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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7화)
2장 무공은 언제 배우지? (5)
“옷을 벗어요.”
머뭇머뭇하자 수옥이 대신 양유 겉저고리를 풀어 헤쳤다.
왜소한 가슴과 복부에도 피하출혈(皮下出血)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수옥은 가져온 보(褓)에서 작은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퍼지자 양유는 코를 막았다.
“뭐기에 그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요?”
“이건 용혈고(龍血膏)라고 해요. 어르신께서 만든 외상약인데, 이름이 좀 터무니없죠? 하지만 효과는 확실해요.”
수옥은 손가락으로 떠서 타박상 부위에 얇게 펴 발라 주었다.
부위라고 해도 사실상 전신이나 마찬가지었다.
양유의 온몸은 곧 검은 연고로 뒤덮여서 남해(南海)에서나 볼 수 있는 곤륜노(崑崙奴)처럼 보였다.
“까마귀 같아요.”
냄새, 그리고 훅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양유가 있는 대로 찡그리고 있자 수옥이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수옥은 싸온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음식 냄새를 맡자 억눌렸던 허기가 몰려왔다.
양유는 자기가 거지였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고 얼른 내쫓아 버리려고 열심히 먹었다.
삽시간에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수옥은 정리해 보를 싸매고는 말했다.
“가요? 절 여기 남겨두고요?”
수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말이 없다가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야 한다고 했다.
양유는 여기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은데 수옥마저 가 버린다면 어떻게 하냐고 최대한 불쌍한 음색으로 말했다.
물론 자신도 수옥이 계속 같이 있어 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어차피 지금은 광억의 구타도 멈췄고 집에 돌아갔다 내일 다시 오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여기는 너무 춥고 어둡고 쓸쓸하다.
수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그럴 수는 없다.”
광억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유는 깜짝 놀랐다.
설마 지금까지 모른 척 숨 죽이며 자기 얘기를 다 듣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광억은 역시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양유는 광억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물었다.
“왜요? 절 여기 처박아 둬야 속이 시원한가요?”
“온종일 깨달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광억은 실망한 듯했다.
“내 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수련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이다. 이 공동은 심상공간을 구체화함에 있어 최적의 장소이다. 네 심상공간이 명료하지 못하듯이 이곳은 어둡기 그지없다. 이런 동일성(同一性)은 일체화(一體化)의 가능성을 높인다. 난 그것을 깨 가면서 훈련시키는 비효율적인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양유는 반박할 말을 생각해 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네 심상으로 불을 밝혀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그러면서 돌아섰다.
수옥도 광억의 뒤를 따랐다.
양유는 더 떼를 쓰고픈 마음이 있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고 광억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모습, 이런 것을 생각하면 자존심도 상해서 앉은 채로 그들을 보냈다.
무심한 불빛이 사라지고 동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양유는 수옥이 주고 간 모포를 두르고 잠을 청했다.
아직 잠이 오기 전에 지금까지 광억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용혈고의 효과는 뛰어났다.
자고 일어나니 통증이 다 사라져 있었고 이상하게 활력마저 돌았다.
양유는 몸 이곳저곳을 눌러 보았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고약 딱지를 긁어 내고 더 세게 압박해도 피부 아래에서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것 참 신통하다.”
감탄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양유는 용혈고 딱지를 하나하나 다 떼서 발치에 쌓았다.
꽤 쌓여서 만지면 수북했다.
양유는 뿌듯함을 느끼고 몸에 용혈고 더 안 붙어 있나 탐색했다.
그런데,
-정말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군. 휴식은 여기까지다. 다시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광억의 전음이 지풍 난타의 시작을 알렸다.
일어나기도 전에 끔찍스런 지풍음이 들렸다.
양유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지풍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정도면 피한 거라고 봐야겠죠?”
양유는 득의해서 외쳤다.
그러느라 다음 지풍의 방출을 놓치고 말았다.
지풍이 양유의 왼팔에 날아와 부딪혔다.
그런데 이상했다.
별로 아프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신경 쓰느라 다음 지풍도 피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맞은 것을 보면, 신경 쓰지 않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텐데, 아무튼 양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또 맞고 알 수 있었던 것,
이제는 지풍이 견딜 만하다!
