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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19화)
제11장 녹림의 긍지(2)
“대인…….”
“괜찮소. 녹림의 금기를 건드렸으니,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소.”
진효린이 독고유의 소매를 꼭 쥐었다.
독고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무거운 빛이 서려 있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허리춤의 목도를 뽑아 드는 손아귀가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어 왔다. 필사의 각오로 싸워야 했다.
“한번 시험해 봐야겠군.”
목도를 움켜쥔 독고유는 녹림의 상좌에 굳건히 선 초산을 올려다보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사자왕인 이상 자신도 필생의 절초로 맞서야 했다.
“물러섬이 없군.”
초산은 독고유의 눈빛을 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폭발 직전의 야성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눈빛이었다.
척!
칠 척의 패왕도도 초산에게는 고작 가슴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백 근의 도를 한 손으로 쥐어 올리는 초산의 기세는 그야말로 패왕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산채가 부서져도 좋소?”
“네가 아니면 내가 부술 터이니 상관없다.”
독고유가 목도를 치켜들며 묻자, 초산도 씩 웃으며 화답했다.
건하는 황급히 산적들에게 손짓을 했다. 초산이 패왕도를 들고 싸우기 시작하면 삼십 장 밖에 있어도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흐으읍!”
쿠구구궁!
패왕도를 치켜든 초산이 숨을 들이쉬며 공력을 끌어올리자 주위의 공기가 진동했다.
산채 전체가 무너질 듯 떨려 왔다.
“이, 이것이 사자왕의 기세…….”
철호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산채의 목책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음에도 여지없이 그 진동이 전해져 왔다.
“후우, 후우―.”
독고유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초산의 기세가 그대로 전신으로 전해져 왔다.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의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뢰(雷)…….”
끓어오르던 기운이 가라앉자,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쿠구구궁!
그 순간 독고유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기세가 급변했다. 산채의 건물들이 두 사람의 기세만으로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제법이군.”
초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과 뒤지지 않는 상대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일 각 정도인가.”
내공을 끌어올린 독고유의 입에서 굳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신으로 가공할 힘이 끓어올랐지만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간다!”
쿠우웅!
초산의 신형이 상좌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패왕도에서 십 장에 가까운 붉은 도기가 솟구쳐 올랐다.
“후우!”
독고유도 피하지 않고 맞섰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초산의 신형에게로 목도를 치켜세우며 달려들었다. 목도에서 날카로운 톱날과 같은 강기가 솟구쳐 올랐다.
콰앙!
둘의 도가 맞부딪쳤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날아온 방향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콰쾅!
땅으로 떨어져 내린 독고유의 몸이 산채 건물의 벽으로 부딪쳤다. 산채 건물이 삽시에 반으로 토막 나며 무너져 내렸다.
치솟는 먼지구름 사이로 독고유의 신형이 번개처럼 솟구쳐 올랐다.
“흐아압!”
독고유가 핑그르르 신형을 돌리며 목도를 휘두르자, 무형의 강기가 초산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으하하! 이 사자왕에게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것인가!”
건물의 지붕에 서 있던 초산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서며 전신으로 투기가 치솟아 올랐다.
쿠르릉!
그의 기운을 견뎌 내지 못한 건물이 아래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초산의 패왕도가 수십 개의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의 몸을 덮치려던 무형의 강기가 삽시에 소멸되었다. 이번에는 붉은 검기가 독고유의 전신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콰앙!
독고유가 목도를 핑그르르 돌리며 앞으로 내밀자, 검막이 검기를 막아 냈다.
“차, 차원이 달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효린의 입에서 넋 나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류 이류 같은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 무위가 아니었다. 두 사내의 무위는 이미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쩡!
두 사내의 신형이 또다시 정면으로 충돌했다.
허공에서 맞부딪친 둘의 인영이 멈춰 서는 듯하더니 사방으로 가공할 광풍이 휘몰아쳤다.
“잘못하면 나까지 죽겠군!”
늑대들에게 손짓을 한 철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싸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위를 견식하고 싶은 무인으로서의 본능 때문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놈들은 뒤로 빠져라!”
건하도 산적들에게 손짓을 했다.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던 산적 몇몇이 늑대들의 뒤를 따라 산채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갔다.
“학, 하악…….”
독고유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혈이 역류하려 하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나와 이십초를 맞부딪치고도 살아 있다니, 과연 스스로를 대인이라 칭할 만하군.”
그의 십 장 앞에 선 초산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지금의 무위는 당신의 몇 할 정도이지?”
숨을 고른 독고유가 목도를 지팡이 삼아 일어서며 묻자, 초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패왕도를 들었음에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칠 할 정도다.”
“그렇군.”
독고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자신은 오 할, 상대는 칠 할. 자신이 무공을 대성한다면 저 사내보다 더욱 강하다는 말이었다.
“네가 훔쳐 먹은 술값보다 더욱 값어치 있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쿵!
패왕도가 땅에 깊숙이 박혔다. 기세를 거둔 초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네가 익힌 무공은 무엇이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완벽히 대성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독고유는 흠칫 놀라 초산을 바라보았다.
