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풍상강호 1권 (4화)
2장 무공은 언제 배우지? (2)


“혼자서는 제대로 씻을 수가 없어요. 등에 손이 닿나 보세요.”
양유는 손을 뒤로 뻗어 보았다.
손가락이 어깨 부근에서만 꼼지락거렸다.
“그거 봐요. 제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제자님 등은 목욕하고도 그대로 새까말 걸요.”
양유는 제자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낯간지럽고 창피하고 그래서 그냥 양유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정 그렇다면 등만 허락할 테니 나머지 부위는 자기가 깨끗하게 씻겠다고 하자 수옥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수옥에게 몸을 내맡기면서 양유는 자신이 최근에 씻은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다.
지난 여름이었나?
개울에서 대충 몸을 헹군 기억이 있다.
수옥이 등에 뜨거운 물을 흘린 뒤, 박박 밀기 시작했는데 그 정도로 오랫동안 씻지 않았으니 때가 끊임없이 나왔다.
양유의 몸을 거친 물은 찌든 오물이 되어 부엌 바닥을 뒤덮었다.
당연히 냄새도 끔찍했다.
양유는 쥐구멍에 들어가서 은둔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옥은 싫은 내색 없이 양유를 깨끗하게 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나 그것이 양유를 더욱 몸 둘 바를 알지 못하도록 했다.
수옥은 등을 다 밀고 은근슬쩍 팔을 가져다 쓱싹쓱싹 하기 시작했다.
양유는 내버려 두었다.
이미 더러운 꼬맹이인데 실랑이하고 혼자서도 잘해요 해봐야 웃기기만 하다.
물을 몇 번을 더 길어 오고 쌓아 둔 장작을 모두 태워 목욕물을 만들고 그것을 다 쓰고 나서야 양유는 말끔해졌다.
수옥은 물기를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준 뒤, 방으로 데려가서 머리를 빗기고 땋아 주었다.
양유는 약간 혼이 나가서 인형처럼 얌전히 있었다.
“이렇게 하니까 어디 대갓집 공자님 같아요.”
수옥은 흐뭇해하며 연신 양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양유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자 수옥이 동경을 가져와 얼굴을 비추었다.
양유가 생각하기에 공자는 절대 아니었으나 적어도 거지 같지는 않았다.
오늘 하루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데다 안 하던 짓을 한참 했기 때문인지 기진맥진해져서 양유는 수옥이 차려 주는 저녁을 먹고 바로 잤다.

“일어나라.”
새벽부터 광억이 깨웠다.
광억은 노숙으로 매일을 보내던 양유에게 따뜻한 바닥에서 이불 덮고 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양유는 거기서 기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눈을 꾹 감은 채, 이불을 움켜 안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측은함을 느끼고 그대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광억은 인간도 아닌지 양유의 등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서 밖에다 내놓았다.
곧 새벽의 추위가 양유의 잠을 깨웠다.
양유는 방으로 돌아와서 투덜거렸다.
“해도 안 떴구만 왜 벌써부터 깨워요?”
“내가 널 재우려고 데려온 줄 아느냐?”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양유는 비꼼의 몸짓이라도 보이려고 목을 쭉 내밀고 손날로 자기 목을 내려치는 동작을 했다.
광억은 멀거니 보다 말했다.
“그건 왜 하는 거지?”
예, 예 마음대로 하시죠, 뭐 이런 의미였다.
그러나 이런 것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가?
양유는 광억 얼굴만 바라보았다.
광억도 정말 진지하게 양유를 보고 있어서 양유는 화제를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해야 하죠?”
광억이 도리어 물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
“그야 물론 못하죠. 글공부하는 거지도 있어요?”
“나도 기대는 안 했다.”
광억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양유 발치에 던졌다.
“수옥을 찾아서 그 애한테 배워라. 기한은 삼 주야다.”
그러고는 나가 버렸다.
양유는 책을 집어들었다.
까막눈이라도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천자문(千字文).

