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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6화)
2장 무공은 언제 배우지? (4)
-괜히 말을 받아줬구나.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서 끝이다. 지금부터 할 것은 구체적 심상공간의 확립을 위한 훈련이다. 이보다 실천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이렇게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뭘 하겠다는 것일까?
양유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겁도 나지 않아서 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날아와 어깨를 때렸다.
“아야!”
양유는 벌떡 일어나며 맞은 곳을 비볐다.
주먹에 격타당하기라도 한 듯이 묵직하게 아팠다.
“누구야!”
휘익!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복부에 들어와 박혔다.
내장에 느껴지는 충격에 양유는 배를 움켜잡고 모로 쓰러졌다.
의문의 구타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등을 보이고 있으니 알겠다는 듯 양유의 등짝에 한 방, 두 방 내리꽂혔다.
“누구냐고!”
양유는 아파서 숨이 막히는데도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런데 누구긴 누구겠는가?
여기 같이 온 사람이 또 있지 않았으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사부님이죠? 대체 왜 때려요?”
되돌아오는 것은 휙휙 하는 소리뿐.
그리고 어김없이 신체 한 부위를 강타했다.
양유는 맞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고통을 견디며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이 이상한 주먹은 귀신같이 따라와 양유를 후려갈겼다.
“진짜 왜 이래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
양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밥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열심히 머리 굴리며 하라는 거 다 했는데 왜?
-잘못?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흘린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뭐라고 하건 난 지풍을 계속 날릴 것이다. 맞기 싫으면 도망만 치지 말고 피하거라.
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풍이 날아왔다.
양유는 그저 뛰고 또 뛰었다.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그놈의 지풍인지 뭔지가 너무나 아파서 조심성 같은 것은 개한테나 줘 버렸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은가 보구나.
휘휘휘휙!
무려 네 발이 연속으로 발출되었다.
양유는 끔찍함을 느끼며 한 대라도 덜 맞아 보려고 곡선적(曲線的)으로 달렸다.
그러나 광억의 수법은 절묘해서 지풍은 눈이라도 달린 듯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쫓아와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곳은 바로 양유의 목, 왼팔, 오른쪽 허벅지, 엉덩이였다.
“으에에에엑!”
양유는 중심을 잃고 나자빠졌다.
무릎이 몹시 쓰라려 손을 대보니 끈적한 피가 느껴졌다.
양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부면 다야? 맞고 피 흘릴 거면 거지질이나 하고 있지 왜 당신을 따라왔겠어?”
당금(當今)의 황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죽은 지 오래되어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해봐야 아무 감흥이 없는 양유이지만, 당신이라는 말은 너무 심했다 싶었다. 그래서 우물우물 말을 바꿨다.
“아니, 제 말은 왜 스승님을 따라왔겠냐고요.”
그러면서 보이지도 않는 광억의 눈치를 보는데, 스승은 제자의 하극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지 하던 일만 계속했다.
이번에 날아온 지풍은 양유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갈비뼈 열두 줄이 다 얼얼했다.
그래도 네 방을 맞았을 때보다는 덜 아팠다.
‘어차피 맞을 거면 이대로 서 있는 게 낫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가만히 서서 맞느니 피하려는 시도라도 해 보는 게 현명한 것 같았다.
양유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지풍이 다가온다.
이 공간에서는 감각기관이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청력만이 쓸모가 있었다.
지풍이 언제 오는지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양유는 더 나아가 소리를 읽어 어디서 쏘아지는지, 그리고 어디에 도착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다리다!’
양유는 한쪽 다리를 접으며 옆으로 깡충 뛰었다.
그러나 다리가 아니라 어깨였다.
재수 없게도 빗장뼈에 맞아 욱신욱신 쓰렸다.
다시 휙!
‘몸통!’
잽싸게 앉았다.
이번에도 틀렸다.
지풍은 양유의 턱을 때렸다.
원래 허리 높이였는데 괜히 앉는 바람에 엄한 곳에 맞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 너무 아파서 눈물이 왈칵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피하고 이제 만족하냐고 묻고 싶었다.
아래 꺼풀에 괸 눈물을 닦으며 양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막상,
휙!
“아야!”
쉭!
“으악!”
여기는 평소 천장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만 나는데, 지풍음과 뒤이은 양유의 신음, 내지르는 아픈 고함이 규칙적으로 그것을 가리고 있었다.
연이은 지풍 중에서 양유는 두 번을 피했으나 어쩌다 지풍의 경로에서 벗어난 것이었지 제대로 방향을 읽어 내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맞은 것은 열 방도 넘었다.
