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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24화)
제13장 암수에 맞서다(2)


그가 책장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이쪽 책장이 비어 있는데?”
그의 말에 독고유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과연 한구석의 낡은 책장에 몇 군데의 빈 구멍이 눈에 띄었다.
“이곳은……?”
빈자리 근처의 책을 뽑아 보던 독고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도 삼백 년의 역사…….”
“이차 정마대전…….”
“귀마(鬼魔)……. 여기는 역대 최강의 마인들에 대한 기록이 있던 곳인 모양이에요!”
책 하나를 뽑은 진효린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하지만 독고유는 이미 그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대신 그 근처의 모든 서책들을 뽑아 대고 있었다.
“없다, 없어…….”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무엇이……?”
진효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탁!
책장의 마지막 책까지 꽂아 넣은 독고유는 망연자실하게 책장을 둘러보았다.
“염마와 신마, 그리고 천마의 전기가 없소. 어느 곳에도…….”
천마. 그저 변두리의 세외 세력에 불과하던 마도를 단박에 무림 제일로 만든 최강의 마인이었다. 염마와 신마도 각각 정마대전을 일으켰고 수천 수백의 정, 사 무인들을 도륙했던 희대의 마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전기가 없다니……?
“뽑아 간 거요, 분명…….”
독고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마와 염마의 전기. 그것이라면 그들의 진전에 대한 단서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결국 세상은 마도를 향해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천마에 대한 전기는 저에게 있어요.”
그때, 진효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독고유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갔다.
“천마에 대한 책은 이곳이 아닌 일반 서첩들 사이에 꽂혀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고요.”
진효린이 품에서 아주 낡은 책을 꺼내 들었다. 독고유는 번개같이 그 서책을 집어 들었다.
“천마전기……. 아아!”
표지에 적힌 글귀를 읽던 독고유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럼 이것을 보고 막사산을 올랐던 거요?”
“그저 간장과 막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기에…….”
진효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독고유는 사색이 되어 책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큰 위험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니.
화르륵!
독고유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길은 삽시에 천마의 전기를 집어삼켰다.
“아앗!”
진효린이 낮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독고유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열기 때문이었다.
“진 소저의 원수들이 신마와 염마의 전기를 가져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그리고 천마의 전기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한 것이지. 그러던 차에 소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소저와 연관이 있으리라 유추한 것이오.”
“…….”
진효린이 침을 꿀꺽 삼키자, 독고유는 완전히 타 버린 책의 잔해를 툭툭 털어 버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싹도 잘라 버리고 싶었겠지. 혹여 나중에 자신들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불행의 싹을…….”
“젠장…….”
침을 퉤 뱉은 주합이 서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것을 알아낸 것으로도 충분하오. 나갑시다.”
독고유는 진효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효린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가장 큰 무기이자 지침이었던 기록들이 오히려 가문을 망하게 만들었다니…….
이깟 서책들이 진가 모두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니.
‘이런 것을 위해 모두를…….’
앙다문 입술 사이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독고유의 뒤를 따르는 진효린의 눈빛이 원혼들의 뜻을 이어받아 굳건히 일렁였다.
‘이런 것이 남아 있었다니…….’
앞서 걸어가는 독고유의 눈빛도 타오르듯 일렁였다.
마도(魔道)로 가는 모든 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기필코 그 배후를 찾아내야만 했다.
주합은 묘비 앞에서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진중했다.
“나에 대한 어떤 평가를 써 놓았어도 괜찮소. 하지만 당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이 내 형제들의 원수이니, 나는 기필코 그들을 찾을 거요.”
주합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그의 주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원혼들의 그의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물론 나도…….”
주합의 어깨를 두드린 독고유도 포권을 취했다. 그의 곁에 선 진효린만이 묘를 향해 큰절을 올릴 뿐이었다.
콰앙!
그 순간,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가공할 광풍이 독고유의 전신으로 휘몰아쳤다.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주합과 진효린이 놀란 표정으로 진가장의 건물을 올려 보았다.
우르르!
“……!”
진효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폭약이 터진 듯 건물의 일부가 무너져 있었고, 그 주위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곳에 있는 것인가!”
독고유가 목도를 뽑아 들며 외쳤다.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도 저 건물과 함께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아아…….”
불타는 진가장을 바라보며 진효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해 왔던 곳이다. 불길이 건물과 함께 그녀의 추억들도 모두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휘오오오!
