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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23화)
제13장 암수에 맞서다(1)


서찰을 땅에 툭 떨어뜨린 주합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독고유는 그가 버리고 간 서찰을 주워 들었다.
서찰에는 그리 많은 글이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독고유의 눈을 부릅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강소지부 ― 전멸
절강지부 ― 전멸
광서지부 ― 대파
안휘지부 ― 대파
본 산동지부도 팔 할 이상의 피해를 입었음. 본문을 공격한 배후나 동기에 대해서도 불분명. 주위의 문파들은 본문의 피해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음.
지부장 밑 간부들의 긴급한 소집을 요청함.
―산동지부장 추무운(追無雲)

“전멸이라? 하오문의 지부만 골라서?”
서찰을 읽고 난 독고유의 입에서 불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각 지방의 대도시에는 거의 대부분 하오문의 지부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각 지부장과 문주를 제외한 이들은 같은 하오문도끼리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하오문과 연결되어 있는 곳만 골라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오문의 지부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의 정보력과 그곳들을 모조리 습격할 무력을 갖췄다.
그런 힘과 규모, 능력을 지닌 세력이 강호에 얼마나 있을까.
“설마…….”
독고유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일 무렵, 서찰의 내용을 읽은 진효린이 나지막하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인, 제 생각이 맞다면 이것은…….”
“내 생각도 그렇소. 소저의 팔다리를 하나씩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지. 이것으로 술두꺼비를 소저의 곁에서 떨어뜨리면 나와 소저를 처리하는 것은 쉬우리라 생각하는 거요.”
“그런……!”
예상이 확신이 되자, 진효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얼마나 더 피를 보려는 걸까요. 복수는 또 다른 피를 낳고, 그것은 또 다른 피를…….”
“그것은 원수를 찾은 후에 생각할 일이오.”
독고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고요한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진효린의 곁으로 몰려가는 아이들을 바라본 독고유는 걸음을 돌려 주합이 들어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침상에 걸터앉은 주합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합, 이것은…….”
독고유가 차분하게 입을 열자, 주합의 고개가 휘익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독고유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나도 알고 있소, 형님. 누님과 날 떼어놓으려는 수작이겠지.”
“…….”
독고유는 입을 다물었다. 주합도 하오문주가 되기 전까지 많은 경험을 쌓아 온 사내다. 본능적으로 이 일의 진상을 깨닫고 있었다.
“누님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 형제들의 원수도 되어 버렸수. 그래서 더 돌아갈 수가 없으니, 나는 계속 갈 거요. 물러설 수 없으니까.”
주합의 주먹에서 핏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형제들의 목숨 값은 확실히 받아 낼 거요.”
“…….”
독고유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분노한 주합의 모습은 그도 본 적이 있었다.
이때의 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가 납득하는 방법으로만 행동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독고유는 갈등하고 있었다.
‘아니, 과거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동기가 다르니까…….’
독고유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원수가 정파라면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다. 주합이라면 분명 그들과 싸우려 할 것이고, 그 순간 하오문은 정파도 사파도 아닌 마도의 존재가 되어 버릴 테니까.
“함께 갈 테냐?”
주합에게 묻는 독고유의 목소리에는 전과 같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주합은 그를 바라보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라고 하는 거요?”
독고유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럼 준비하고 있으마.”
밖으로 나온 독고유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전향과 전은에게로 향했다. 전향이 그를 보자 꾸벅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전은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지키는 것은 너희들이다. 너희들은 한시라도 떨어지지 말고 끝까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야. 알았느냐?”
“네, 대인.”
독고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사이에 있던 진효린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지금 떠날 건가요?”
“두꺼비도 함께요.”
독고유의 대답에 진효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질끈 입술을 깨물어 떨림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두꺼비 아저씨!”
독고유와 진효린의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주합이 집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꼭 또 와야 해요!”
아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자, 주합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떠나는 거예요?”
소앵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주합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또 올 테니 걱정 마라.”
“꼭! 약속! 약속이에요!”
주합은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독고유의 주먹이 꾹 쥐어졌다.
