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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5화)
2장 무공은 언제 배우지? (3)


“그래서요?”
“이게 나쁜 방법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잡괘전을 거꾸로 외라고 했을 때, 넌 이전과 같은 유창함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는 한 편린이 다른 편린을 깨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다룰 때, 손에 익은 방법으로는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는 한없이 서투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그 물건을 다루는데 통달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아뇨.”
양유는 일단 동의했으나 곧 의문을 제기했다.
일단 스승님의 말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원래 기억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 또 다른 식이 있냐는 거였다.
그리고 잡괘전을 어떤 방식으로도 기억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거꾸로 보는 잡괘전을 잡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 뜻도 없는 글자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다.
광억이 대답했다.
“내가 다른 방도가 없는데 너에게 이런 말을 하겠느냐? 그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런 방도에 대해 말하겠느냐?”
“두고 보죠.”
양유가 건방을 떨었는데, 광억은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일단 조식(朝食)을 먹어라. 좀 뒤에 오겠다.”
어쨌든 이번엔 당근을 주어야 하는 차례였다.
광억은 양유를 다루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배가 적당히 차서 기분 좋게 앉아 있는데 광억이 들어왔다.
양유가 물었다.
“사부님은 왜 항상 아침을 걸러요? 아침식사는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데 활력소가 되어 주고 균형 잡힌 식습관을 위해 꼭 필요한 하루의 필수 요소라 했어요.”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느냐?”
“수옥이 그러던데요.”
광억은 피식 웃었는데, 일단 전직 거지가 하는 말이라서 그렇고 수옥이 또 어떤 지론을 펼쳤는지 짐작이 가서였다.
“이 나이 들어 활력소 찾고 건강 챙겨서 뭐 하겠느냐?”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무자비함에 활기까지 감돌면 어떻게 될까?
끔찍해진 양유는 광억의 말에 적극 찬동하고 나섰다.
“그럼요, 스승님 말씀이 맞습니다. 먹기 싫으면 안 먹는 거죠.”
“의뭉 떨기는. 잡괘전이나 가져와라.”
갖다 바쳤다.
광억은 받아들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칠 것은 완전기억(完全記憶)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기억(記綠記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뭔데요?”
“아까도 말한 바, 기억이란 파편적이다. 그것들은 두뇌 안에 조각조각으로 흩어져서 웅크리고 있지. 가만히 내버려두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한 불완전하다. 필요할 때 꺼내어서 조각을 맞추면, 즉, 기억을 하면 본래의 상(像)대로가 아니라 어딘가 이가 빠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 빈 부분을 정황과 표준에 근거하여 복원하는데, 이 과정에서 오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왜곡된 기억이 바로 그 산물이지. 이것이 일반적인 기억의 속성이다. 알겠느냐?”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광억은 아까부터 계속 지극히 추상적인 현상을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어린 양유에게는 전달력이 무척 떨어졌다.
그런데 양유에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기 전의 기억이다.
몇몇 심상(心象)이 머리속에 펼쳐졌다.
병들어 죽기 이전, 아직 생기가 있던 어머니가 활짝 웃는 모습, 술에 취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 저수지에 빠져 죽기 전, 그리고 아직 어머니도 살아 있을 무렵의 아버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
이런 것들이 양유의 과거를 증명하는 자료로 남아 있었다.
이 기억들은 한없이 포근하고 다정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양유는 추억에 잠기기 보다는 광억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광억 말대로이지 않는가?
사실, 아버지는 폭압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도 항상 골골거리느라 제대로 웃지를 않았다.
기억대로의 일이 진짜 있었는지 확신이 안 섰다.
“알겠어요.”
광억은 양유를 보며 과연 네가 알겠는가 확신 못하겠다는 듯, 어쩌면 의심하는 듯도 했으나 계속 말했다.
“하지만 기록기억은 기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다. 심상공간(心象空間), 즉 머리속에 백지를 떠올려 보아라.”
그대로 했다.
광억은 잡괘전을 펼쳐 양유의 면전에 들이대었다.
“첫 글자부터 하나씩 그 백지 위에 써라.”
건강곤유(乾剛坤柔), 비락사우(比樂師憂).
수월하게 새겨 나가던 양유는 다음 글자를 쓰려는데 건강곤유가 백지 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다.
집중하자 건강곤유의 네 글자는 다시 백지의 첫머리에 나타났으나 이번에는 비락사우가 지워졌다.
‘건강곤유 비락사우, 건강곤유 비락사우…….’
건강곤유를 생각하면 비락사우가 잊혀지고 비락사우를 떠올리면 건강곤유가 증발했다.
