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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15화)
제9장 광인의 사랑(2)
“은첩문의 일급살수들이 모두 죽어 의뢰에 실패했다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으음, 진가 계집의 곁에 꽤 강한 놈들이 붙어 있나 보군?”
“둘인데, 하나는 하오문의 문주 주합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신분이 묘연합니다.”
“하오문주가 진가 계집과? 어떻게 함께하는 거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신분 미상의 사내가 열쇠일 듯합니다.”
“그자의 무공은 강한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무공을 쓰는지,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도 전혀 모릅니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분명 그렇겠군. 인상착의는 아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하오문주에게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오문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만만히 볼 것이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문파입니다. 세력이 중원 전체에 퍼져 있으니 껄끄럽지요.”
“과연 내 아들이다. 유연하게 계책을 수정할 줄도 아니……. 진가 계집의 곁에 호위가 있다면 그 팔다리부터 하나씩 제거해 가면 되는 게다.”
“네, 바로 손을 쓰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해라. 결코 꼬리가 밟혀서는 안 되고, 하오문주를 직접 공격해서도 안 된다. 그들에게도 이 일은 숨기도록 해라. 그들이 알게 된다면 혹 신용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호위무사에 대한 조사도 확실히 하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 계집의 처리는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마. 그래도 절대 조심하도록 해라. 강호에 우리는 공명정대한 대협들로 비춰져야 하니까.”
“네, 아버님.”
두 사내의 대화가 이어지던 어두컴컴한 방 안은 젊은 사내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변해 갔다.
무이산 중턱.
계곡에 가려 쉽게 찾을 수 없는 가파른 절벽 끝에 작은 정자가 초연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 아래에 올라선 독고유의 눈빛에는 긴장의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정자에서 일렁이는 진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다.”
광폭하게 휘몰다 억지로 짓눌려 다시 고요해지는 흐름, 분명 주화입마에 빠진 진기의 흐름이었다.
독고유의 발걸음이 더욱 바빠졌다. 지금은 내공을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그의 내공이 광마의 내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는 진효린과 주합의 안색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무이산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독고유의 뒤를 따르자 가공할 내공의 폭풍이 전신을 압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독고유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진대 이 두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너는 광마가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런 피의 인생을 살 필요가 없어. 견뎌라, 조금만 더…….”
절벽을 기어오르는 독고유의 입에서 독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기억하는 보통 때의 영무흔은 침착하고 유약하며 항상 슬픔에 빠져 있는 사내였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스스로의 삶을 한탄하는.
하지만 병장기와 마주하여 미쳤을 때는 그야말로 살귀가 되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피를 보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독고유는 그 유약하고 침착한 때의 영무흔이 그의 본모습이라고 믿고 있었다.
턱!
마침내 독고유의 손이 절벽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새하얀 도복에 흙이 묻어 잿빛으로 변했지만 상관치 않았다.
마두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지닌 자, 그토록 타락하게 놔둘 수 없었다.
“그게 내 천명이다. 지옥을 보고 온 것은 나뿐이니…….”
독고유의 얼굴에서는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쓰러져 가는 허름한 정자를 바라보았다.
진기의 흐름에 휩쓸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미공자는 분명…….
“무흔…….”
독고유가 작게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죽은 듯이 앉아 있던 영무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스르륵.
그의 눈이 천천히 뜨이자, 샛노란 안광이 번뜩였다.
광안이라 불리게 될 요사한 안광!
하지만 독고유는 오히려 안심했다. 내공을 끌어올렸음에도 그의 안광이 노란빛일 때는 아직 이성이 있는 상태다.
“나에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그대로 가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거요. 무리하게 내공을 운기하려 하지 마시오.”
독고유는 한 걸음을 내디디며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영무흔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다시 스며드는 진기의 흐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입이 다시 느릿느릿 열렸다.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체입니다. 이 육신, 어찌 되건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시체요? 숨을 쉬고 있지 않소. 심장이 뛰고 있지 않소.”
독고유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눈이 애처로운 빛으로 흔들렸다.
“영혼이 없는 육신이 어찌 살아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것은 그저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영무흔의 노란 안광이 다시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진기들이 슬픔의 빛을 띠고 애처롭게 일렁였다.
독고유는 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그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질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해서 은유란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오.”
