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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8화)
3장 습득저장(習得貯藏) (1)


광억이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며칠 쉬게 내버려 두었다.
그동안 양유는 먹고 놀기 만했다.
여기는 뭐 아무것도 없고 같이 놀아 줄 사람도 없었으나 전혀 지겹지 않았다.
동굴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기에 하루 밤낮은 무척 짧았다.
출동(出洞) 사흘 뒤, 광억은 다시 양유의 생활에 간섭했다.
새벽녘, 양유는 그간 방탕하게 지내서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신 눈을 비볐다.
광억이 말했다.
“네가 생각하기에 무공(武功)이란 무엇인 것 같으냐?”
방금 일어난 애한테 물을 질문은 아니었으나 양유는 아무렇게나 답했다.
“힘 세지고 남들 잘 팰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요.”
놀랍게도 광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혹자는 무공을 통해 신검합일(身劍合一)를 이루고 더 나아가 천인합일(天人合一)하여 도를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무공은 자기수양과 자아완성의 수단이라고도 한다. 이는 모두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이다. 득도(得道)하려면 벽만 쳐다보고 경전을 암송해야 할 것이고 수양을 하려면 학문을 공부하면 될 일이지 왜 검을 휘두른단 말이냐?”
이것이 광억의 지론인 모양이었다.
“무공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 보조 수단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무공에는 유불도(儒佛道)의 심오한 사상이 녹아들어 있으며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 목적이 그런 형이상학적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공은 철저히 육체적이고 현실 지향적이어야 한다.”
광억은 벽에 손가락 두 개를 푹 집어넣었다.
흙벽이지만 균일하게 잘 굳어 있어서 쉽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스승은 맞붙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벽의 일부분을 한 웅큼 떼어냈다.
광억은 그 덩어리를 공중에 던지고는 그저 노려보았다.
팟!
분명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산산히 흩어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보았느냐?”
“터지는 건 봤죠.”
“그래, 이것이 현실이다. 내가 발한 경력이 중심부를 관통해 흙 알갱이 간의 결합을 끊어 놓든 다른 수를 써서, 이를테면 여러 가닥의 경력으로 난도질해서 부숴 놓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흙덩어리가 터졌다는 사실만이 의미가 있다. 넌 이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양유는 알겠다고 했다.
역시 스승이 하는 말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광억이 물었다.
“내가 갑자기 이런 화두를 던진 이유를 알겠느냐?”
“이제 무공을 가르쳐 주시려고요?”
“그렇다.”
드디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광억의 제자가 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간다.
그런데 배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양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광억을 보면 인간 같지가 않은 게 분명 무림인은 맞는데 왜 이상한 짓만 시키는 것일까?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이제는 그런 고민을 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광억은 책을 한 권 꺼내 양유에게 주었다.

백위신공(白暐神功)

