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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3화)
1장 양유가 광억을 만나다 (3)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안 좋은 것이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리고 아쉬운 것은 자기였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냈다.
“자, 은자 한 냥이다. 이 조그만 것 안에는 방금 먹은 음식의 몇 배가 들어 있다. 내 말대로 하면 이것을 주지.”
양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은자는 미래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위대한 물건이 아닌가?
“헤헤, 물론이지. 뭐든 다 할 수 있어.”
노인은 주인을 불러 값을 치르며 그릇을 치워 달라고 했다.
탁자가 깨끗해지자 노인은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 폈다.
종이 위에는 온갖 도형과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양유는 의문 띤 얼굴로 노인을 보자 양유에게 붓을 건넸다.
“풀어라.”
붓을 받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노인은 그려진 것들의 흐름을 잘 보고 빈칸에 그에 맞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대충 했다가 기대 이하로 나오면 은자는 없다.”
치사하게…….
양유는 중얼거리며 종이를 보았다.
까막눈이지만 푸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첫 문제, 원 안에 네 변의 길이가 같은 사각형이 내접해 있고 사각형 안에는 콩알만 한 점이 찍혀 있었다.
다음 그림으로 갈수록 사각형이 우측 방향으로 회전했다.
그런데 점은 그런 규칙에 따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점은 그저 무작위로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유는 곧 점이 위치하는 규칙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점도 일단은 사각형과 함께 회전했다.
하지만 회전이 끝난 후, 왼쪽으로 이동했고 다음 그림에서는 반대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왔다 갔다 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양유는 빈칸에 망설임 없이 원과 사각형을 그리고 점을 찍었다.
“쉽네 뭐.”
양유는 쓱쓱 풀어냈다.
뒤로 갈수록 어려워졌으나 막힘은 없었다.
모든 문제를 다 해치우고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하나하나 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훌륭하군.”
노인의 눈에 감격한 기쁨이 스쳤다.
“내 은자는?”
노인은 양유에게 은자를 건넸다.
양유가 뛸듯이 기뻐하며 반짝이는 은자를 요리조리 살피고 뒤집어보고 하는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러한 일련의 이상하기만 한 일을 한 것인지 알겠느냐?”
노인도 기대하지 않고 물은 것이었다.
알 리가 없었다.
양유는 은자의 우아한 자태를 감상하느라 모른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노인은 양유의 태도가 어떻든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어리고, 그래서 버릇은 없지만 투쟁심도 있어 보이고 체질도 나쁘지 않고 두뇌도 발달한 편이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녀석을 찾기란 쉽지 않지. 그런데 운 좋게도 이런 벽지에서 발견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맛이 살짝 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양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났지? 난 이만 갈게.”
“잠깐.”
양유가 막 걸음을 떼는데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번에는 은자 두 냥을 주려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양유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보았다.
노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공중에 뜨는 것이 아닌가? 그 상태에서 한 번 공중제비를 돌더니 착지하며 손날로 탁자를 내려쳤다.
쿵, 하는 소리에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눈을 뜨고 보니 탁자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주인이 굉음을 듣고 어찌 된 일인가 달려왔는데 두 동강이 난 탁자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노인은 주인에게 은자를 던져 주고는 소리쳤다.
“난 무림인이다! 넌 나의 시험을 통과하였으니, 묻겠다. 내 제자가 되겠느냐?”
저 왜소한 몸에서 이런 힘이 나오다니.
탁자를 산산조각 내는 것보다 이렇게 깔끔하게 자르는 것이 더 대단하다고 양유는 까닭 모르고 감탄했다.
자연히 경외심이 생겼다.
“그야 좋죠.”
너무 선선해서 노인이 당황했다.
“이번에는 고집을 안 부리는구나.”
“뭐든 빌어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오히려 양유는 노인이 제안한 바를 철회할까 봐 어디서 들은 대로 재빨리 구배지례를 했다.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사부님!”
아홉 번째 절을 마치자 노인이 말했다.
“좋다. 넌 이제부터 내 제자이고 난 너의 스승이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양유가 얼른 아뢰었다.
“제자는 양유라 합니다.”
“난 광억이다.”
어떻게 보면 운명적이라 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지만, 이들의 배사지례, 또 제자를 맞는 데에는 전혀 엄숙함도 무언의 끈끈한 정도 없었고 대강 끝나고 말았다.
2장 무공은 언제 배우지? (1)
마을 어귀에 펼쳐진 길 위로 망태기를 짊어진 노인과 쥐 방울만 한 남자아이가 함께 걷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을 보고 조손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만난 지 반 시진도 안 되어 사제의 연을 맺은 희한한 스승과 제자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고 어떠한 신뢰 관계도 쌓여 있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세상에 다시 없을 즉석관계(卽席關係)일지도 모른다.
