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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20화)
제11장 녹림의 긍지(3)


“다들 나만 남기고 어디로 가 버렸담?”
홍루의 창기 앵월(櫻月)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젯밤 손님과 함께한 술이 좀 과한 모양이었다.
다른 여인들은 이미 모두 일을 나간 듯 숙소에는 그녀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어. 뒤가 구린 이야기니 언니들이 좋아하겠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술에 취한 사내가 해 준 이야기들은 하오문의 정보로써 충분히 쓸 만했다.
하오문의 절강 지부인 홍루였고, 그녀도 하오문의 문도였던 것이다.
“너무 조용하네. 지금쯤 손님들이 들어야 할 시간인데?”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얼굴에 의구심이 어렸다. 혹여 그녀만 빼고 단체로 마실이라도 나간 것일까.
“으음?”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비릿한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냄새가 좋지 않은 건물이긴 하지만, 이렇게 역한 정도는 아니었다.
“언니?”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어두컴컴한 내부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찰팍!
통로로 들어서자 바닥에 흥건한 물이 느껴졌다. 도대체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불도 켜지 않고 참……. 다들 어딜 간 거지?”
앵월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통로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보통은 닫혀 있어야 할 방들도 모두 열려 있어 길을 찾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탁! 탁!
등을 찾은 그녀는 부싯돌로 힘겹게 등에 불을 붙였다.
역한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화악!
“……?”
불이 붙자, 삽시에 주위가 밝아졌다. 하지만 앵월의 얼굴에는 더욱 큰 의문이 서렸다.
평소보다 벽이며 천장이 더욱 붉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붉은빛의 등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진한 붉은빛으로 감돌고 있었다.
“어어?”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발과 치마가 온통 붉었다.
역한 냄새의 주인공은 그 붉은 물인 것 같았다.
“설마……. 꺄아아아악!”
발걸음을 돌린 그녀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체. 열린 방 안에는 온통 시체로 가득했다.
손님뿐만 아니라 창기들과 문지기들, 호위들까지 모조리 다 처참하게 토막 나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다리에 힘이 풀린 앵월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이 다리에 온통 묻었지만, 이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이성이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잠을 잔 시간은 고작 세 시진. 세 시진 사이에 누군가가 홍루의 모든 이들을 죽였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푸욱!
“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 대신 앵월의 경악한 눈동자가 가슴팍으로 향해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 사이를 뚫고 검 끝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검날을 타고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그녀의 피였다.
“이게 무슨……?”
털썩!
느릿하게 중얼거리던 앵월의 눈이 흐려졌다. 그녀의 몸이 옆으로 툭 쓰러지자, 그녀의 뒤에서 검을 찔러 넣은 사내가 그녀의 등에서 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생존자가 있었군. 쯧, 이렇게 허술해서야…….”
비단으로 만든 푸른 도복이 피에 젖어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혀를 차며 중얼거린 사내의 발걸음이 휘적휘적 홍루의 밖으로 향했다.


제12장 피보다 진한 형제애(1)