“네 무공의 바탕이 될 내공심법이다.”
묵향(墨香)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양유는 책을 펼쳐 보았다.
아는 글자가 더 많았지만 모르는 것도 있었다.
“이것도 수옥한테 배워요? 토룡(土龍)들이 좀 꾸물거리는데요.”
“아니, 이제부터는 내가 가르친다.”
양유는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광억보다야 수옥에게 배우는 것이 더 좋은데.
하루 동안 광억에게서 백위신공의 모르는 글자를 배웠다.
다음 날은 내용을 풀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었다.
광억이 백위신공을 강독하며 강조한 것이 있었다.
“나아갈 방향을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좋은 무공이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인지 뭔지를 한다고 비결(祕訣)을 모호한 비유로 숨겨 놓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합당한 자에게도 부전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한 무림에 뇌전검(雷電劍)이라는 검법이 있다. 언제 한 번 비급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성취가 극성에 이르면 검이 한 줄기 뇌전이 된다고 쓰여 있었다. 이런 것은 그저 허울 좋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런 구절이 도대체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말이냐? 앞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을 보게 된다면 바로 내쳐 버려라.”
백위신공에는 그런 광억의 무공 철학이 녹아 있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없어서 활용법은 전혀 몰라도 무슨 말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웬만큼 알 건 다 알았다고 판단했는지 광억은 이제는 백위신공을 몸으로 익힐 때라고 했다.
새벽에 쳐들어와서 그런 소리를 하며 양유에게 사발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영약 달인 물이다. 어서 마셔라.”
양유는 졸린 눈으로 광억이 입에 대 주는 대로 꿀꺽꿀꺽 삼켰다.
“엑, 써.”
정말 맛이 없었다.
없다 못해 고통스러운 맛과 향이었다.
양유는 스승이 새로 개발한 잠 깨우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했다.
“맛이 뭐 이래요?”
양유는 온갖 인상을 다 쓰며 푸푸 침을 튀겼다.
이 반응에는 광억도 기가 찼다.
“백 년은 못되도 족히 삼십 년은 묵은 하수오(何首烏)와 음기를 충분히 머금은 석균(石菌)을 배합해 만든 특제 영약이다. 너처럼 죽을상을 하고 먹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게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걸 어떡해요. 그런데 이건 왜 먹은 거죠?”
“백위신공은 천하에서 가장 독특한 내공심법이다.”
어제도 광억은 그런 말을 했었다.
평소에는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라 모든 것과 화합하며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폭염(暴炎)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으며 차갑게 식을 수도 있다. 유연하면서도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정명하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내공을 모으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느리다. 모든 편벽된 기운을 걸러 내고 남은 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화(和)보다 불화(不和)가 많고 포근할 때보다 춥고 더울 때가 더 많으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 점을 영약을 통해 보완하겠다는 것이었다.
곧, 약의 효능이 나타났다.
속 깊은 곳에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부님, 배가 이상해요.”
“정좌하고 눈을 감아라.”
광억은 양유의 등에 장심을 댔다.
“내가 기운을 인도할 테니 백위신공의 내용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하수오의 양기, 석균의 음기가 조화를 이루어 은은한 열기를 발하고 있었다.
광억은 그것을 끌어 양유의 기맥 위를 타고 흐르게 했다.
내기를 수레라고 한다면 기맥은 그것이 다니는 도로와도 같다.
양유의 기맥은 협소하고 험해서 도로는 당연히 못되고 거의 산길 수준이었다.
그래서 광억이 이끈 영약의 기운은 힘겹게 소주천을 마치고 백위신공의 내공이 되어 양유의 단전으로 들어갔는데, 그 양이 고작 눈물 방울만 했다.
영약 기운이 다하자 광억은 손을 뗐다.
양유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경탄하며 물었다.
“이게 내공이라는 건가요?”
미약하게나마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이는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고 기분 좋고 따뜻했다.
좁쌀만 한 양인데도 이런데 조금만 더 익히면 어떻게 될까?
양유는 지난날이 생각났다.
이것을 예전에도 알았더라면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돌더라도 조금은 덜 서러웠을 것이다.
“그렇다. 앞으로 매일 아침 영약을 먹일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 즉시 약력(藥力)을 온전히 내공화(內功化)시켜야 한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다 했으니 다시 자도 되죠?”
“내공심법만 무공인 줄 아느냐? 이 말고도 가르칠 것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네가 해야 할 과정이 한 단계 더 있다.”
광억은 잡괘전을 외울 당시 자기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대충은요. 기록기억이 뭐 어쩌고 하다가 갑자기 동굴에 데려갔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건 다 뭐였어요?”
이제 와 생각하니 그토록 지독한 나날을 겪었는데, 얻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성취감 같은 것이 있기는 했다.
지력의 해일이 몰아치는데도 심상공간에 새겨놓은 상(像)을 지도 삼아 여유롭게 생로(生路)만을 밟으며 끝까지 버텨 낸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단전에 머물고 있는 내공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가?
광억이 말했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만 알아두어라. 동굴 수련을 마치지 못했다면 백위신공을 전수하는 일은 없었을 게다.”
광억은 심상공간의 확립과 기록기억, 그것이 습득저장을 가능케 하고 습득저장은 자기 무공교수(武功敎授)법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습득저장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광억은 양유를 산 중턱에 있는 계곡으로 데려갔다.
또 어디다 가둬 놓는 것이 아닌가 오기까지는 어쩐지 불길했는데 졸졸 흐르는 계곡물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주변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광억은 마른 바위를 골라 그 위에 섰다.
“보통의 기억은 이와 같다.”
광억이 손을 뻗자 계곡물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그것은 광억에게로 다가오더니 발치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 바위를 두뇌라 한다면, 물 묻은 것은 기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 잊히듯이 조금만 지나면 이것들도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광억은 바위에서 내려왔다.
곡류(曲流) 일부가 중력을 거슬러 공중으로 역류하더니 바위 위에 쏴아 하고 쏟아졌다.
바위는 물에 흠뻑 젖었다.
“이렇게 다른 기억에 덮여서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명확함은 사라지고 뭉뚱그려진다.”
양유는 그것보다 광억이 보이는 기예에 감탄하고 있었다.
무림인들이라는 존재가 다 이런가?
도무지 인간 같지가 않다.
“하지만, 기록기억은 그렇지 않다.”
광억은 바위에 글을 새겼다.
무슨 칼을 가지고 와서 긋는 것도 아니고 손톱으로 그러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손톱이 아니라 바위가 상처를 입으며 글자가 쓰여졌다.

俠 客 不 忘 怨

협객불망원.
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양유는 그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멋있는 말이긴 한데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저렇게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좀 속이 좁은 것 같다고 말했다.
광억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양유를 노려보았다.
양유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뭐야, 자기 얘긴가?’
광억은 양유를 닥치게 한 뒤, 자기도 그러고 있더니 드디어 침묵을 깼다.
“봐라.”
바위에 물이 또 쏟아져 내렸다.
협객불망원은 당연히도 선명히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