삼 일 뒤, 양유는 천 글자를 다 외웠다.
하루 삼백오십자, 즉, 매끼 백이십자를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말라는 광억의 엄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 했어요.”
양유는 광억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광억이 말했다.
“득능막망(得能莫忘)을 써 보아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물론 필체는 경박하고 조악하기 그지없으나 제대로 쓰긴 했다.
알아야 할 것을 배운 후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이었다.
광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촌음시경(寸陰是競)과 기욕난량(器欲難量)을 물었다.
양유는 그것들도 종이 위에 써 냈다.
촌음시경은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이고 기욕난량은 사람의 기량을 함부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품고 있다.
광억은 이 정도로 만족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책을 양유에게 건넸다.
“이건 하루 시간을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읊을 수만 있으면 된다.”
이번에는 책이 무척 얇았다. 엄지와 검지로 집으면 바삭거리며 부벼질 정도였다.
양유는 책을 들고 수옥에게로 갔다.
수옥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광억이 양유의 기상 시간을 너무 이르게 잡아서 수옥도 날 새기도 전에 이러고 있는 것이다.
수옥은 정말 부지런했다.
양유보다 늦게 자면서도 일찍 일어난다.
그렇다면 매일 새벽같이 양유를 깨우는 광억도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일 양유를 가르치면서도 모든 잡일을 도맡아하는 수옥과는 달리 광억은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니 근면한 것인지 그저 잠이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옥, 스승님이 또 책을 주더군요. 그런데 제목을 못 읽겠어요.”
양유가 책을 건넸다.
수옥은 소채를 데치고 있던 중이라서 손끝에 데침물이 묻어 있었다.
수옥은 받을 수 없다는 듯 그것을 내보이며 고개만 내밀어 제목을 보았다.
“잡괘전(雜卦傳)이군요. 주역(周易) 십익(十翼) 중 하나예요.”
“그거 어려운 책 아니에요? 어제 글자 깨친 애한테 왜 그런 걸 공부하라 한대요?”
“어르신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죠.”
“난 없는 거 같은데. 무림인이라면서 칼질하고 권각 놀리는 법이나 가르쳐 주지 왜 글자를 익히라 하고 이런 것까지 읽으라고 해요?”
양유는 지난 삼 일 동안 가졌던 의문을 이제 와서 표시했다.
꼬박꼬박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광억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좋았으나 궁금하기는 했던 것이다.
“유, 그러면 못 써요. 무림인이라도 글자는 알아야 하고 학식도 쌓아야 해요.”
둘의 사이는 며칠 사이에 꽤 가까워졌다.
수옥이야 모시는 사람의 제자이니 양유에게 한결같이 친절했다.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인하고만 사는 이 나이대 여인에게 갑자기 찾아든 어린아이는 귀찮은 존재라기보다 선물에 가깝다.
양유도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수옥이 싫을 리 없었다.
그래서 수옥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입다툼하기는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아침을 먹고 수옥에게 잡괘전을 배웠다.

다음 날, 어김없이 광억이 양유의 새벽잠을 방해했다.
양유는 이제 적응이 되서 광억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불에서 나왔다.
“외어 보아라.”
얼굴을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양유는 잡괘전 이백오십 자를 흥얼거리듯 암송했다.
다 듣고 광억이 말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러나 내가 묻겠는데 너는 잡괘전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요, 다시 해 볼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알아내는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잡괘전의 첫 글자는 건(乾)이다. 그렇다면 스무 번째 글자가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한 자 한 자 짚어 가니 그제야 기억났다.
“불(不)이요.”
“그 정도는 빠르게 생각하면 금방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백마흔다섯 번째는 어떨까? 자, 답해라.”
양유는 속으론 한참을 외고 난 뒤에야 정답을 말할 수 있었다.
“중(衆)……?”
광억이 말했다.
“이래도 네 생각은 그대로이냐?”
양유는 그렇다고 했다.
몇 번째 글자가 무엇인지 아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어쨌든 잡괘전은 자기 머리속에 온전히 존재한다고 했다.
광억은 그럼 잡괘전을 거꾸로 읊어 보라고 했다.
“그러죠 뭐.”
하지만 막상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글자를 떠올리려고 후반부를 재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전 글자와 전전 글자를 하나씩 붙여 나갔다.
“야우(也憂)……도인소(道人小),장도(長道)……자군(子君). 그리고 또 그전이…… 야유결강(也柔決剛) 그리고…… 야결(也決) 쾌(夬).”
본래 순서대로면 쾌는 결단함이라.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을 결단하는 것이니, 군자의 도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근심스럽다, 라는 뜻인데 거꾸로 외니 전혀 의미 전달이 안 되었다.
양유는 더 하기 싫어서 그만두었다.
글의 흐름을 파악해 앞의 구절을 기억해 내고 그것을 되뇌이면서 거꾸로 말하고 막히면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자연히 더듬거리게 되었는데, 이래서는 광억 말이 맞다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격이다.
“반 시진, 아니, 한 이각만 있어도 뒤로도 앞으로도 다 할 수 있을 걸요.”
“그럼 네가 역으로도 욀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난 다르게 요구할 것이다. 한 글자씩 건너 뛰라든가 배열 순서를 바꾸라든가 하면 넌 또 시간을 들여 이런 식으로도 외울 것이냐?”
물론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아 양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될 것이다. 너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잡괘전을 외웠다. 그것은 네가 잡괘전의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한 길을 체득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네 기억을 보조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아라. 넌 운율에 맞춤으로써 좀 더 쉽게 잡괘전을 암기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내용을 수옥에게 배웠기 때문에 단순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의미의 흐름을 기억하면 되었다. 이런 것들이 각각의 작은 편린이 되어 네 머리속에 틀어박혔고 이것들은 이후 서로 연상작용(聯想作用)하여 잡괘전을 의식하지 않고도 읊을 수 있게 한다. 마치 손에 익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