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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9화)
3장 습득저장(習得貯藏) (2)


“이것이 기록기억이다. 심상공간에 기록된 기억은 어떤 다른 기억이 밀려들어 온다 해도 순수성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것이다. 매일 백위신공을 수련한 다음, 그 내용을 머릿속에 글자 그대로 기록하여라. 동굴의 훈련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 네 심상공간은 이제 이 바위처럼 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 습득저장인지 그건 뭔가요?”
“습득저장은 기록기억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멀쩡히 책이 있는데 머리에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책을 펼쳐 보면 다 쓰여 있는 것 아닌가. 그 생각은 틀렸다. 고작 그런 차원의 정신기능이 아니다. 너는 돈오(頓悟)라는 것을 아느냐?”
“아뇨.”
“이는 일거에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섬광과도 같이 문득 철리(哲理)를 이해하는 것이다. 불가의 개념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능히 적용할 수 있다. 무공에서도 돈오가 필요하다. 경지가 깊어질수록 성취는 더뎌지며 급기야는 벽에 막혀 답보 상태가 되기도 하는데, 돈오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
광억은 계속 말했다.
“돈오는 인간 정신의 불가해한 작용이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벽, 그것은 기억의 불완전함 때문에 생긴다. 몰이해와 오해, 그것들은 고쳐질 여지도 없이 뒤엉켜서 뇌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곧, 쌓여 벽이 된다. 나중에야 문제를 발견하고 끙끙거리는데, 근본부터가 잘못되어 있으니 쉽게 극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오랜 시간을 들여 궁구하다 보면 돈오가 찾아오고 모든 잘못된 기억이 고쳐지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래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뭔데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거의 의무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모두 깨달음을 관장하는 뇌, 각뇌(覺腦)를 가지고 있다. 뇌의 특정 부위가 그것을 관장하는지 전체적인 뇌 활동의 부산물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인지하지는 못해도 뇌는 고도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하물며 불완전한 기억도 결국은 각뇌를 자극하는데, 기록기억은 어떻겠느냐? 오해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기억, 심상공간 속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그것은 각뇌와 항상 맞닿아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깨달음의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각뇌가 작동하기를 편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보관과 깨달음, 두 기능을 모두 하는 기억 방식을 습득저장이라 부르기로 했다.”
광억의 장광설은 여기서 끝이 났다.
양유는 광억의 말을 음미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스승님 말씀은, 제가 무공을 수련하면서 그런 귀찮은 짓도 병행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죠?”
“벽에 갇혀서 머리를 쥐어뜯은 다음 후회하지 말고 꼬박꼬박 머리에 박아넣어라. 습득저장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니 숙달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한 해, 그리고 두 해가 흘렀다.
그간 양유의 일상은 무척 규칙적으로 돌아갔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광억이 내미는 영약탕을 마신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떠오르는 태양을 느끼며 백위신공을 연마한다.
영약의 기운을 다 흡수하면 정오가 좀 안 되었다.
분명 백위신공의 성취는 깊어지고 이해도도 높아갔는데, 연공 마치는 시기가 항상 비슷한 것을 보면 광억이 영약 함량을 점점 늘리는 모양이었다.
그다음은 백위신공을 습득저장하는 시간인데, 내공심법을 심상공간에 온전히 갈무리한지 이미 일 년이 넘어서 이제는 건너뛰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수옥이 차려 준 밥을 해치우고 나면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다.
적당한 공터에서 구구회류검(九九回流劍)을 펼치기 시작한다.
백위신공이 경지에 이르자 광억은 구구회류검과 경신법(輕身法)인 섬혼영(閃魂影)의 구결을 필사하여 주었다.
공세식(攻勢式) 구 초와 수세식(守勢式) 구 초를 연달아 전개하고, 공격을 이어 가거나 계속된 방어를 하거나 공세에서 수세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식의 초식 조합을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둑어둑해지면 방으로 돌아가 비급을 붙잡고 습득저장을 한다.
초기에는 광억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으나 양유가 무공에 재미를 느껴 정말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는 혼자 수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녁이 되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 광억도 유일하게 스승다운 역할을 하는데, 양유의 습득저장 현황을 점검하는 것이다.
광억이 갑작스레 묻고 양유는 반찬을 집어들다가도, 입에 밥을 물고 있더라도 그 즉시 대답해야 한다.
백위신공은 완벽하고 구구회류검과 섬혼영도 거의 각인되어 있었다.
광억이 말했다.
“오늘 보니 검이 꽤 날카롭더구나. 슬슬 실전을 겪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누구하고요? 사부님이요? 제자가 어찌 사부님께 검을 겨누겠습니까. 그건 안 될 말이죠.”
무공을 알면 알수록 광억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아직도 지난날 광억이 보였던 수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광억하고 무슨 실전을?
“넘겨짚지 마라. 언제 내가 상대해 주겠다고나 했느냐?”
“그럼 누구하고요?”
이 산에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산멧돼지하고라도 싸우라는 것일까?
광억은 옆을 돌아보았다.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수옥이 말했다.
“너무 이르지 않은가요?”
