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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22화)
제12장 피보다 진한 형제애(3)


주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진효린도 걱정이 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거야. 으응…….”
하지만 진효린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와 함께라면 분명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주합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미음을 먹고 있는 전은의 주위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아이들.
모두 고아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고아였군.”
문득 주합도 자신이 고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뒷골목에 살았고, 무뢰배들과 어울렸다.
저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으며 지냈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뒷골목 생활도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피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진한 형제애를 파락호와 무뢰배들에게 느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고아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녀석들…… 잘 지내고 있겠지?’
독고유의 부탁으로 발바닥에 땀이 나게 정보 수집을 하고 있을 파락호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주합은 왠지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뭐야? 두꺼비, 울어?”
“우, 울긴 누가 운다고 그럽니까? 눈에 먼지가…….”
진효린이 놀리듯 말하자, 주합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언니!”
전은과 이야기를 하던 여자아이들의 시선이 순간 진효린에게로 쏟아졌다. 터무니없이 반짝이는 눈빛이었기에 진효린은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 공자님과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가요?”
“뭐?”
주합의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진효린의 얼굴이 삽시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니야! 대인과는 그저…….”
“아가씨 얼굴이 빨개요!”
허둥지둥 변명하려는 진효린을 바라보며 전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일제히 웃으며 진효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푸하하! 좋겠수, 누님!”
주합까지도 그 틈바구니에 끼어 진효린을 놀리자, 진효린은 귓불까지 붉게 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가씨…….”
장난치는 아이들의 사이로 전은이 다가와 진효린의 옷깃을 붙잡았다.
진효린이 고개를 숙이자, 전은이 진효린의 허리를 꼭 감아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모두들…… 아가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후훗! 나도 알아.”
진효린도 빙긋 웃으며 전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진효린의 도복으로 전은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간 얼마나 많은 수난을 겪었던가.
하지만 진효린이 살아 있고 다시 자신들을 찾아 줬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모든 고초들이 눈 녹듯 사라진 후였다.
“큰일, 큰일 났어요!”
그때, 마을 밖으로 나갔던 여자아이 소화(小花)가 사색이 되어 달려들어 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소화는 글썽이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망을 보던 오라버니들이…….”
털썩!
소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앞으로 피떡이 된 두 사내아이가 떨어져 내렸다.
“꺅!”
고개를 돌린 소화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능글맞은 얼굴의 뚱뚱한 대머리 사내와 검을 든 십여 명의 무사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보초를 서던 두 아이들은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신음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나까지 나서게 하다니. 그 벌로 네 녀석들의 몸값은 확실히 받아야겠다.”
대머리 뚱보는 뚱뚱한 배를 씰룩이며 이죽거렸다.
주합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으윽!”
이를 악물며 일어서던 전은이 배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대머리 뚱보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큭큭. 걱정하지 말라고. 여자아이들은 내가 예뻐해 주고, 남자아이들은 부잣집 노예로 팔아 줄 테니.”
쩡!
마을로 한 걸음 들어서던 무사의 몸이 부서지듯 튕겨 나갔다. 어느새 그 자리에 다가선 주합이 불길이 이글대는 눈을 돌리고 있었다.
“뭐가 뭘 예뻐해 준다고?”
“……!”
대머리의 넓은 이마에 세 줄기 주름이 새겨졌다.
“이건 웬 놈이야?”
챠르릉!
뒤에 선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주합의 몸에서는 분노가 어우러진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님, 이 아이들 좀 잘 봐 주슈.”
주합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진효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절한 두 아이를 들쳐 업었다.
“후회할 거야, 네놈들!”
“뭐, 뭣?”
주합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대머리 사내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나, 나는 흑협회의 일원인 공추문이다! 네놈 따위가 날 건드릴 수 있을 듯싶으냐!”
흑협회(黑俠會). 하오문과 비슷한 성질의 문파이나 이들은 하오문보다 더욱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들을 하고 있었다. 납치, 추행, 미행, 협박, 공갈 같은 일들이 주 업무였다.
“더 잘되었군. 형님의 손에 걸렸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겠지만…….”
휘오오!
주합이 한 걸음을 내디디자, 그의 몸 주위로 회오리바람 같은 기류가 치솟아 올랐다.
“내 손에 걸린 이상, 네놈들의 목숨은 없다.”
“미친놈이로군! 저놈부터 죽여라!”
쐐액!
공추문이 손을 치켜들자, 삽시에 십여 명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주합의 손에 모여든 권기도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휘몰아쳤다.
푸푸푹! 푸화악!
주합과 무사들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무형의 지풍(指風)이 날아들어 두 무리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치솟아 오른 흙벽에 무사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멈춰라, 두꺼비.”