“……!”
감겼던 영무흔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샛노란 안광이 독고유에게로 쏟아졌다.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스스로의 약함이 원망스러웠소? 그래서 마공을 익힌 거요? 그렇다면 어째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이지?”
영무흔의 노란 안광이 파르르 흔들렸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을……. 숨이 잦아드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심정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했었어야지! 유란의 원한을 풀었어야지!”
“그런다고 유란이가 돌아옵니까? 복수한다 해서 남는 것은 없소! 이렇게 숨을 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원수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단 말이오!”
영무흔의 절규와 같은 외침에 독고유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주먹 끝으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유란이 아니야! 네 슬픔과 허무가 만들어 낸 환상이요, 마공 속에 숨쉬는 심마의 유혹이다! 유란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가! 그녀가 어째서 너를 살렸는지를 잊었나!”
“닥치시오!”
콰르륵!
영무흔의 전신에서 마귀와 같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붉게 변한 안광이 금방이라도 눈을 불태울 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는 네 행복을 바랐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네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 모습은 무엇이냐! 그녀가 죽으니 네 영혼도, 삶의 이유도 없어진 것 같았더냐! 네가 진정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의 원을 이루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과 직면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오? 나는 이미 그녀를 잃었소! 그녀와 함께할 모든 미래를 잃었소! 내 뜻을 향해 나아간 끝에는 차가운 검과 그녀의 죽음밖에는 없었소!”
“그렇다면 같이 죽었어야 했다! 어째서 산 것이냐! 너는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자결하지 못했다! 그녀가 네 모든 것이었다면 어째서 껍데기만 남았다는 변명을 하며 살아 있는 것이냐!”
칼날과도 같은 외침이 영무흔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의 이글대는 붉은 안광이 더욱 짙어져 이제는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독고유도 필사적이었다.
갈림길이다. 이대로 심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진다면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것은……!”
“그녀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었느냐? 그것을 기억해 낼 수 있겠느냐!”
피를 토하는 독고유의 외침에 영무흔의 일렁이던 안광이 순간 빛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주길 원했소. 중원 최고의 화객(畵客)으로서…….”
그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잊고 있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슬픔에 빠져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살아 있는지 그 이유조차도.
푸스스슥!
영무흔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증발하듯 사라지자, 정자의 천장에서 나무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대들보가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심마의 소멸과 함께 정자의 수명도 다한 듯싶었다.
“대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효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고유가 없다!
분명 정자의 안으로 달려들어 갔을 터였다.
콰쾅!
주합이 정자로 달려가려는 찰나, 무너지는 정자의 기왓장을 뚫고 독고유의 신형이 튀어 올랐다.
혼절한 영무흔을 끌어안은 그의 신형이 진효린의 앞에 착지했다.
“이 사내도 사랑하는 이를 잃었소. 그 슬픔과 마주할 용기조차도 없는 유약한 사내지. 당신도 그렇소?”
영무흔을 애처롭게 내려본 독고유의 시선이 진효린에게로 향했다.
진효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뇨, 마주하겠어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가족의 복수를 위해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겠어요.”
독고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럼 되었소.”
“으음…….”
영무흔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몸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마가 떠난 순간, 몸속의 내공들도 그것을 따라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터질 듯 회오리치던 과거의 추억들도 잠잠해졌다.
어쩐지 모든 것이 꿈을 꾸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분, 그분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벌떡 일어서 고개를 들었다.
심마에서 자신을 구한 그 사내. 얼굴조차 희미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분명 은인이었다.
“아, 아아…….”
주위를 둘러보던 영무흔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입에서 꿈결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화구(畵具). 온갖 빛깔의 먹물과 새하얀 화선지, 그리고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붓.
“아아…….”
그의 떨리는 손이 붓의 대에 마주 닿았다.
화선지 위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유란, 보이겠소. 내 뜻이, 당신의 뜻이 헛되지 않았음을…….”
스스슷!
손에 쥐어진 붓이 화선지 위를 신들린 듯 노닐었다.
오랜 기간 붓을 쥐지 않았음에도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유란…….”
마침내 붓을 내려놓은 그가 참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화폭 위에 그려진 은유란의 얼굴이 그런 그를 위로하듯 빙긋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