수옥은 양유는 아직 어린애인데 더 토대들 닦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광억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무공의 완성은 실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양유는 습득저장과 내공심법에만 매진했었고 그나마 요새 들어 검법과 경신법 등을 수련하고는 있으나 혼자 초식만을 전개해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유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용혈고를 바르면 된다.”
“…….”
이들의 대화를 듣고 양유가 말했다.
“설마 수옥하고 싸우라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할까? 지금 너는 수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수옥도 무림인이었단 말이에요?”
수옥이 대답했다.
“제가 무림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것은 사실이에요.”
양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수옥보다 키가 작기는 하나, 백위신공의 내공이 단전에 충만해지니 이제는 자신이 수옥을 지켜 줘야 할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관계 구도의 변화가 괜히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왜 저는 전혀 몰랐죠?”
“일상생활을 하는데 무공은 필요 없잖아요? 일부러 속인 건 아니었어요.”
양유의 허탈한 얼굴을 보고 수옥이 상처 입히는 일은 없게 하겠다며 안심시켜 주는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자기 마음도 모르고.

아침나절은 평소대로 백위신공을 연공하는 것으로 보냈다.
기맥을 타고 흐르는 내공에 집중하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해가 중천에 떴고 곧 수옥과 붙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수옥이 포권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하고 비무할 때는 이런 식으로 인사해야 해요. 백암산(白巖山)의 수옥이에요, 한 수 부탁해요.”
양유는 따라 했다.
광억이 멀찌감치에 있었는데, 좀 꼴사나운 듯이 보고 있었다.
양유는 검을 뽑고 구구회류검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그럼 가요.”
수옥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시하는 것인지 배려하는 것인지 그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갑자기 수옥의 신형(身形)이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수옥의 흰 손이 양유의 가슴을 노리고 파고들어 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띵! 하고 검과 손끝이 부딪혔는데, 수옥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고 양유는 뒤로 밀려났다.
다시 수옥이 팔을 들어 내려치려 했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본능적으로 검만 들어 가리려고 했다.
수옥은 멈춰 서 미안한 듯 말했다.
“제가 준비하기도 전에 공격한 건 아닌가요?”
양유는 고개를 저었다.
무공 싸움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사고가 정지되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갈게요.”
수옥이 움직이자마자 이번에는 곧장 구구회류검 수세식을 펼쳤다.
단전에서 내공이 돌고 익숙한 검초를 한 번 꺼내자 그다음에는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그러나 수옥의 공격이 매서워 연이어 수비적인 초식만 쓰게 되었다.
일 초부터 구 초까지 흐르고 한 바퀴 돌아 일 초를 펼치니 수옥은 양유의 허점을 모조리 알게 되어서 다시 펼치는 초식마다 와해시켰다.
검의 방어 범위를 파고들어 손끝이 목 옆을 스치게 하고 옷깃을 찢기도 했다.
수옥은 양유의 의복이 걸레짝이 된 것을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이걸 어째. 꿰매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어요.”
그리고 충고해 주었다.
“이미 한 번 보인 초식 그대로 또 펼친다는 것은 제 약점을 찔러 주세요 하고 상대에게 말하는 꼴이에요. 구구회류검의 장점을 살려 보세요.”
양유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공격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단조롭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일 초로 막았다가 다시 사 초로 막고 육 초로 막았다 거꾸로 이 초로 돌아가기도 했다.
단순히 초식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뿐 아니라 한 초식에 다른 어떤 초식이 뒤따라도 괜찮은 것이 구구회류검의 특징이었다.
하나의 초식은 여타 열일곱 초식을 고려하여 만들어졌고 다른 열일곱 초식도 마찬가지었다.
몇 개 안 되는 초식으로도 무수한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양유는 꽤 괜찮게 막게 되자 방어만 하는 것이 지겨워져 공세식으로 전환했다.
내공이 기맥을 타고 맹렬히 흘렀다.
지금껏 영약만 먹고 자라서 양유의 내공은 상당했고 검에 실린 기운도 막대했으나 수옥은 여유롭게 막았다.
화선수(華渲手)의 부드러움을 상대하기에 양유의 초식 운용은 너무 뻣뻣했다.
양유는 공세식으로 계속 때렸으나 수옥의 한 손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공격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아무 초식이나 쓰니까 흐름이 사라져 버리잖아요.”
양유는 약이 올라서 가장 패도적인 초식인 공세식 구 초 일합경혼(一合驚魂)을 펼쳤다.
무슨 대단한 절초가 아니라 그저 온 힘을 다해 상대의 목을 날리라는 단순무식한 초식이었다.
구구회류검 중에서 가장 구구회류검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수옥의 목을 벨 생각은 없었고 적당히 손과 부딪히게 하려 했다.
수옥은 막기만 해서는 될 게 아니라고 여겼는지 뒤로 뛰어 피했다.
양유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수옥이 또 충고해 주었다.
“그럴 때는 경신법과 함께 써야죠. 그저 내지를 뿐이라면 다 저처럼 피해 버릴 거예요.”
양유는 힘이 빠져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광억에게 물었다.
“이거 상대도 안 된 거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