놀란 표정의 주합의 등 뒤로 나지막한, 그러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이럴 때 돌아오다니! 내가 이미 잔뜩 멋 부려 놓았단 말이오!”
주합이 억울한 듯 외쳤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독고유의 곁에 선 전향을 본 탓이다.
“삼 일 동안 뭘……한 거요?”
주합의 입에서 넋 나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향은 삼 일 사이에 인상부터가 변해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야수가 되어 있었다. 눈매에는 야성의 그것과 같은 살기가 은은히 감돌고 있었고, 옷은 누더기처럼 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상처들은 이 아이가 삼 일간 겪은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는 듯했다.
주합은 다시 독고유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독고유의 안색이 어쩐지 파리하게 느껴졌다.
“가 봐라.”
툭!
독고유가 전향의 어깨를 툭 치자, 전향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프슷!
웃고 있던 전향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지나 싶더니 어느새 십여 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손에 쥔 목검이 검붉게 빛났다. 붉은빛은 분명 피딱지가 앉았기 때문이리라.
“흥! 꼬맹이 녀석 하나 더 달려든다고 변할 건 없다! 죽여라!”
공추문이 비웃음을 흘리며 외쳤다. 무사들의 검이 코앞으로 달려든 전향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타탁!
검이 전향의 머리를 내리찍으려는 순간, 전향의 몸이 쑤욱 꺼져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무사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간 전향의 목검이 무사 하나의 사타구니를 찔러 들었다.
쩌적!
“크헉!”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무사 하나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대로 멈춰선 전향의 목검이 좌우를 힘차게 훑자, 발뒤꿈치가 함몰된 무인 둘이 또다시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퍼퍽! 퍽!
작은 체구를 이용해 무인들의 사이를 종횡무진 쏘다니는 전향의 움직임은 흡사 짐승을 연상시켰다.
초식이나 형식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무인들의 사이를 휘몰며 급소만을 노렸고, 일격에 한 명씩의 무인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개싸움이군.”
주합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저 녀석은 자질이 있어.”
독고유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무재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독고유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왔다.
보통의 아이라면 채 반나절도 못하고 포기할 수련이었다.
“크헉!”
마침내 마지막 무사까지도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후우…….”
전향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살의가 가득한 미소였다.
“히익!”
공추문이 뒤로 흠칫 물러섰다. 분명 전에 봤을 때는 질질 울기나 하는 꼬맹이였는데 지금 그의 앞에 선 아이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을 것만 같았다.
“네놈만은…….”
뿌드득.
공추문에게 다가서는 전향의 손에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검을 고쳐 쥐는 손아귀에서 난 소리였다.
“살려 둘 수 없어.”
“나는 흑협회의……. 크헉!”
푸욱!
비틀대던 공추문의 눈이 고통으로 부릅떠졌다. 어느새 다가선 전향의 목검이 그의 명치를 찌른 것이다.
쩌적!
뒤이어 목검이 공추문의 목젖을 후려쳤다. 목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공추문이 풀썩 쓰러졌다.
“으, 으으…….”
무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전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작은 신형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에 완전히 질린 상태였다.
“꺼져.”
전향이 속삭이듯 말하자 무사들이 황급히 마을 밖으로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와, 와아!”
“향 형이 엄청 세졌어!”
넋이 나가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이 삽시에 전향에게로 달려왔다.
“대인…….”
그 모습을 보던 진효린이 걱정스러운 듯 독고유에게 다가왔다.
독고유도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저 아이는 소저가 알던 그 아이가 맞소.”
“……!”
독고유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진효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아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전향의 웃음은 분명 천진난만한 그것이었다.
“단지 저 아이는 지키고 싶을 뿐이지. 가족들을, 형제들을…….”
“쳇! 결국 난 또 아무것도 못했군.”
진효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합이 투덜댔다. 오랜만에 몸 좀 푸나 싶었는데 또다시 싸우지 못하게 되었으니 투덜댈 만도 했다.
푸드득!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솔개 한 마리가 주합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주합이 손을 들어 올리자, 솔개가 날갯짓을 하며 주합의 손으로 옮겨 앉았다.
하오문에서 온 전서구였다.
“오, 내 정보인가?”
그 모습에 독고유가 눈을 빛냈다. 주합은 심드렁한 손길로 솔개의 발에 묶인 서찰을 뽑아 들었다.
“…….”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주합의 안색이 붉어졌다 파리하게 질렸다. 진효린과 독고유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꾸깃!
서찰을 끝까지 읽고 난 주합의 얼굴은 평상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차갑다 못해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찰을 한 손에 구겨 버린 주합을 바라보며 독고유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