바람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소리가 심해질수록 독고유의 안색이 굳어 갔다.
살기!
대단히 많은 훈련을 받은 능숙한 살기가 사방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투파팟!
불타는 진가장의 주위로 삽시에 흑의 복면인들이 치솟아 올랐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암기들이 독고유와 진효린에게로 일제히 쏘아졌다.
채채챙!
독고유가 내공을 북돋우며 검막을 만들어 냈다.
내공을 끌어올린 독고유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사방에서 날아들던 암기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많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담벼락 위에 올라선 복면인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삼백은 될 듯했다. 게다가 개개인이 일류 이상의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원수…….”
“형님…….”
진효린과 주합의 입에서 동시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합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이 독고유의 전신을 훑었다. 흔들리던 기운이 독고유를 바라보며 굳건히 타올랐다.
“주합, 너는 소저를 지켜라! 내가 상대하겠다!”
독고유가 목도를 치켜들며 말하자, 주합은 진효린에게로 다가섰다. 진효린은 주합이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자,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주합의 손에서 은은한 공력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
그녀와 눈이 마주친 주합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효린은 눈을 부릅떴다.
주합이 번개 같은 속도로 독고유에게 달려들어 그의 뒷목을 후려쳤던 것이다.
“큭!”
독고유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주합을 돌아본 그의 눈빛이 의구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주합, 네놈…….”
“미안하지만 이곳은 내가 맡겠소. 약속은 취소요, 형님.”
쓰러지는 독고유를 쳐다보는 주합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빨리 업지 않고 뭐 하는 거요!”
“하, 하지만 두꺼비…….”
“이놈들은 내 원수요. 진짜 흉수는 누님의 원수이겠지만, 내 형제들을 공격한 놈들은 이놈들이란 말이오.”
주합의 눈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놈들은 내가 모조리 씹어 먹겠소. 그러니 누님은 어서 내려가시오! 방해만 된단 말이오! 싸우지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니까!”
“…….”
주합의 의지는 확고했다. 진효린이 혼절한 독고유를 등에 업자, 주합의 몸에서 가공할 기류가 피어올랐다.
“구경하고 있으니 재미있냐!”
콰앙!
주합의 주먹이 기합성과 함께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주먹이 향한 앞의 담벼락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위에 서 있던 복면인들이 삽시에 사방으로 신형을 날렸다.
“가시오! 어서!”
“꼭 뒤를 따라와! 광주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먼지구름을 뚫고 진효린이 달려 나갔다. 그제야 흑의인들이 일제히 진효린에게로 달려들었다. 도에 일렁이는 도기들이 진효린의 주위로 파도쳤다.
콰콰쾅!
앞서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폭발에 휩싸여 갈가리 찢겨졌다. 그들의 사이로 떨어져 내린 주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먼지구름이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류에 맞추어 회오리치듯 일렁였다.
뚜둑! 뚜둑!
주합의 주먹과 어깨에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들은 나랑 놀아야지.”
“술두꺼비…….”
그 모습을 바라본 진효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주합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헤어지면 한동안 주합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살아 돌아와야 해. 꼭…….”
진효린의 신형이 산 아래로 달음질쳤다.
“좋아, 흐흐.”
진효린의 신형이 산 아래로 멀어져 가자, 주합이 씩 웃었다. 사자왕과의 싸움 이후 독고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주합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리하게 기를 운용했다가는 둘 다 죽게 된다.
그래서 주합은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내 형제들의 목숨 하나하나는 네놈들 전체를 피 곤죽으로 만들어도 부족하다! 나는 하오문주 주합! 이 술두꺼비 어르신의 주먹맛을 보고 싶은 녀석들부터 앞으로 나서라!”
주합이 주먹을 내지르며 호기롭게 외치자, 흑의인들이 빙글빙글 돌며 주합의 주위를 에워쌌다.
‘시팔! 그때 그냥 죽었소 하고 따라 나서지 말걸! 내 목숨 값을 외면했다가는 죽어서도 가만두지 않을 거요, 형님!’
“흐아아아!”
노호(怒號)를 토해 낸 주합의 신형이 폭풍처럼 흑의인들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의 주먹에 맺힌 기운이 그의 굳은 의지를 품고 타올랐다.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에 독고유는 정신이 들었다.
