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명부마도 1권(18화)
제11장 녹림의 긍지(1)


“녹림도의 술 창고를 턴 것이 네놈들이냐?”
거대한 언월도(偃月刀)를 등에 짊어진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철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백 근이나 나가는 언월도를 휘두르는 녹림도는 딱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녹림의 야차(夜叉) 건하(建下).
녹림채주의 충실한 오른팔이자, 명문의 문도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사내다.
“…….”
독고유는 대답 없이 건하를 올려다보았다. 먹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금 전 자신들의 대화도 모두 들었을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만취한 주합의 모습도 거짓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강호의 법규를 안다면 녹림의 술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진대 네놈들의 목은 하나가 아니라 둘인 모양이구나!”
쿵!
어깨에 짊어진 언월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져 내렸다.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눈빛이 독고유와 일행에게로 쏟아졌다.
“녹림의 술임을 알았다면 먹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술에 주린 나머지 먹었으니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오.”
독고유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건하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모르고 죽였다고 발뺌할 놈들이구나! 알았건 몰랐건 녹림의 술을 건드린 것은 대죄! 게다가 오늘은 채주께서 산채를 방문한 날이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쿠릉!
건하가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자, 늘어뜨린 언월도 주위의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철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만산의 무법자라 할지라도 녹림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 활동 지역이 산이니, 녹림도와는 적대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나, 나는 한 모금도 먹지 않았는데 어째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빠져나갈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어, 어쩌시려고요?”
산에 늘어선 산적들이 하나 둘 무기를 꺼내 들자, 독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효린이 불안한 듯 속삭였다.
“소저는 술두꺼비나 잘 보고 계시오. 저 녀석은 지금 싸울 상태가 아니니.”
“싸우실 건가요?”
독고유가 목도를 뽑아 들었다. 진효린은 독고유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싸워 이겨 자리를 모면한다 해도 그때부턴 전 녹림도의 표적이 될 터였다.
“쉽게 목을 내놓지는 않으려는 모양이로구나!”
쩌저적!
목도를 뽑아 든 독고유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자, 건하의 눈에 살기가 가득 어렸다.
언월도를 치켜들었을 뿐인데 옆에 선 나무 한 그루가 반 토막이 나 쓰러졌다.
본인도 주체하지 못할 패도적인 기운.
독고유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싸워 볼 만한 사내로군. 녹림의 야차라? 채주는 과연 어떨까.”
독고유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목도의 끝에서 봄바람 같은 유순한 도기가 실오라기처럼 피어났다.
“다른 놈들은 싸울 의지가 없는 모양이군. 나는 저놈과 싸운다! 나머지는 알아서 포박하라!”
건하는 투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산적들이 삽시에 뛰어내려 진효린과 철호에게로 다가섰다.
“멈추시오.”
“……?”
산적들이 진효린과 철호를 막 공격하려는 순간, 독고유가 입을 열었다. 건하가 손을 들어 산적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채주가 산채에 와 있다면 채주에게 안내해 주시오. 채주와 이야기를 해야겠소.”
“뭐야? 이 건방진 놈이!”
독고유가 건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하자, 건하의 눈빛에 삽시에 살기가 감돌았다.
“채주께서 그리 한가하신 줄 아느냐! 네놈같이 얼빠진 놈을 만날 시간 따윈 없으실 거다.”
“그럼 내가 당신을 이기면 채주와 마주할 명분이 서는 것이오?”
“뭐야?”
독고유가 씩 미소 지으며 말하자, 건하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하나 더 치솟아 올랐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떤 건하는 언월도를 들어 독고유를 가리키며 버럭 외쳤다.
“좋다! 네놈이 날 이기면 채주께 네놈을 데려가마! 하지만 진다면 네놈의 사지육신을 직접 토막 낼 것이야!”
“좋소.”
독고유가 씩 웃으며 목도를 비스듬히 들자, 건하가 훌쩍 신형을 날려 독고유의 십 장 앞에 착지했다.
쿠웅!
어찌나 체구가 큰지 착지했을 뿐인데도 지진이 일어난 듯한 울림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과연 녹림의 야차! 한번 그 기세를 나에게 보여 보시오!”