그래서 양유는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같은 건강곤유 중에서도 건과 강은 어쩐지 색이 바랜 것 같았고 흐릿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백사(白沙) 위에 물을 뿌린 것과 같았다.
얼마간은 증발해 버리고 대부분은 모래에 흡수되서 물자국은 곧 사라져 버린다.
양유는 포기하고 잡괘전을 밀어냈다.
“안 되는데요.”
광억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안 되지. 아무나 할 수 있다면 내가 뭣하러 가르치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광억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어쩐지 야비한 듯 보였다.
지금껏 양유를 바라보는 광억의 눈은 냉혹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하지도 않았고 항상 단호했다.
그 엄격성의 휘장을 걷어내도 뒤에 수줍은 듯한 정(情)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원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싸늘한 스승 정도로는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런 표정은 지금까지의 광억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었다.
곧, 광억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우선 너는 네 심상공간의 성질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흐릿한 추상 공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구체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렁한 두부에 무엇을 기록할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눌린 자국밖에는 안 남는다. 그러니 딱딱한 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새길지는 이것이 이루어진 후의 문제이다.”
이게 도움이 되는 가르침인가?
양유는 여전히 어떻게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다.
“물론 말로만 들어서는 감이 안 잡히겠지.”
따라오며 광억이 나가자 양유는 뒤를 졸졸 쫓았다.
어디 좋은 데라도 데려가나 했더니 스승은 산 깊숙히로 가는 것이었다.
제자를 배려해서인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날아다닌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느릿느릿 노인다운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양유를 기다려 주지도 않았다.
경사가 점점 심해져 헥헥 따르는데 광억은 땀 한 방울, 거친 호흡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숨이 가빠질 대로 가빠져 거의 토하기 직전, 광억이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가자.”
양유는 자기가 어디 와 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드니 검은 공동(空洞)이 있었다.
“동굴? 여긴 왜요?”
광억은 말없이 양유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양유도 모험심이란 게 있는지라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동혈 안은 당연히도 캄캄했다.
태양빛은 입구 언저리만 때렸고 조금 더 들어가자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광억이 손잡고 놓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남겨지면 십중팔구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양유가 불안해져 물었다.
“여기 지리를 아시는 거죠?”
“알다마다.”
그러면서 광억이 손을 놓았다.
“내 옷자락을 잡아라.”
양유는 자기 손에 땀이 차서 싫은가 싶어서 아랫도리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잡았느냐?”
“네.”
사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몇 번을 꺾어 들어가니 광장 지형이 나타났다.
양유의 눈에 그것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탁 트인 공기가 느껴져서 소리를 질러 보았다.
“야아아!”
야아아아아……….
음파(音波)는 동굴 천장에 부딪혔다가 넓게 퍼져 나갔다.
소리가 튕겨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과 흩어지는 양상을 보건대, 여기는 상당히 높고 넓은 공간일 거라고 양유는 짐작했다.
“산 속에 이렇게 큰 구멍이 있는데 용케 안 무너지네요.”
광억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님?”
여전히 묵묵부답.
양유는 자기 손끝이 허전해진 것을 느꼈다.
잡고 있던 광억 옷자락의 감촉이 없어진 것이다.
“사부님? 뭐예요?”
양유는 양팔을 마구 휘저었으나 손에 닿는 것이라고는 허공뿐이었다.
“이거 장난하는 거죠?”
크게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자신이 했던 말의 반향뿐이었다.
어린애 특유의 높고 연약한, 그리고 떨림 섞인 목소리만이 대공동의 적막을 가로질렀다.
스승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양유는 곰곰히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고심해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광억의 행사(行事)들을 보자.
이해 가는 것보다 영문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았다.
이것도 그런 맥락 중 하나이리라.
‘설마 여기 영영 버려 두겠어?’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장난이 아니다.
나직한 광억의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육성(肉聲)과는 달리 이것은 대상자의 청신경에 곧장 꽂아 넣는 전음성(傳音聲)이었다.
“계셨군요!”
양유는 전음을 처음 들었기에 광억이 옆에 있는 줄 알고 주위를 더듬었다.
당연히 헛손질이었다.
-네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 있는데요?”
-네가 보이는 곳에.
“제가 보여요?”
-보이지는 않지. 빛 한 점 없는데 어떻게 보겠느냐.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 쳐요. 그건 그렇고, 저를 여기다 팽개쳐 놓고 멀리서 보고 있는 이유는 뭔데요?”
어딘가에서 한숨 소리가 났다.
“스승님!”
양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광억을 잡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