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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0화)
3장 습득저장(習得貯藏) (3)


수옥과의 대련은 이제 양유의 일상이 되었다.
시간 배치는 점심을 먹은 뒤로.
며칠은 첫날처럼 거의 농락당하는 수준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양유의 반격은 점차로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수옥이 마음만 먹으면 거꾸러지기는 했지만 가끔 간담이 서늘한 공격을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확실히 광억 말대로 실전은 무공의 완성이었다.
광억은 머리로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했다.
걷거나 뛸 때, 보폭을 어느 정도로 벌릴 것인지 하체 근육에 얼마나 힘을 줄 것인지 등을 생각하면서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발이 나가는 것이다. 이를 체득이라 한다.
한 무공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지(知)가 무공에 대한 이해라면 행(行)이 바로 체득이다.
이 두 가지가 합일(合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강조한 것, 이해의 궁극이 습득저장이며 체득의 궁극은 바로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이다.
수옥과의 실전은 생사를 넘나들기는커녕 상처도 거의 입지 않으나 이것은 양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 백위신공과 구구회류검, 섬혼영은 각기 따로 노는 감이 있었다.
각각의 완성도는 낮지 않았으나 쟁투의 승패는 단순한 무공의 총합이 아니라 그것의 운용에 달린 것이다.
양유는 그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런 나날도 어느덧 한 달, 봄기운이 완연해지고 이곳저곳에 꽃이 만개했다.
양유는 오늘도 참패하고 혼자 남아 비무 양상을 곱씹으며 패인을 생각했다.
이번 판은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참으로 멍청한 수였다.
이대로라면 삼십삼 연패를 찍겠다고 판단, 타개할 수단으로 한 가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공이었다.
지난 이 년간 양유 체내에서 돌았던 영약 기운은 단전에 쌓여 막대한 내공이 되어 있었다.
백위신공의 특성상 걸러 버리는 것이 더 많으나 양유가 먹은 영약탕만 팔백 그릇이 넘는 것이다.
여기 소모된 설삼이니 하수오니 하는 것들을 모아서 붙이면 수령 삼십 년짜리 참나무만 한 영약나무가 하나 세워질지도 몰랐다.
그 거력으로 시종일관 밀어붙였는데, 잠깐 수옥을 몰아세우기는 했다.
그러나 수옥이 맞받아치지 않고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묘리를 발휘해 힘을 흘리기 시작하니 양유만 계속 내공을 쏟아붓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그래서 양유는 힘도 기술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렇게 창피하게 져 보기가 오랜만이라 가슴이 쓰렸다.
의욕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검을 들고 일어섰다.
짜증만 내면 내일 또 질 것이고 그러면 더 짜증이 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런데 막 양유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 저쪽에서 광억이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수옥도 아니고 모르는 남자였다.
거리가 꽤 있어 얼굴 형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중년 정도로는 보였다.
상황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광억이 누구를 데려온 적이 있었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그저 손님인데도 몹시 특별한 일로 비쳤다.
호기심이 생긴 양유는 두 사람이 어디로 가나 지켜보았다.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양유는 쪼르르 달려가서 방문 앞에 섰다.
두 사람의 음성이 희미하게나마 들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물론이다.”
“제가 말려 봐야 뜻을 꺾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를 끌어들이지는 마십시오. 전 싫습니다.”
“하지만, 넌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둘은 계속 옥신각신하는 듯했다.
양유는 귀를 좀 더 바짝 붙였다.
그러다 문득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넌 누구야?”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양유를 보고 있었다.
이 역시 비일상적인 일이라 양유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입고 있는 붉은 비단옷이 정말 잘 어울리는 인형 같은 소녀였다.
“누구냐니까? 내 말 안 들려?”
“난 양유인데.”
여자애는 흥 하고 웃으며 너 혹시 바보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곳에서 하는 역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이런 것이 의미가 있지 이름은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다.
자기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양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어 말했다.
“뭐 시종이나 그런 거겠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양유는 자기는 시종이 아니라고 하려 했으나 여자애의 연이은 질문에 입이 막혀 버렸다.
“그런데 왜 시종이 검을 차고 있어? 시종이 아니라 무슨 문지기 같은 거야? 웃긴다 진짜. 이 누추한 곳에 웬 문지기람?”
양유는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데에 슬슬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시종도 아니고 문지기도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당연히 네 현재 위치를 부정하고 싶겠지.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그건 그렇고 너 무공은 할 줄 아니?”
양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애가 외쳤다.
“그럼 나랑 비무하자!”
그러면서 갑자기 덤벼들었다.
조그만 발이 양유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
양유는 두 팔을 들어 앞을 가렸다.
갑작스럽게 내공을 끌어올린 것이라 진기가 덜 이어졌으나 발에 실린 힘이 그리 세지 않아서 아무 통증이 없었다.
