이다.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미공자는 손가락을 수면에 가져다 댔다.
은유란(銀流蘭).
그의 손가락이 여인의 이름을 물 위에 새겼다.
미공자가 사랑한 여인,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여인…….
그의 손이 그녀의 이름을 보듬으려는 듯 수면을 헤집었다.
찰팍.
그의 손이 수면을 덮자, 물 위에 새겨져 있던 이름이 파장과 함께 흩어졌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한 줌의 물뿐.
꿈틀.
그것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공자의 눈매가 작게 꿈틀거렸다.
“유란…….”
미공자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공허하던 그의 눈에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분노!
속세의 모든 것을 향한 분노의 빛이 미공자의 눈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철퍽!
미공자의 발이 수면을 박차고 치솟아 올랐다. 새하얀 도복이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펄럭였다.
콰콰쾅!
그의 팔이 한 번 크게 휘둘러지자,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과 함께 고요하던 강물이 폭발하여 일시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유란!”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 사이로 미공자의 절규가 산을 가득 울렸다.
“광동으로 가신다구요?”
“그렇소.”
진효린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연신 물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던 독고유도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이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어째서죠?”
“단서가 희박하니 진가의 본관에 내가 직접 가 봐야겠소.”
벌써 열 번째 같은 대답이다.
독고유는 한숨을 쉬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복건의 무이산에도 볼일이 있소.”
“어째서, 어째서…….”
진효린은 야속한 듯 중얼거리며 독고유의 주위를 서성였다.
독고유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곳에 또다시 가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흉수를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방향을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으로 바꾼다면, 그들은 작은 단서 하나조차 남기지 않을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하나의 거대 세가를 하룻밤 만에 무너뜨리고, 일개 삼류무인에 불과한 생존자를 죽이기 위해 일류살수들을 고용했다.
‘생각보다 큰 집단일 수도 있다. 과거에 나와 싸웠던 적이 있는…….’
독고유는 이를 으득 갈았다.
어쩌면 자신의 수하 중에 있을 수도 있었다.
광동으로 향하는 길에 들를 무이산에 있는 사내처럼.
스스로 마(魔)에 빠진 그 사내처럼…….
“그런데 무이산에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요?”
“응? 있어, 광인(狂人).”
주합이 주위를 부산히 도는 진효린을 무시하며 물었다.
독고유는 씩 웃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많은 이야기를 웃음으로 감췄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합이었다.
“좀 자세히 말해 주슈. 맨날 그렇게 말을 줄이니 싸움이 나는 거요.”
“좀 더 줄여서 지금 당장 싸울까?”
“그냥 웬만하면 말해 주슈.”
깡이 많이 늘었다.
독고유는 주합을 아래위로 쓰윽 훑어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사랑에 미쳤고, 지금은 슬픔에 미친 광인이지. 이대로 놔두면 분명 희대의 광마(狂魔)이자 살인귀가 될 거다.”
“강하오?”
“네놈이 상대하면 십초도 견디지 못할 거다. 나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녀석의 십초지적을 견딜지 확신할 수 없고.”
“많이 강하군. 이거 위험하겠는데…….”
여차하면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하며 주합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 지금 만날 녀석을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거요.”
“……?”
안절부절못하던 진효린이 고개를 돌렸다.
독고유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거요. 그러니 어서 갑시다. 닷새면 무이산에 도착하오.”
“많은 것……?”
진효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독고유는 이미 저만치로 걷고 있었다.
‘슬픔과 고통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면 어찌 되는지를 보게 될 테니까.’
독고유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마, 혹은 살귀(殺鬼) 영무흔(英無欣). 홀로 사파의 무인 일천을 도륙해 그 피를 마시고 고기를 씹었다는 마두 제일의 살인귀.
그를 그런 길로 빠뜨린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일개 서생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희대의 살인마로 변한 것이다.
‘아직 기회는 있다. 나는…… 알고 있으니까…….’
무공을 완성한 그가 마침내 광마로의 주화입마에 빠진다면 아무리 독고유라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그는 이중인격의 살인귀이기에 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리고 독고유는 그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무위로…….’
꾹 말아 쥔 독고유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야, 술두꺼비!”
“네, 네에? 형님?”
독고유가 불현듯 버럭 외치자, 주합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몸을 뺄까 고민하던 찰나였으니 지레 찔린 것이다.
“나랑 한번 싸우자!”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요?”
휘오오!
주합이 황당한 표정으로 외쳤지만, 어느새 독고유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 잠깐……. 혹시 내 생각을 읽은 거요?”
휘르륵!
주합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하지만 이미 독고유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독고유의 목도가 실오라기 같은 기운을 흩뿌리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에, 에라!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코앞으로 날아드는 목도를 노려보며 주합은 필사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내 둘의 신형이 한데 뭉쳐 들었다.
수십 합의 기합성과 격타음이 울려 퍼졌다.
일각 후.
“하아……. 술두꺼비에게 이십삼 초라…….”
독고유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나한테 이십삼 초 만에 이겼다고 분해하는 거요? 나 참, 갑자기 덤비더니 하는 말이…….”
주합이 시퍼렇게 멍이 든 눈을 차돌로 문지르며 투덜댔다.
하지만 주합이 본 독고유의 무위는 정말 강했다.
이십 초 만에 자신의 모든 권로를 막았고 삼 초 만에 자신을 쓰러뜨렸다.
“대인!”
독고유가 숨을 고르며 목도를 집어넣으려는 찰나, 진효린의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독고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씩씩대는 진효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왜 그러시오가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준비도 안 된 사람을 공격하다니!”
“누, 누님…….”