‘분명 괜찮을 거야. 분명.’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는 독고유의 주먹이 여느 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가 계집은 광동에 도착했다던가?”
“지금쯤 아마 도착했을 듯합니다.”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보고된 바로는 하오문주가 계집년과 함께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충분하다. 명령은 확실히 하였는가?”
“혹여 있을지 모를 변수에 대비해 삼 할에 가까운 전력을 투입하였습니다.”
“잘했다. 뒷마무리는 깨끗하게 하도록.”
“헌데 문주, 아니 아버님, 진가가 숨기고 있던 것들은 모두 찾아내셨습니까?”
“신마(神魔)와 염마(炎魔)의 전기는 찾아내었다. 헌데…….”
“천마에 대한 것은 전혀 찾아내지 못하신 모양이로군요.”
“그것도 머잖아 찾게 될 것이다. 진가 계집이 가지고 있다 해도 곧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테지.”
“그것이라면 분명 암궁(暗宮)도 우리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그래. 분명 강호의 균형이 깨지고 난세가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천하를 손에 쥐는 것은 우리가 되겠지.”
“후훗! 그러려면 우선 싹을 확실히 잘라 놓아야겠군요.”
“그래. 하오문주 외에 그 백의 사내에 대한 정보도 확실히 입수해 두어야 한다.”
“그에 대한 정보만큼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진가 계집에게 반한 한량이거나 하오문주의 수하가 아닐까 추측 중입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의외의 복병일 수도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간 제 일에 한 치의 착오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 너에게 맡긴 것이다. 기필코 진가 계집의 목을 베어라.”
“존명.”
“큭큭! 그 사내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다. 이미 모든 일은 시작되었으니 내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큭큭큭…….”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중년인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과연 진가장이 터를 잡은 산이로군.”
남곤산에 도착한 독고유는 산을 올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숲이 울창하고 동으로는 호수가, 서로는 평야가, 남으로는 바다가 보이니 광동의 진기가 모여든다고 할 수 있었다.
“한 시진만 오르면 도착할 거예요.”
산을 오르는 진효린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생을 봐 왔기에 너무나 익숙한 산세와 산길. 하지만 더 이상 그녀와 그녀 가문의 터전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는 독고유의 걸음걸이도 여느 때보다 빨랐다.
불안함의 근원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은 주합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였다.
남곤산 정상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진가장은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임에도 여전히 웅장했다. 무림 삼대세가라는 말이 결코 허명이 아니라는 것이 담 안에 솟아오른 웅장한 건물들에서 여지없이 나타났다.
“혈향…….”
대문 앞에 선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진가의 모든 이들이 죽은 지 몇 달이 되었건만 아직도 진가장에 밴 혈향은 채 가시지 않았다.
퉁! 퉁!
진효린은 멍한 표정으로 대문의 문고리를 쳤다. 지금도 이렇게 치면 형제들이 그녀를 마중하러 나올 것만 같았다.
“들어갈게요.”
끼이익!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던 진효린이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문을 당겼다. 천천히 대문이 열리며 진가장의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장원의 중앙에 솟아오른 봉분들을 보며 독고유는 침음성을 흘렸다. 묘비와 풀도 나지 않은 봉분들. 모두 진효린이 직접 묻었을 터였다.
“제가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제가 원수를 갚고 난 후에야…… 원수의 피로 묘비에 이름을 새기기 전까지는 진가의 어느 누구도 편히 쉬지 못하실 테니까…….”
진효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옷깃을 꾹 쥔 진효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것은 모두 건드리지 않은 상태요?”
독고유가 진가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묻자 진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는 독고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상했다.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것치고는 건물들이 너무 깨끗했다. 진가를 하룻밤 새에 몰살시킬 이들이라면 가공할 무위를 자랑할 터이고, 그렇다면 분명 건물들에도 큰 손실이 갈 정도의 대전투가 있었어야 했다.
한데 건물들의 기와는 어느 것 하나 부서진 것이 없었고, 그것은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습격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대부분이 죽었다. 그런 것인가…….’