그래서 양유는 오는 족족 대충 회피 시늉만 하고 관대히 맞아 주었다.
광억이 전음으로 뜻을 보냈다.
-그것은 용혈고의 작용 덕이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수옥에게 주었는데, 모를 줄 알았더냐?
샥!
“앗, 따가워!”
양유는 지풍이 찌르고 간 자리를 미친 듯이 문질렀다.
지풍의 성질이 달라졌다.
먼저 것은 권(拳)과 같았다면 이번 것은 날카로운 침(鍼) 같았다.
오늘 양유의 몸을 차지한 것은 타박상 대신 자상(刺傷)이었다.
하루 내내 찔렸고 거의 만신창이가 되자 수옥이 와서 용혈고를 발라 주었다.
양유는 이미 용혈고의 효능을 알았으니 이 병 주고 약 주는 체계의 완벽성을 깨닫고 암담해졌다.
어둠 속의 고독, 예정된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고문과도 같은 것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음 날, 그래서 양유는 처음으로 광억의 지풍놀이에 진심으로 어울렸다.
오늘의 지풍은 조(爪)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양유의 가슴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열상(裂傷) 투성이가 되면서 알게 된 것은, 광억이 이런 짓을 시키는 의도였다.
광억이 요구하는 것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응 속도나 지풍의 경로를 파악하는 기감(氣感)이 아니었다.
스승이 노망이 났을 리 없다고 가정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광억이 그토록 말하던 기억, 심상공간, 이런 것들이 열쇠였다.
지풍을 피하는데 기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공간에서 광억이 날려대는 지풍을 피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광억의 공격은 어떤 경향성을 띄고 있기에 그랬다.
양유는 그것을 등에 흐르는 피를 느꼈을 때 같이 알아차렸다.
광억은 사흘 내내 양유를 때리고 찌르고 할퀴며 좀 알아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양유의 움직임은 무척 기민해진 듯했다.
당장은 여전히 지풍에 얻어 터졌으나 날이 갈수록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어디로 날아올지 아는 경우, 지풍음이 들리면 바로 반응하여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했다.
물론, 광억이 딱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계속 먹히지는 않았다.
광억은 점차로 복잡한 변화를 내포시켰다.
지풍의 발출 양상은 갈수록 새로워져서 일일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피했다 싶은데도 어느새 꺾어 들어와 목을 휘감았고 갑작스레 나뉘어져 양유를 황당하게 하기도 했다.
스승은 이제는 단순히 지풍의 성질을 변형시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공(指功) 절학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용혈고로 인해 양유의 피부가 경력을 견딜 정도가 되서였다.
그래도 피륙이 무슨 철판이 된 것은 아니라서 스치기만 해도 뻘건 줄이 그어졌다.
여기서 양유는 한 차례의 좌절을 겪었다.
도무지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광억의 전음이 도착했다.
-심상공간을 활용해라. 각각의 유형을 시각화하여 뇌리(腦裏)에 보관해라. 그것을 온전히 심상공간 내에서 펼쳐 낼 수 있을 때, 이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무형의 기운을 어떻게 시각화한단 말인가?
그것도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양유는 처음에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으나 홀로 되자 생각에 빠졌다.
지난 수일간의 경험으로 양유의 정신은 벼려질 대로 벼려져서 무척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광억이 보인 지력(指力)의 변화무쌍함을 머릿속에서 재현해 보았다.
심상공간이 곧 공동이 되고 그 안에서 가상의 지력이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며칠 동안 양유는 지력과 몸을 부딪히며 심상공간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또 며칠이 흐르니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지풍이 어떻게 찾아올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양유가 거의 모든 변화 양상을 극복할 수 있게 되자 광억은 점점 한 번에 발하는 지력 줄기의 수를 늘려 갔고 양유는 맞으면서 회피율을 높여 갔다.
이제는 한 번 보인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광억이 만들어 낸 공동을 가득 메운 경력의 파도가 양유를 쓸어내려고 맹렬히 덮쳐 들었고 지력이 다 지나간 후에도 양유가 멀쩡히 서 있게 되자 동굴 수련은 끝이 났다.
“이 정도면 그릇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너는 심상공간을 뚜렷이 너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야 진정한 내 제자다.”
광억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제는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입동(入洞)한 지 열나흘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