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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1화)
3장 습득저장(習得貯藏) (4)


“양 사제 말이 맞기도 하다. 우리는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지. 나도 스승님이 이제야 다시 제자를 둔 것에는 의아한 점이 많다. 양 사제는 이런 늙은 사형을 가지게 되었으니 불만이 많겠지. 하지만, 난 다시 어려진 것 같아 즐겁구나.”
그러면서 하하 웃었는데, 진짜 즐거워서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셋은 서로서로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침묵을 깨려고 군유현이 양유를 칭찬해 주었다.
“성취가 제법이더구나. 저 맹랑한 녀석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이니.”
“그렇죠, 뭐.”
그게 뭐 자랑스러울 일인가?
군유현은 양유의 시큰둥한 반응에 머쓱했는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게 자연스러운 게 갑자기 등장한 중년인에게 사형제의 정을 담뿍 느끼는 게 더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양유는 그냥 가 버릴까 했는데, 광억이 등장해 주어서 머물러 있기로 했다. 광억은 뒤에 수옥을 달고 왔다.
수옥은 군유현을 보더니 만면에 비감이 스치는 것이 상당한 격정을 느끼는 듯했다.
반면, 군유현은 담담했으나 어느 정도 애틋함을 느끼는 듯도 했다.
“수옥이구나, 이게 얼마 만이지?”
“거의 이십 년은 되지 않았을까요.”
이 정도면 감격스러운 상봉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두 사람은 마주 보기만 할 뿐, 손도 맞잡지 않았다.
은은히 이어지는 감정의 끈이 뻔히 보이는데도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건 답답하기만 하지 보기 흐뭇한 장면은 아니었다.
수옥은 시선을 돌려 군하경을 보고 말했다.
“네가 유현 오라버니의 딸이니? 예쁘게 잘 컸구나.”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아버님하고는 어떻게 아셨고요?”
군하경은 눈을 빛내며 수옥을 살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혹시 아버지와 깊은 사이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에게 부모의 과거사, 특히 애정사란 미지의 영역이고 그래서 더욱 궁금한 것이다.
수옥은 군유현이 광억 밑에서 사사하던 때, 광억의 시중을 들게 되었고 군유현과는 그저 오누이처럼 지냈을 뿐이라고 했다.
“에이…….”
군하경은 시시해졌는지 더 묻지 않았고 아예 수옥에게서 관심을 껐다.
그리고는 하늘하늘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양유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군유현과 수옥이 연출하는 무언의 신파극보다는 군하경에 시선을 두는 것이 더 나았다.
군하경은 양유의 눈을 의식하면서 해당화(海棠花)보다 더 붉은 옷을 휘날리며 몸을 팽그르르 도는데 애가 싹퉁머리가 없고 속도 시커멓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신태(身態)는 귀엽고 앙증맞았다.
군하경은 그렇게 혼자 춤추다 지겨워졌는지 양유를 보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는 것이었다.
양유는 무시했으나 군하경은 이번에는 혀를 날름거리더니 급기야는 손바닥을 쫙 편 채로 엄지만 볼에 붙여 그것을 축으로 삼고 위쪽 아래쪽으로 흔들었다.
이 드넓은 중원 어디를 가도 다 통하는 약 올리기의 정석이었다.
이 고절한 수법을 견딜 수가 없어서 양유는 군하경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게 자꾸 까불래? 내가 네 사숙이라잖아!”
양유는 주먹을 들고 흔들었다.
군하경은 양유의 팔에 매달려 아양을 떨었다.
같이 놀고 싶어서 부른 것인데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것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로 모질지는 못해서 손을 내렸다.
“그런데 양 사숙님, 사숙님은 어디서 왔어? 삼성(三城)이야? 아니면 구파일방(九派一幇)? 아버님하고 동문이라니 의외지만 당연히 그 정도는 되겠지?”
양유는 삼성과 구파일방이 뭔지 몰랐으나 자기가 거기하고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알았다.
고개를 저었다.
“아, 그렇지. 구파일방에서 제자를 보낼 리가 없지. 거긴 자존심이 엄청 세니까. 그럼 의외로 사대마문(四大魔門)일지도? 와! 나 마인하고 싸웠던 거야? 대단하다. 어, 그것도 아냐?”
군하경은 계속 물었다.
“그럼 혹시 십육대세가(十六大世家) 중의 하나야?”
그도 아니었다.
양유는 이 문답이 계속될 것 같아서 진실을 말했다.
“난 여기 오기 전에는 거지였으니까 어디서 왔다고 할 수가 없는데.”
“뭐, 거지?”
군하경은 양유에게서 황급히 벗어나고는 코를 쥐었다.
마치 거지라고 발음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악취가 풍겨 나온다는 투였다.
양유는 어이가 없어서 다가갔다.
군하경은 소리를 빽 내지르며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어디 거지 주제에 자기하고 알고 지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전에 거지였댔지 지금 거지랬나?
아니, 거지가 맞다고 치자.
거지는 사람도 아닌가?
군하경의 안하무인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군하경의 잘못된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으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군유현이 군하경에게로 왔다.
“경아, 스승님 말씀 잘 듣고 건강히 지내거라. 난 이제 가 보겠다.”
그리고 양유에게도 말했다.
“양 사제, 하경이를 부탁한다. 아직 철이 없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니 사숙으로서 잘 가르치면 지금처럼 마냥 버릇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양유와 군하경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일제히 물었다.
군유현이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하도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기에 백암산에 잠깐 의탁하려고 데려온 것이었다. 스승님께서도 흔쾌히 승낙하셨고.”
“금시초문인걸요!”
군하경은 정말로 몰랐는지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자기가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외딸고 으슥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아무튼 이 형편없는 없는 곳에 머물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아버님과 같이 돌아갈 것이다.
흥분해서 마구 떠드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군유현은 엄격한 표정이 되어서 말을 끊었다.
“안 된다. 허락을 구했고 스승님께서 받아들이신 이상 내 손을 떠났다. 철회는 불가(不可)하다.”
군하경은 최후의 수단으로 울며불며 떼를 썼으나 군유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군하경을 놔두고 백암산을 떠났다.
남겨진 군하경은 도대체 이런 곳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양유도 군하경 같이 맛이 많이 간 여자애하고 같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나도 좀 빌어 볼까 했다가 거지일 적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어도 무슨 효험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그만두었다.



