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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화)
1장 양유가 광억을 만나다 (2)
노인의 행색은 무척 특이했다.
입고 있는 청의는 때깔이 좋고 기운 데 하나 없었다.
가난한 동네에만 거했던 양유는 이런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게 등에 망태기를 지고 있었다.
이 부자연스러움이 어쩐지 익숙해서 양유는 아까 만두 가게 앞을 지나가지 않았었냐고 묻자 노인은 맞다고 대답했다.
“그럼 설마 날 쫓아온 거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
양유는 일어나 천천히 노인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런 양유를 보고 노인은 그렇게 겁낼 것 없다고 말했다.
만두를 훔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따라왔을 뿐이었는데 운 좋게 싸움 구경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양유는 불신 가득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 언제라도 내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계속 말했다.
자신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니 만두를 도둑질해 먹든 싸움질을 하든 알 바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기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또한 훈계를 좋아하는 도덕주의자라 할지라도 배고파 저지른 일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이니 무언가 갈취당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또 나는 네 말마따나 노인네인데 체면이 있지 어린 너를 핍박할 것 같으냐? 왜 그렇게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헹, 내가 눈치도 없는 멍청이인 줄 알아? 난 거지라구. 가장 밑바닥 인생이야. 눈엣가시이지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존재가 아냐.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난 그저 대화나 좀 해보려는 것뿐이다. 어린 것이 의심만 많아 가지고……. 좋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양유는 역시 맛이 간 것이 틀림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화라니?
이 무슨 남우세스러운 소리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다 싶었다.
요새는 인심이 사나워서 도둑질을 주로 하고 있지만 양유의 본업은 동냥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적선을 가장 잘해 주는 부류는 인상 좋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넉넉한 인간들도 아니었다.
약간 맛이 간 사람들만이 동정하며 음식을 나눠 주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몫을 떼어 주는 건 맛이 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양유가 겪은 세상은 그랬다.
“며칠을 굶어서 배가 고픈데……. 이제야 먹은 것도 훔친 만두뿐이고.”
양유는 갑자기 웃는 낯을 하며 약간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의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노인은 허허 웃었는데 양유의 숙련된 동냥 기술에 감탄해서인지 자신의 의도가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좋다. 근처 객잔에서 뭐라도 살 테니 따라오너라.”
노인이 앞장서고 양유는 희희낙락하며 뒤를 따랐다.
양유가 들어오는 것을 본 객잔 주인은 거지 사절이라며 쫓아내려 했으나 노인이 일행이라고 하자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자리를 안내했다.
양유는 별 이유도 없이 괜히 으쓱해서 건방진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노인장이 내기로 한 겁니다?”
노인은 그러마고 했다.
양유는 주인에게 뭐가 되느냐고 물었다.
그럴듯한 요리명을 대면서 거드름 피우며 주문하고 싶었지만,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작은 동네 객잔이라 다양한 요리는 없지만 숙수가 규화계(叫花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고 했다.
양유는 또 뭐가 없냐고 했다.
“우육면(牛肉麵)도 엄청 괜찮습니다요. 아닌게 아니라 제가 매일 먹을 정도입니다.”
노인은 그럼 그것들을 내오라고 시켰다.
“이제 내가 무슨 나쁜 목적이 있어서 네 뒤를 밟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느냐?”
“그래도 아직 미심쩍은 면이 있는데……. 난 죽을 힘을 다해 뛰었는데 어떻게 내 뒤를 밟을 수 있었던 거지? 장씨도 날 못 따라왔다고. 그런데 어떻게?”
당신 같이 늙고 볼품없는 노인네가, 가 생략되었다.
맛이 가긴 했지만 이런 훌륭한 대접을 해주는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노인은 호오 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린놈이 꽤나 날카롭구나.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 내가 보기에 넌 그리 우직한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만두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지? 주인 보는 앞에서 그러기엔 용기가 안 생겼나?”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이 노인은 불가사의한 데가 있다.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흥, 내가 겁쟁이라니 이 무슨 실례되는 소리야? 그리고 그건 내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 무식하게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양유는 자신의 행위가 우발적이 아닌 계획적 절도라는 것을 노인에게 납득시키려고 자신이 관찰한 것에 대해 말했다.
만두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장씨와 그의 처인데 주로 부인이 가게 안에서 만두를 찌고 장씨가 밖에서 파는 것이다.
부부에게는 갓난애가 하나 있었다.
밥때가 되면 아기는 배가 고파 으앙 울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서러움으로 가득한지 아낙은 만두를 찌다가도 못 참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곤 하는 것이었다.
젖이 시원찮게 나와서 한참을 그러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장씨는 하는 수 없이 가게에 들어와서 찜통을 지켜본다.