저 사내도 자신의 무공이 완벽하지 않음을 눈치 채고 있었단 말인가!
“내 무공은…….”
“아니! 그 이름은 네가 무공을 대성한 후에 듣도록 하겠다. 그 후에 나와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르자!”
초산이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실로 오랜만에 피가 끓는 상대를 만난 듯 신이 난 표정이었다.
독고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다면 그때는 무너진 산채의 값을 보상하는 싸움이 되겠군.”
독고유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심호흡을 하던 독고유의 눈이 고통스럽게 부릅떠졌다.
“쿨럭!”
입에서 한 모금의 피가 울컥 토해져 나왔다.
“대인!”
독고유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자, 진효린이 황급히 달려왔다.
“조금은 더 강해졌나.”
숨을 몰아쉬는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싸움으로 얻은 성취는 지금까지의 어떤 싸움에서 얻은 것보다 큰 것이었다.
“무엇들 하느냐! 이제 이분들은 녹림의 손님이다!”
고개를 돌린 초산이 산적들을 보며 외쳤다. 움찔 놀란 건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에게 예를 갖춰라!”
산적들이 무너진 산채 건물의 잔해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이곳저곳에서 고기와 술병들이 건져 올려졌다.
“몸을 추스르고 길을 떠나게, 아우.”
독고유에게로 다가온 초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독고유도 기분 좋게 웃었다.
“기꺼이.”
“사자왕과 싸우고도 살아남다니, 도대체 저런…….”
상황이 모두 정리되었음을 깨달은 철호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살아남는 것으로도 모자라 녹림의 손님이자 사자왕의 아우가 되었다.
“으, 으으…….”
그때 등에 업힌 주합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격전 중에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어, 어어?! 내가 왜 산적 소굴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주합이었다.
산채에 쌓여 있는 고기와 술이 모조리 대령되었다.
주독에서 헤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주합은 또다시 항아리째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철호랑이, 그런데 네놈은 어찌 주합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냐?”
기혈을 겨우 다스린 독고유는 밤이 되자 완전히 멀쩡해졌다.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먹던 철호는 독고유가 묻자,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절강에서 들었소. 객잔에서 한잔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구만.”
“나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단 말이냐? 크하하! 이 주합님의 이름이 좀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
술을 마시던 주합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철호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네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뭐, 진가 계집 어쩌고 하더니 그 곁에 하오문주가 있다고 하더구만.”
진효린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가문의 원수와 관계가 있는 이들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가문의 원수들일지도…….
“누구인지 보았나?”
독고유가 넌지시 묻자, 철호는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꽤나 고귀한 집안 자식들 같았소.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뭔가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는데, 나는 지금쯤 복건에 술두꺼비가 있으리라 하는 말을 듣자마자 튀어 나가서 더 듣지는 못했소.”
“흐음…….”
독고유는 침음성을 흘렸다.
더 추궁해 봐야 이 이상의 정보는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첫째로는 진가의 원수가 상당히 큰 조직이며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
둘째로는 일차적인 목표를 진효린에서 주합으로 바꾸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행보가 낱낱이 알려지고 있다는 것.
“그럼 더더욱 빨리 광동으로 가야겠군.”
독고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자신들에게 조금씩 가까워 올수록 그들은 갈수록 노골적인 공격을 해 올 터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있는가?”
독고유의 어깨로 굵직한 팔이 턱 걸쳐졌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초산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아, 아무것도…….”
“난 지금 진가의 원수를 찾고 있소.”
진효린이 더듬거리며 말을 흐리려는 찰나, 독고유가 숨김없이 입을 열었다.
초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광동 진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그런데 그 원수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진가의 차녀 진효린입니다.”
진효린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산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호오!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었다더니 생존자가 있었군그래. 가족의 원수니 필히 찾아내야겠지.”
초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가 산적이 된 것도 진효린과 같은 이유였다.
“내가 좋은 충고 하나 하지.”
굳은 표정의 진효린을 바라보며 초산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결코 숨기지 말게. 자신이 진가임을 당당히 밝히게. 그런다면 원수들은 지레 움츠러들고 허점을 보이게 마련이지. 자네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다가온단 말일세.”
잠시 말을 멈춘 초산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혈향이 짙게 풍겨 나오는 미소였다.
“그렇다면 그때 원수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하네. 최대한 잔인하게, 내가 받았던 고통의 배를 돌려주겠다는 생각으로.”
진효린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무공만큼이나 마음이 강해야 하지. 내가 볼 때 자네는 충분히 강한 것 같군. 여인이 쉽게 가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야.”
“그러니 이 대인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겠소.”
독고유가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초산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그렇지, 그렇지! 아우님과 같은 대인이 함께하니 필시 복수에 성공할 걸세. 그럼 한잔하세! 너무 복수만 생각하면 심신이 허해진다네.”
초산이 잔을 들어 올리자, 독고유도 기다렸다는 듯 술을 들이켰다.
녹림의 사자왕과 함께하는 밤이 그렇게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