사제는 마을을 떠나 광억의 거처로 향하는 중이었다.
양유는 문득 떠올라 광억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부님, 아까 그 그림은 뭐였나요?”
양유의 행색은 좀 달라져 있었다.
때가 절은 것은 그대로였지만 광억이 옷을 사 입혀서 넝마 같은 것을 걸치고 있을 때보다는 깔끔해졌다.
광억은 그것은 바로 너의 지능을 측정한 것이라고 했다.
장난 같은 그림 맞추기와 머리 잘 돌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일까?
양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광억이 말했다.
“너는 한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데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느냐.”
“그거야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머리가 좋은 거겠죠. 아니면 적어도 공자왈 맹자왈 줄줄 읊거나요.”
광억은 그것은 무척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과거 급제자의 지능이 높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경쟁률, 연이은 시험을 통해 걸러지고 걸러진 인재가 둔재일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과거 급제는 여러 복합적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질 이외에도 집안의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며 과거 과목인 수재(秀才, 정치학), 명경(明經, 유학), 진사(進士, 문학) 등에 대한 집착적이고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관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에 맞추는 행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과거 급제는 여러 요소의 결합물이지 어느 한 능력을 재단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머리가 굳지 않은 어린 제자를 원하는데, 급제자들은 죄다 나이 든 것들이 아니냐.”
“아! 그렇군요.”
하지만 여전히 그림 잘 맞추는 것과 머리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렴 어때.’
그림놀이 잘해서 제자 시켜 주겠다는데 그거면 됐지 영문을 알아 뭐하겠는가?
둘은 다시 말없기 걷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인적도 아예 없게 되자 광억이 말했다.
“네 걸음에 맞추다가는 한세월이다. 이리 오너라.”
“예?”
이건 승낙이 아닌데 광억은 팔을 뻗어 양유를 잡고는 품에 안았다.
등에 진 망태기 때문에 업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양유는 이게 또 뭐하는 거냐고 따지려는데 갑자기 광억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빠르게 내달렸다.
“스, 스승님 어지러워요!”
주변 경물이 눈에 포착되기도 전에 뒤로 쓸려 나갔다.
나무가 밀려나고 덤불이 밀려나고 구름도 밀려났다.
“눈 감아라.”
양유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찡그리듯 눈을 감았는데, 광억의 팔 사이로 찬 바람이 칼날처럼 파고드는 데다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지를 않고 훌쩍 뛰어넘기 일쑤여서 속이 울렁거렸다.
고역이 한둘이 아니었다.
날이 저물어 갈 즈음이 되서야 광억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유는 기진맥진해서 축 늘어졌다.
겨우 몸을 세워 앞을 보니 가옥이 하나 보였다.
“사부님 집이에요?”
“그렇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처가 번듯했다.
양유는 갑자기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신이 나 광억에게 말했다.
“와, 사부님 좋은 데 사시는데요.”
사실 양유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광억은 자꾸 인적 없는 곳, 험지로만 가고 결국에는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누추한 모옥 정도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무척 훌륭했다.
일단 집이 컸다.
갈대로 짜인 지붕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토단은 튼튼해 보였고 기둥은 굵고 가지런했다.
별것 아닌 초가집이지만 궁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삐걱하고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누가 나왔다.
여인이었다.
“오셨군요.”
단아한 얼굴에 옷차림이 단정했다.
그리고 또 기품이 있어서 이런 데서 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제자를 구했다.”
여인이 양유를 보았다.
양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알기 때문이었다.
걸생(乞生) 삼 년.
누군가의 시선보다는 당장의 배 주림이 더 급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여인을 보니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래요? 그토록 찾으시더니…….”
여인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양유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반가워요, 수옥(水玉)이라고 해요. 편한 대로 불러 주세요.”
그러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처연함이랄지 말없는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양유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만 끄덕이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쉬어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광억은 망태기를 들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수옥이 양유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선 씻어요.”
“네? 네?”
영문 모르고 부엌까지 끌려갔다.
그런데 수옥이 양유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제가 씻겨 드릴게요.”
“예에?”
양유는 충격에 빠져서 허우적대다 수옥을 뿌리치고 옷섶을 움켜쥐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사모님.”
수옥이 생긋 웃었다.
“사모님이라니요. 전 그저 어르신의 시중을 들 뿐이에요.”
“그, 그랬군요…….”
하긴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났다.
이 정도면 거의 팔려 와야 하는 수준이다.
그걸 생각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수옥은 불쾌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양유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수옥이 자꾸 양유의 옷을 벗기려고 하는 것이다.
“정말 괜찮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