결국은 청각도 마찬가지로 쓸모없음이었다.
지풍 소리는 희미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알기 어려웠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앗 하는 사이에 몸에 박히니 소용이 없었다.
다음 지풍이 쏘아졌는데, 양유는 이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뛰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느냐.
지풍이 다발로 쏟아졌다.
여태까지 발출된 것보다 지금 쏘아진 지풍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양유는 끔찍해서 마구 달리는데, 발을 헛디뎌 또 넘어졌다.
그 위로 지풍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팡팡팡팡!
신명 나는 격타음이 퍼졌다.
타격감이 좋아서 광억도 지풍 날릴 맛이 날 것이었다.
힘 조절을 했는지 하나하나가 이전 것보다는 약했지만 그래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양유는 괴로우면서도 뒤이어 닥칠 더 큰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겨우겨우 일어나 앞으로 갔다.
그런데 뻗은 손에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동굴 벽이었다.
양유에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벽은 곧 길이다.
이 벽을 따라가다 보면 출구가 나올 것이다.
이상한 곳에 접어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지풍 지옥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양유는 벽에 손끝을 대고 죽어라 달렸다.
양유의 생각은 맞다.
이 방식은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선책이었다.
벽을 따라 돌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나오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지풍 연타가 끊겼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우레와도 같은 굉음이 동굴 전체를 울렸다.
그그그그긍…….
양유는 깜짝 놀라 멈춰 엎드리고 귀를 막았다.
손 틈새로 광억의 전음이 전해졌다.
-잔머리는 쓸만하다만, 출구를 막았기 때문에 이제는 못 쓰겠구나.
과연 광억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뭐라고요? 대체 왜요?”
-왜긴, 그렇게 맞았는데도 넌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난 지금 스승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데 넌 그저 내뺄 생각만 하고 있다. 무림인의 제자가 놀고먹는 자리인 줄로만 알고 있다면 넌 그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아프고 힘들고 화나고 짜증 나고 아무튼 죽겠는데 이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양유는 의심이 많았고 또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빼기 위해 계속 달렸다.
그러나 일각, 이각을 뱅뱅 돌아도 뚫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양유는 기가 빠져 털썩 주저앉았으나 광억은 그렇다고 봐주지 않았다.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그럼 다시 간다.
이윽고 제이차(第二次) 지풍 찜질이 시작되었다.
양유의 비명이 공동을 오래오래 수놓았다.
눅신하게 얻어맞다가 어느새 혼절한 모양이었다.
그럴 수도 있고 광억이 지풍질을 그만두자 드는 안도감과 또 지풍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이런 것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와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지듯 잠들었을 수도 있다.
양유는 무엇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의식을 잃기 바로 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이상한 점을 못 느꼈는데, 정신이 또렷해지자 따스한 손길이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수옥의 목소리였다.
“수옥, 수옥이군요!”
양유는 수옥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담겨 있던 설움과 억울함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양유는 광억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과장 보태서 일러바쳤다.
제자를 개처럼 두들겨 패는 스승이 어디 있느냐.
무림인이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 폭력적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가 심하다.
광억은 자신을 이런 암흑 속에 던져 놓고 요상한 무공으로 괴롭히면서 가지고 놀았다고 했다.
광억이 한 짓은 훈육도 훈련도 아니고 제자 학대일 뿐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수옥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말했다.
“그랬군요…….”
양유는 수옥이 자기와 함께 분개하며 치를 떨어줄 줄 알았는데 그저 이렇게 대답하자 배신감을 느꼈다.
“수옥도 알고 있었군요!”
“아니, 아니에요. 저에게는 아무 말씀 없으셨던걸요. 하지만 놀랍지도 않아요.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제가 알았다 하더라도 무슨 수로 어르신의 뜻을 꺾을 수 있겠어요…….”
예의 그 처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양유는 이 어둠 속에서도 수옥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처음 봤을 때의 알 수 없는 애달픔이 보일 듯 말 듯 머물고 있으리라.
그런 사람에게 무슨 추궁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양유는 같이 광억 씹을 생각을 버리고 여기는 왜 왔느냐고 물었다.
“아, 내 정신 좀 봐요.”
수옥은 유등(油燈)의 불을 당겼다.
노란 불빛이 어둠을 약간 밀어냈다.
흐릿한 광원 아래 수옥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수옥은 양유의 몸 상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드러난 살갗만 봐도 멍으로 뒤범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