“하아, 하아…….”
나무에 기댄 소년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년의 손에 쥐어진 검날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피가 흥건한 소년의 팔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늘은 다섯이야. 닷새마다 한 명씩 늘어나고 있어.”
시체들을 한편으로 치워 내던 작은 소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걸어왔다. 소년의 손에 쥐어진 단도에도 피가 흥건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잖아. 그 녀석들을 다시 저놈들의 손에 넘길 수는 없어.”
“형? 형, 피가 나잖아!”
큰 소년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작은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큰 소년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검상.
아까 네 명째의 사내들을 해치울 때 입은 상처였다.
스쳤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깊었다.
핏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형, 이건 치료해야 돼! 이대로는…….”
“걱……정하지 마.”
작은 소년이 버럭 외치자, 큰 소년은 빙긋 웃으며 옷소매를 부욱 찢었다.
피가 흐르는 복부를 꽉 조여 맨 큰 소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닷새면 충분히 아물 상처야. 걱정하지 마.”
“응.”
큰 소년이 풀숲 뒤로 들어가 나무 둥치에 기대앉자, 작은 소년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마치 표범처럼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형, 그런데 아가씨가 살아 있었어도 그놈들이 우리를 괴롭혔을까?”
“아니, 아가씨가 계셨다면…… 그놈들은 접근도 못했겠지.”
“그렇지?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럼…….”
“하아, 아가씨가 보고 싶어. 난 아직도 아가씨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나도 그래.”
큰 소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형, 자?”
“응.”
작은 소년은 고개를 돌려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풀숲에 가려 형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알았어. 푹 자. 무슨 일 있으면 내가 깨워 줄 테니까.”
작은 소년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작은 소년이 누운 나뭇가지 아래로 풀숲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쳇, 쳇.”
“그렇게 부럽냐?”
주합의 입에서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오자, 독고유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산채를 빠져나온 다음부터 주합은 내내 저런 상태였다.
“부럽긴, 무슨! 그냥 득의양양해 할 철호랑이 녀석 얼굴이 떠올라서 그렇수.”
주합이 펄쩍 뛰며 말하자, 독고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이십 늑대를 이끄는 철호는 녹림의 사자왕 초산의 눈에 산적의 귀감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에게 녹림삼십육채의 감찰관을 부탁했고, 철호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단박에 만산의 무법자에서 녹림채의 감찰관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는 너는 하오문주잖아? 지휘로 보면 분명 네가 더 높을 텐데?”
진효린의 말에 주합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그놈보다 훨씬 강하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단지, 단지…….”
“네놈 설마 녹림의 술 때문에 그런 거냐?”
독고유가 설마 하는 눈초리로 묻자 주합의 시선이 슬그머니 돌아갔다.
“맞군. 휴…….”
참 사고방식이 단순한 녀석이다.
향기로운 술을 잔뜩 먹을 수 있게 된 것을 부러워한 것이라니.
독고유는 이마를 문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산세가 완만해지는 것이 광동의 끄트머리로 들어선 것 같았다.
“광동이에요.”
독고유가 말하기도 전에 진효린이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이제 진가장이 있는 남곤산까지 사흘이면 도착할 터였다.
움찔!
걸음을 옮기던 독고유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독고유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피 냄새…….”
독고유가 목도를 뽑아 들자, 진효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합도 그제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독고유의 걸음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풀숲을 헤치고 가건만 풀 밟는 소리도,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혈향도 더욱 짙어졌다.
‘상처 입은 무인인가? 그게 아니라면…….’
파스슷!
독고유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 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땅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가 그의 발에 밟혀 부스러졌다.
보통이라면 놓쳤을 작은 소리지만, 그 순간 헐떡이던 숨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푸화악!
새하얀 빛이 번뜩인 순간, 독고유가 서 있던 앞의 풀숲이 일검에 베어 치솟아 올랐다.
“큭?”
신형을 뒤로 날린 독고유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어느새 정수리 위로 찌릿한 살기가 베어 들고 있었다.
푸욱!
독고유의 정수리로 검이 내리찍혔다. 독고유의 정수리 깊이 검을 박아 넣은 것은 십사오 세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
검을 내리찍던 소년의 눈이 커졌다. 독고유의 신형이 어느새 흐릿해졌던 것이다.
화악!
“으악!”
뒤이어 소년의 목덜미가 휘익 낚아채였다. 그대로 땅으로 내팽개쳐진 소년이 데굴데굴 굴렀다.
척!
“하아, 하아…….”
독고유가 넘어진 소년에게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검을 움켜쥔 또 다른 인영이 소년의 앞에 섰다.
역시나 십사오 세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 소년의 허리에는 검상으로 보이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형제?’
독고유는 그제야 두 소년의 얼굴이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째서 저렇게 피를 흘리며 쉬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무 위에서 기습한 소년의 움직임은 한두 번 해 본 그것이 아니었다.
“상처가 심하군. 검을 거둬라.”
독고유가 먼저 목도를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느새 단도를 쥔 소년도 일어서 검을 쥔 소년의 옆에 서 있었다.
두 소년의 눈빛이 불신을 가득 담고 독고유를 노려보았다.
“그 정도 상처라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곪아서 죽게 된다. 어서.”
검을 쥔 소년의 상처는 독고유가 보기에 매우 심한 상태였다. 피도 매우 많이 흘린 것 같았다. 자칫하다간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다.
“훅, 훅…….”
하지만 두 소년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검을 쥔 소년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미 눈도 조금 흐려져 있었다.
“이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가.”
키가 조금 작은 그 옆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살기를 넘어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너희들은 형제냐? 그렇다면 형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싶은 모양이로군.”
독고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뭔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
조금 작은 소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의 형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검을 내려놓아라. 나는 너희들을 치료해 줄 수 있다.”
독고유가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했다.
작은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믿지 마! 저놈도 분명…….”
작은 소년의 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자, 상처 입은 소년이 버럭 외쳤다.
작은 소년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삽시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처 입은 소년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가 이내 한쪽으로 풀썩 꺾였다.
“……!”
“오지 마!”
독고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쓰러지는 소년의 몸을 부축한 작은 소년이 독고유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네 형제는 이미 한계다.”
독고유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어떤 설득이 잘 먹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길…….”
소년의 입에서 작은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독고유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부스럭! 부스럭!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진효린과 주합이 풀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독고유가 나선 지 한 시진이 다 되어 가니 모든 일이 끝났으리라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대인, 어째서 그렇게……. 어?”
풀숲을 헤치고 나온 진효린의 고개가 독고유에서 독고유의 건너편에 선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다. 소년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표정으로 툭 단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향아…….”
“아가씨?”
진효린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마치 시체가 되돌아온 표정으로 진효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돌아가신 게 아니었……?”
소년이 작게 중얼거리는 찰나, 독고유가 번개같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하아, 하아…….”
검상을 입은 소년의 입에서 낮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체온도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다.
“은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정말 아가씨세요? 정말?”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년을 내려 본 진효린의 얼굴이 또다시 하얗게 질렸다. 진효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작은 소년이 믿을 수 없는 듯 물었다.
어느새 소년의 작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래. 나야.”
“아, 아가씨……. 으아앙!”
진효린이 빙긋 웃자, 소년이 진효린에게 안겨 들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감동의 재회도 좋지만 당장 나 좀 도우시오.”
소년의 전신을 주무르던 독고유가 냉정하게 말했다. 진효린은 울고 있는 소년의 등을 두들기고는 독고유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