독고유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건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코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네놈의 혀부터 잘라 주마!”
쒜에엑!
건하의 신형이 땅을 으깨며 박차 오르자, 삽시에 언월도가 독고유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막아도 목도째 반 토막을 낼 듯 무서운 기세였지만, 마주 선 독고유는 느릿느릿 목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휘이익! 콰직!
언월도가 독고유의 목도에 닿으려는 순간, 독고유의 목도가 미끄러지듯 그의 신형을 따라 회전했다.
언월도가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단한 땅이었음에도 소가 밭을 간 모양으로 땅거죽이 뒤집혔다.
“이놈!”
건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언월도가 떨어진 곳에서 한 치 옆에 선 독고유가 씩 웃으며 목도를 치켜들었다.
후웅!
휘두른다고도 할 수 없는 느릿느릿한 움직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에 건하의 신형이 핑그르르 돌며 치솟아 올랐다.
“오냐! 몽땅 토막 내 주마!”
부드러움의 극의에 달한 기운. 하지만 건하는 그것마저도 부숴 버리려는 듯 더욱더 공력을 끌어올렸다.
“대, 대단해.”
삼십여 장 밖에서도 그 가공할 기세가 찌릿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진효린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만, 정작 그것에 맞서는 독고유의 움직임은 여전히 느릿느릿하기만 했다.
마치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산들바람이 불듯 독고유의 걸음이 사뿐사뿐 회전했다.
콰르르륵!
그 위로 건하의 언월도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떨어져 내렸다. 주위의 공기들이 언월도의 기운에 가열되어 파르르 떨렸다.
쩌엉!
“……!”
언월도가 독고유의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건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새 느릿느릿 치켜든 목도가 언월도의 검면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후…….”
독고유의 입에서 낮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언월도가 목도에 달라붙은 듯 목도의 움직임을 따라 핑그르르 돌았다.
“으읏!”
언월도를 따라 핑그르르 회전한 건하는 간신히 착지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휘두른 기운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와 손바닥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토막 내기 어림도 없소.”
건하가 언월도를 치켜들자, 독고유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건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목에 혈관이 터질 듯 치솟아 올랐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양손으로 부여잡은 언월도에 폭풍과 같은 기세가 어렸다. 그의 전신으로 흰 연기와 같은 기운이 뭉실뭉실 흘러나왔다.
콰콰쾅!
삽시에 언월도가 세 방향으로 휘둘러졌다. 독고유 좌우의 땅이 할퀸 자국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흙먼지에 독고유의 눈이 깜빡일 찰나 건하의 신형이 독고유의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건하의 언월도가 만근거력을 담고 삽시에 휘둘러지자 독고유의 머리와 허리가 삽시에 반 토막이 났다.
“……!”
승리의 미소를 짓던 건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반으로 토막 난 독고유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내 눈을 가리려 자신의 시야도 가려 버리면 안 되지.”
어느새 건하의 등 뒤에서 독고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꾹!
“윽!”
이어 목 뒤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어느새 독고유의 목도가 건하의 뒷목에 닿아 있었다.
독고유가 기운을 담아 후려쳤다면 단번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제기랄…….”
건하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언월도를 내팽개치듯 땅에 박아 넣은 건하는 이를 으득 갈며 고개를 돌렸다.
“뭣들 하느냐! 이놈들을 끌고 산채로 돌아간다!”
“후훗.”
산적들이 모두 병장기를 거두자, 독고유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대인, 이제 어쩌실 건가요?”
녹림도들이 주위를 에워싸자, 진효린이 다가와 속삭였다.
독고유는 목도를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소? 이보게, 철호랑이!”
“왜, 왜 그러시오?”
어느새 철호를 대하는 독고유의 호칭이 자연스러운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철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독고유가 자신보다 강하니 당연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술두꺼비 좀 업어라.”
“내가 왜? 젠장…….”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주합을 내려 본 철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철호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합을 들쳐 업자, 독고유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 빨리 안 오고 뭐 하는 게냐!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재촉하지 않아도 지금 가오.”