주합이 감격한 얼굴로 진효린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어진 진효린의 말에 그의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제 든든한 호위란 말이에요! 싸워야 할 때에 싸우지 못하게 되면, 대인이 책임지실 건가요?”
“그, 그런 거였나…….”
주합과 독고유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았소, 앞으로는 준비할 시간은 주지. 하지만 술두꺼비 녀석이 아니면 마땅한 대련 상대가 없으니 별수 없소.”
“주합과 노니는 대인이라, 그럴듯한 문구가 떠오르는군.”
독고유가 심드렁하게 대답한 찰나, 그의 뒤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독고유의 고개가 득달같이 돌아갔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소?”
그의 시선이 서책에 글을 휘갈기고 있는 청의의 서생에게로 돌아갔다.
새하얀 얼굴과 갸름한 얼굴은 태어나고부터 힘든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처럼 품위가 넘쳤다.
“이보시오?”
독고유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지만, 서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쓰고 있는 글에 전심전력을 다해 몰두하고 있었다.
뚫어질 듯 서책을 내려다보는 그의 손끝에서 붓이 춤을 췄다.
“뭐라고 쓰고 있는 거요?”
“시예요. 제목은 합합화화(蛤合和?). 두꺼비와 어울리는 단풍나무라…….”
알고 있는 글자 수가 극히 적은 주합이 서생이 쓰고 있는 서책을 내려다보며 묻자, 진효린이 답했다.
“거의 물아일체의 수준이로군. 지켜봅시다.”
독고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서생을 쳐다보았다.
주위에 세 사람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완전히 자신이 쓰고 있는 시에 몰입해 있었다.
“다 되었다! 완벽해! 내 시첩에 또 하나의 명작이 탄생했군!”
일각 가까이가 지났다.
독고유는 서생이 서책을 벼락같이 집어 들며 외치자, 깜짝 놀라 흠칫 물러섰다.
“한번 보겠소? 이 운공(雲工)의 명시요!”
서생은 옆에 선 주합을 붙잡고 아직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서첩을 들이댔다.
주합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서첩을 보았다.
하지만 주합이 어려운 글자를 해독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조, 좋구만.”
그의 입에서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운공은 그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좋을 수밖에 없지! 이 운공의 천재적인 감각은 시상이 무엇이건 최고의 문장을 뽑아낸다오!”
운공이란 서생의 자화자찬에 주합과 진효린이 쩔쩔맸다.
그의 교묘한 언변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릴 시간도 주지 않았다.
“운공? 운공이라…….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그런 운공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고유의 눈빛이 과거의 깊은 곳을 더듬었다.
결코 범상치 않은 사내다.
광인 같기도, 천재 같기도 한 모습과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능력.
게다가 운공이라는 이름은…….
‘그, 그렇군! 운공 경진천(驚振天)! 무당제일검의 별호를 어찌 잊었는가!’
독고유의 눈이 번쩍였다.
무당제일검 경진천! 하지만 그의 평소 행실은 괴악하기 짝이 없어서 스스로를 운공이라 칭하며 훌쩍 사라지기 일쑤였다 했다.
‘그렇다면…….’
그의 눈동자가 쩔쩔매고 있는 주합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경진천이 억지로 서첩을 건넬 때마다 비지땀을 흘리는 주합.
그의 기억이 맞다면 경진천은 주합의 손에 죽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강호로 출행한 지 적어도 한 달은 지난 듯했다.
과거의 그때라면 지금쯤 자신은 마도로 이름이 퍼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그의 이름이 강호 구석구석 퍼져 나갈 때쯤 경진천이 무당을 이끌고 일어섰었다.
“무당제일검 경 대협.”
독고유가 떨리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다가섰다.
경진천의 고개가 휘익 돌아갔다.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오! 날 알아보는 사람이 단풍 대인이라니 영광이오! 하지만 지금은 묵객 운공이니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오!”
경진천이 서책을 팔랑이며 다가오자, 독고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기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공허하기도 하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만질 수는 없는 안개와 같았다.
“그런데 단풍 대인께선 어디로 가는 길이오? 혹시 절강으로 향하고 있지 않소?”
녹초가 되어 버린 진효린과 주합을 흐뭇하게 바라본 경진천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난 광동으로 향하고 있소.”
“아아! 이렇게 엇갈리는 운명인가! 구름이 용을 만났건만 흐르는 방향이 다르구나!”
독고유가 답하자, 경진천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진심으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독고유의 눈빛은 차갑게 일렁였다.
‘이 사내, 내 무위를 소상히 꿰뚫어 보고 있다.’
무인으로서, 마도종주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자신보다 강자에 대한 적대감이 치솟았다.
“그럼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납시다. 덕분에 운공의 명시선에 단풍 대인과 두꺼비 대협의 이야기가 섞여 들었으니, 이 운공으로서도 영광이었소.”
경진천이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옮기자, 질린 표정의 진효린과 주합이 휘적휘적 독고유에게로 다가왔다.
“그런데 대인이 어째서 단풍나무일까요?”
“단풍은 계절에 따라 색이 변하니까…….”
독고유는 경진천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진효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내공처럼…….’
마지막 말을 삼킨 독고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대인이 되려면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본이 벌써 깨져 버렸다.
주합에게도 졌던 사내에게.
‘그렇다면 주합이 저 사내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독고유의 시선을 받은 주합은 오한이 드는 듯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떨었다.
“갑시다. 무당제일검이니 언젠가 또 마주칠 일이 있겠지.”
경진천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독고유는 몸을 돌렸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수. 나랑은 완전 상극이오.”
주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독고유는 그의 설레발에도 웃지 않았다.
‘나의 길을 걷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내 어깨에 짊어진 대의와 내 길을 이끄는 천명을, 그리고 나의 강함을…….’
무이산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