거미줄이 쳐진 대관 안으로 들어서는 독고유의 눈빛이 번뜩였다. 피칠갑이 된 벽과 피로 찍힌 손바닥 모양의 흔적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녀자들과 아이들은 큰 혼란 속에 죽어 갔을 터였다.
“무공을 익힌 사내들은 어느 정도 저항을 했군.”
숙소로 들어서자 곳곳에 칼부림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검기에 푸욱 파인 벽이며 잘려 나간 이불과 책상, 서첩들.
“그렇다면 왜?”
이곳저곳을 살피던 독고유의 입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죽인 흔적만 있을 뿐, 뭔가를 뒤진 흔적은 없었다. 벽에 걸린 검이며 귀금속들도 모두 그 자리 그대로였다.
손을 댄 흔적이 없다.
‘단순히 죽이기 위함일 리는 없다. 진가가 큰 원한을 사고 있지 않는 이상…….’
원한을 사 그것을 갚으려 했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원한은 자신의 손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후의 명분을 위해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으음?”
건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서던 독고유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만은 흔적이 조금 달랐다.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가 앉은 것은 똑같았지만, 이 근처부터는 싸움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서고?”
반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 독고유의 시선이 빽빽하게 늘어선 서책들로 향했다.
역시 아무런 손실이 없었다.
“누군가 손을 댄 자국인데?”
가득 앉은 먼지 가운데 곳곳에 보이는 손자국들과 먼지를 불어 낸 자국들.
독고유는 서고의 책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순간, 독고유의 시선이 번뜩였다.
다른 책들과 다르게 꽂혀 있는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이것은?”
끼긱!
툭 튀어나와 있는 책에 독고유의 손가락이 닿자, 기관진식이 작동하는 듯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튀어나와 있던 책이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맨 끝의 책장이 빙글 돌았다.
“다들 이리 와 보시오.”
독고유가 놀라 진효린과 주합을 불렀다. 진효린이 황급히 서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런 기관이 서고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소?”
“아아…….”
진효린도 묵빛 책장은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 안에 빽빽하게 위치한 서책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뒤진 흔적이 있군.”
책장으로 다가선 독고유가 조심스럽게 책을 쥐어 들며 말했다. 이런 곳이라면 분명 함정이 있을 법도 하건만, 책을 집는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당 삼백 년사……. 장삼풍 전기(傳記)?”
책을 꺼낸 독고유의 입에서 무당파 개파 조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누군가 한 번 서책의 먼지를 닦아 내었던 듯 빛바랜 먹의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들이야말로 진가에 전해 오는 최고의 보물이에요.”
책들을 죽 둘러보던 진효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가는 대대로 강호에 있었던 영웅들의 모든 것을 책으로 만들어 냈어요. 그 역사가 벌써 사백 년. 그 안에서 영웅들의 무학과 인생을 모두 담고, 그것으로 가문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곤 하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저도 몰랐단 말이오?”
독고유가 묻자, 진효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무림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녀도 알았지만, 어디서 누가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내 이야기도 있군. 하오문주 주합, 주귀라?”
책장을 뒤지던 주합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곧 그의 손에 서책이 뽑혀 나왔다. 최근까지 기록하던 것인 듯 책도 그리 낡지 않았고 먼지도 앉아 있지 않았다.
“어디 볼까…….”
주합의 눈빛이 평상시의 장난기 어린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많은 영웅들의 일대기 중에 자신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득의양양한 기세였다.
“태생 불명, 정확한 나이 불명. 파락호들의 대장이자 뒷골목의 전설. 뛰어난 무위와 뚝심을 지니고 있으나 이기적인 마음과 더러운 술버릇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는 안타까운 기재. 그나마 그가 여색을 밝히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여색까지 밝혔다면 하오문이 아닌 흑협회의……. 뭐야, 이거! 전기가 아니라 악담이잖아!”
“풋!”
주합이 고함을 내지르며 거칠게 책을 꽂아 넣자, 진효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썼군. 과연 믿음직한 서고인데…….”
독고유도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둘러보았다. 주합은 씩씩거리다 휙 고개를 돌렸다.
“흥! 그래도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니 되었수! 어?”
퉁명스레 말하던 주합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