그래도 소녀의 몸놀림만은 무척 날렵했다.
첫 공격이 막힌 뒤로 둥실 몸이 솟아오르며 번갈아 양발로 양유의 팔을 때려 댔다.
“어때 내 연환각이?”
마지막 발차기를 하며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착지했다.
양유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여자애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표정에는 고심의 흔적만이 있지 고통스러운 빛은 아예 없어서 소녀는 놀라는 모양이었다.
“뭐야 너 안 아파? 촌구석 문지기치고 제법인데?”
그 말을 듣고 양유는 마음을 정했다.
“그래, 하나도 안 아프다. 내가 한 번 막았으니 이제는 공격할 차례겠지?”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아니. 내가 굳이 너 같은 미천한 문지기하고 손속을 겨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소녀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다가 냅다 도망쳤다. 양유는 섬혼영을 써먹을 기회를 잡았다.
용천혈(湧泉穴)로 쏘아진 내공은 앞으로 뛰쳐나갈 반탄력을 제공하고 수축한 하체 근육과 결합한 내공은 함께 작용하여 엄청난 폭발력을 낸다.
양유는 곧장 따라잡고 여자애의 팔을 잡아챘다.
발버둥쳤으나 양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거 놔!”
양유는 순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비무를 하자고 해놓고는 자기만 때리고 튀는 건 네가 생각해도 비겁하지 않냐?”
“비겁하긴! 정체를 속인 네가 더 비겁해. 문지기 주제에 작은 오라버니보다 셀 수가 있어? 날 감쪽같이 속인 거야.”
양유는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했다.
우선 자기는 정체를 속인 적이 없으며 문지기라고 생각한 것은 너 혼자만의 착각이다.
그리고 다짜고짜 비무하자며 공격한 것도 너이고 공격이 통하지 않자 꽁무니를 뺀 것도 너이다.
이게 비겁하지 않다면 세상 모든 것이 공명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나 비겁해. 그러니까 이건 그만하자.”
뜻밖에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유는 아직 분이 덜 풀렸다.
“싫어. 난 비무를 계속하고 싶은걸.”
양유는 두 주먹을 말아쥐고 자세를 취했다.
여자애라서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저 꼬맹이 하는 짓이 괘씸했던 데다 무공 대결에서 이겨 보고도 싶었다.
“아, 아버님!”
갑자기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방에서 중년인이 나온 것이다.
소녀는 얼른 중년인의 뒤에 숨었다.
“아버님, 저 문지기가 저를 괴롭히지 뭐예요. 절 때리려고 주먹 쥐고 있는 것 봐요. 어서 혼내 주세요.”
아까와는 달리 중년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청수(淸秀)한 얼굴에 눈썹이 짙었다.
위엄이 절로 넘쳐 나왔다.
양유는 주눅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내리고 뒤에 숨겼다.
이래서야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은데, 중년인은 딸을 떼어내고 엄히 꾸짖었다.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양 사제(師弟)는 너에게는 사숙(師叔)뻘이 된다.”
중년인의 말에 소녀는 무척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가다듬고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렇지만 사숙이라고 저를 막 때려도 되는 건가요? 전 그저 문지기가 아니냐고 물었고 아니라길래 잘못 보아서 죄송하다고 했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앞서 말한 바와 배치되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면서 눈물 한 방울을 섞어 주니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
누구라도 양유를 탓할 것 같았다.
그러나 중년인은 소녀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왜 그러세요?”
“내가 널 하루 이틀 보았느냐? 그리고 내 안에서 다 듣고 있었다. 어떻게 나오나 보았는데 또 뻔히 들통 날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서 양 사제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거라.”
“뭘 사과한단 말이에요?”
“양 사제에게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점, 그리고 다짜고짜 공격한 것. 이는 사조(師祖)를 기멸(欺滅)한 것과 다름이 없다.”
중년인은 짐짓 목소리를 무겁게 깔며 겁을 주었다.
여자애는 하는 수 없이 양유에게 고개를 숙였다.
“양 사숙, 소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뭔가 더 말할 줄 알았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자기와 딸의 이름을 밝혔다.
자신은 군유현이라 하며 여자애는 군하경이라고 했다.
양유도 인사하며 양유라고 말했다.
군유현은 이미 아는 듯했고 군하경만 고개를 까딱거렸다.
통성명을 마치고 양유가 물었다.
“그런데 제가 사제라니 그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난 너의 사형(師兄)이다.”
양유는 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렇지만, 보기에 제 형 연배는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렇게 자식도 있고.”
그 말에 군유현은 이마를 짚었고 군하경이 핀잔을 주었다.
“멍청하긴, 넌 항렬도 모르니?”
“경아!”
군하경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