이러한 일이 하루 한 번은 꼭 있었다.
양유는 자신의 빠른 발이라면 장씨가 밖에 나와 있지 않은 이상, 충분히 만두를 훔쳐 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며 자화자찬했다.
또한, 거지 패거리를 만날 것에 대비해서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어뒀는데 이런 것이 바로 선견지명이 아니겠냐며 선각자라도 된 양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때가 구질한 아이의 얼굴로는 도달하기 힘든 지평이었고 실제로도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노인은 상당히 감명을 받은 듯했다.
양유를 보는 눈이 꽤 부드러웠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요리가 나왔다.
양유는 규화계에 달려들어 다리를 뜯어낸 다음 입에 처박고 오물오물 씹었다.
순식간에 닭 한 마리가 뼈만 남았다.
그러는 사이 우육면이 적당히 식어서 면을 후루룩 먹고 둥둥 떠 있는 쇠고기 석 점을 꿀떡 삼켰다.
그러고도 배가 남아서 국물까지 다 마셨다.
“아, 잘 먹었다. 그런데 노인장은 왜 안 먹어요? 입맛이 없으신가?”
걸신처럼 먹던 양유와는 다르게 노인은 국물만 몇 술 뜨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다지 생각이 없다.”
“그러면 내가 먹어도 상관없겠네?”
양유는 노인의 그릇을 끌어와 앞에 놓고 그것도 깨끗이 비웠다.
노인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양유가 포만감 가득한 얼굴로 배를 두드리자 노인이 말했다.
“이제 만족하느냐?”
양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는 더 들어갈 여유가 손톱만큼도 없다.
“그럼 이제는 정말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양유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팔을 뻗고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그렇게 했다.
그런데 노인이 양유의 손목을 덥썩 잡는 것이 아닌가?
놀라 빼려고 했지만 노인의 손아귀힘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놓지 못해?”
노인은 무표정한 채로 양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양유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게끔 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네가 생각해도 내가 왜 거리에 널린 거지에 불과한 너에게 음식을 사 주는지 이해가 안 가지 않느냐?”
양유는 고개를 상하로 흔들었다.
“내가 무슨 나쁜 뜻을 품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아까도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너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난 너에게 성의를 보였다. 그렇다면 다시 판단해 보아라. 내가 널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것 같으냐?”
양유는 노인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나쁜 뜻이든 좋은 뜻이든 이미 자신은 노인에게 제압된 상태였다.
“알았으니 맘대로 해.”
승낙을 하자 갑자기 손목이 뜨겁게 저려왔다.
양유는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노인의 손은 양유 손목에 붙어 있었다.
맞닿은 노인의 손바닥이 뜨거운 것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 자신의 몸속 혈관이, 그 안의 혈류가 들끓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더 정확히는 혈관 안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찾아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운은 팔목에 잠시 자리하더니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상완을 타고 어깨를 지나 가슴 부근이 이제 후끈해지는데, 여기서 한 번의 분열이 일어났다.
두 덩어리로 갈라진 양기는 분업하기라도 하듯 각기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갈라져 나온 기운은 반대쪽 팔로 향하며 모체가 왔던 대로의 반대로 나아갔고, 덩어리가 더 큰 원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갔다.
배 부분에 이르러서 두 번째의 분열이 있었다.
또 두 개가 된 기운은 양발을 목표로 내려갔다.
손끝, 발끝에 도달한 세 기운은 할 일을 마쳤는지 곧 사라져 버렸다.
언제 그렇게 뜨거웠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느낌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상한 기운은 양유의 몸을 완전히 훑었다.
노인은 그제야 양유를 놓아 주었다.
양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했다고 좋게 생각하기에는 양유는 충분히 부정적인 인간이었고 일단 노인네가 수작을 부렸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이 자기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면 어째 꺼림칙했다.
“아까도 했던 말이지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나 용법은 달라서 이번에는 정말로 무엇하는 짓인지 물어본 것이었다.
“너 몇 살이지?”
“겨울이 지나면 이제 열둘이야. 잠깐, 내 말에는 대답 않고 왜 딴소리야?”
“나이에 비해 경맥이 원활히 뚫려 있다. 이건 거지 생활 때문인가? 그래도 그렇지 제대로 섭식을 하지 못하고 항상 찬 이슬을 맞고 다닌다 해도 탁기가 거의 쌓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건 좀 축복 받았다 해야겠군.”
노인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양유는 무시당하니 어이가 없어 쳐다보았으나 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도 좋다. 그럼 한 가지만 더 해 보자.”
그러나 양유는 심사가 불편해져 있어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