앞서 간 건하가 버럭 외치자, 독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와아…….”
산채의 앞에 도착한 진효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각과 달리 녹림의 산채는 지저분하지 않았다.
굵은 나무로 세운 목책은 가지런하게 서 있었고, 사이사이로 보이는 산채 건물들도 통나무로 그럴듯하게 지어 놓았던 것이다.
사실은 채주의 방문 탓에 복건 산적들이 피똥을 싸는 고생을 했음은 알 리 없었다.
“녹림의 채주라……. 음, 기억이 나는군.”
산채의 입구로 들어서는 독고유의 눈빛에 기광이 스쳤다.
녹림의 채주 사자왕(獅子王) 초산(超山)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도의 마두들에게 목숨을 잃기 전까지 그가 벤 마도인의 수만 일천이 넘었고, 마두들도 그를 죽이기 위해 이십여 명에 가까운 희생을 내야 했었다.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등으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싸우게 된다면 지금의 자신이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만큼 호기가 치솟기도 했다.
“술을 가져오라 했더니 사람을 가져왔군.”
독고유가 산채 안으로 들어서자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게 말하고 있음에도 모두의 귀에 박히는 은은한 위엄.
“채주, 술 창고의 술을 모조리 도둑맞았습니다.”
“호오! 녹림의 술 창고를 털다니 배짱 두둑한 놈들이군.”
건하도 채주 초산의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앉아 있음에도 육 척은 되어 보이는 태산과 같은 체구, 그리고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사방으로 뻗친 머리가 위압감을 넘어선 공포감을 심어 주고 있었다.
사자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눈동자가 건하를 지나 독고유에게로 향했다.
초산의 입 끝이 스윽 치켜 올라갔다.
“당장 목을 베지 않고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은 뭔가 뜻이 있어서겠지?”
“저 술 도둑놈이 채주를 뵙고 싶다기에……. 제기랄.”
건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독고유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독고유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초산을 바라보았다.
초산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져 나갔다.
“크하하하! 술 도둑이 제 발로 술 주인을 찾아오다니 기가 막힌 일이군! 그래, 술 도둑놈,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나는 대인 독고유요.”
초산이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묻자, 독고유도 지지 않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초산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뭐라? 대인? 크하하하! 스스로를 대인으로 칭하는 광오한 인물이 있었다니! 마음에 드는군!”
쿠궁!
말을 마친 초산의 기세가 순간 급변했다. 당장이라도 전신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기세.
독고유는 등 가득 식은땀이 번져 가는 것을 느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녹림채주 사자왕의 마음에 들었다니 나도 기분이 좋소.”
독고유가 말을 마치자, 초산의 기세가 삽시에 지워졌다. 태산처럼 거대해 보이던 모습도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왔다.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배짱이 있군. 산적들보다 배짱이 크니 이거 녹림의 채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말에 건하의 어깨가 움찔했다.
독고유의 뒤에 선 진효린과 철호의 안색은 이미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후였다.
“하지만 배짱만으로는 녹림의 술을 훔친 죄를 모면할 수 없다. 어찌할 테냐? 건하에게 한 것처럼 나와도 무(武)로써 담판을 지을 테냐? 아니면 술값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텐가?”
“어차피 둘 다 싸워야 하는 것 아니오?”
독고유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초산의 입 끝도 치켜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산적보다 더 산적 같은 사고방식이로군. 좋다!”
턱!
초산이 손바닥을 들어 무릎을 내리쳤다. 아무런 기운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독고유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건하! 패왕도(覇王刀)를 가져와라!”
“……!”
건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패왕도를 쓴단 말인가!
녹림의 신물이자 사자왕이 전력을 다할 때 사용하는 패왕도!
그것을 고작 저런 무명의 백의 사내와 싸우는 데에 쓴단 말인가!
건하가 상좌 뒤에 세워져 있는 칠 척의 거도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무게만 해도 이백 근은 너끈히 나가는 가공할 거도였다.
“패왕도라니, 진정 싸울 참인가…….”
독고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철호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패왕도를 들었다 함은 곧 독고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눈앞의 저 사내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보고 있는 자신이 다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