멍한 가운데 천천히 눈을 뜬 그는 모닥불 곁에 앉은 진효린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정신이 드셨나요?”
진효린이 허겁지겁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흐린 가운데서도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렷이 보였다.
“두꺼비 녀석은? 으음……?”
있어야 할 주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독고유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찌르자, 정신이 맑아졌다.
“……!”
숨을 내쉬던 독고유가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주합! 주합은 어디 있소!”
“자신이 모두를 상대하겠다고 했어요.”
진효린이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듯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자식이!”
독고유의 눈에 핏발이 섰다.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녀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단 말인가!
“이 개자식! 누가 네놈 마음대로……!”
독고유는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주먹이 분노와 슬픔으로 후들후들 떨렸다.
마도로 몰아넣지 않으려 했다. 마두로서 최후를 맞지 않게 하려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뒈져 버리는 건 더욱 보기 싫다! 누가, 누가 네놈에게 목숨을 빚지고 싶다고 했냐!”
독고유의 절규가 피를 토하듯 터져 나왔다. 밤하늘을 올려 보는 그의 이마에 핏줄이 가득 솟아올랐다.
“이 개자식이 답지 않은 짓을……!”
“…….”
독고유의 주위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진효린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압도적인 기세였다.
눈매도 붉게 물들어 갔다. 그 자체로 한 마리의 거대한 야수를 보는 듯했다.
“개 같은……!”
스파팟!
욕지거리를 내뱉은 독고유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이내 삽시에 이십여 장을 달려 나간 그의 신형이 화살과 같은 속도로 남곤산으로 향했다.
“대인!”
그 모습에 결국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린 진효린은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콰콰쾅!
독고유의 앞을 가로막은 담벼락이 일 수에 산산이 부서졌다.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린 진가장의 안으로 그의 신형이 멈춰 섰다.
“이이…….”
시산혈해(屍山血海)!
진가장의 장원은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중앙에 우뚝 솟은 봉분들은 흑의인들의 피를 가득 머금고 밤중에도 붉은빛을 뿜고 있었다.
몸이 갈가리 찢긴 흑의인들의 시신이 장원의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수가 능히 이백은 될 듯했다. 개중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진가의 본관도 완전히 타 부스러졌다.
그야말로 끝없는 살육의 현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개 같은 자식이…….”
하지만 독고유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봉분 위에 잘려진 채 떨어진 근육질의 팔.
그 오른팔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윽…….”
뒤따라온 진효린이 사방에 널브러진 흑의인들의 시신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땅바닥에 흐른 내장과 핏물 사이로 보이는 뇌수가 역한 냄새를 풍겼다.
“웩! 웩!”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든 것을 게워 내고 말았다. 진효린의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을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독고유의 시선이 묘비 앞에 박힌 도(刀)로 향했다. 흑의인들이 쓰던 도였다. 그것으로 주합의 팔을 벤 듯, 피딱지가 날 전체에 눌어붙어 있었다.
스파팟!
독고유의 걸음이 도를 향해 다가설 무렵, 폐허로 변한 진가장 건물 안에서 검은 신형 세 개가 솟구쳐 올랐다.
살아남은 흑의인들이었다. 혹여 그녀가 돌아올까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쒜엑!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도가 진효린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진효린의 놀란 표정이 흑의인들의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콰르르륵!
흑의인들의 도가 진효린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붉은 혈풍이 흑의인들의 몸을 집어삼켰다.
“끄, 끄윽!”
삽시에 팔다리가 베인 흑의인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붉은 혈풍은 흑의인들의 피와 내장을 머금고 더욱 광폭하게 휘몰아쳤다.
후두두둑!
잘게 잘린 고깃덩어리가 진효린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공…….”
진효린이 역함도 잊고 중얼거렸다.
떨어져 내리는 고깃덩어리와 혈무 사이로 피처럼 붉은 도를 움켜쥔 독고유의 신형이 천천히 일어섰다.
“나에게 다시 마도(魔刀)를 쥐게 하다니…….”
“대인…….”
독고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진효린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독고유의 말에 진효린의 눈이 멍하게 풀렸다.
“놈들은 명부(冥府)를 보게 될 거요.”
독고유의 백의가 핏물에 젖어 붉게 물들어 갔다.
눈동자도 어느새 핏물을 머금은 듯 붉은빛을 띠었다.
“그곳에 도착할 혼백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