4장 군하경과의 동거생활 (1)


백암산에서 보내는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다.
군하경은 도저히 이곳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군하경 보고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물어본다면 너무 떠오르는 것이 많아 어느 것부터 말할까 한참을 고뇌할 것이다.
우선 음식부터 따지자면, 찬이 너무 조촐하다.
양유라는 거지 사숙은 그것도 감지덕지인지 마구 퍼먹는 것이었으나 군하경에게 있어 고기 없는 밥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상에 올라오는 것이 고기반찬이었고 너무 흔해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왜 음식 차리는 상을 고기상이 아니라 밥상이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초가집은 또 어찌나 좁고 불편한지, 수옥과 한 방을 쓰는데 원래 궁궐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군하경이라 그것이 미치도록 불편하고 초가집에서 나는 흙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하며 새벽이면 올라오는 냉기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목욕을 하려면 부엌에서 남들 눈치 보면서 조마조마 씻어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자기 욕실이 따로 있는 군하경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미개하고 원시적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버님도 이렇게 살았던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군하경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항상 깔끔하고 중후한 아버지가 이 부엌 바닥에서 근처 개울에서 길어 온 물을 바가지 가득 떠서 그것을 몸에 끼얹고 했다?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은 아마 폭포 같은 데서 탁기를 씻어 내셨을 거야.”
무슨 신선도 아니고 군유현이 과연 그러했을까?
군하경은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항, 군하경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민무늬에 색도 없는 의복이 군하경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첫날, 군하경은 수옥이 갈아입을 옷을 내밀자 그 소박한 맵시에 기겁하고 던져 버렸다.
비단옷을 입은 채로 잤고 다음 날도 그대로 입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닷새, 엿새가 되니까 찝찝해서 더 입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눈물을 머금고 이 무명옷을 받아들였는데, 옷장에 가득한 화려한 옷들이 생각나 더 서러웠다.
수옥이 살림 솜씨가 좋아서 청결한 내음이 풍겼으나 옷장에 걸린 향낭에서 흘러나오는 울금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의식주에 대한 한탄 말고도 더 있었다.
아버지는 무공을 배우라는 명목으로 자기를 여기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스승이라는 자는 비급 하나 주고 끝이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쁜 사손(師孫)이 생겼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광억은 군하경에게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열 마디나 되나 싶었다.
철검성(鐵劍城)에서는 금지옥엽인 군하경이다.
애정 어린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고 항상 거기에 둘러싸여서 살았다.
그런데 광억은 자신을 본 체도 하지 않고 양유는 혼자서 칼질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고 수옥은 친절하게 대해는 주나 거리감이 느껴졌다.
“치, 어차피 그런 부엌데기하고 거지, 늙은이 관심은 받고 싶지도 않아.”
그러나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하경은 불만을 정리하는 작업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어김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검로(劍路)를 개척하는 양유가 있었다.
검이 번뜩하고 쏘아져 나가고 그와 함께 양유의 몸도 쏜살같이 이동했다.
구구회류검 공세식과 섬혼영의 쾌속무비함이 혼연일체가 되어 검(劍)과 신(身)이 합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력(合力) 정도는 하고 있었다.
“히야, 거지 사숙 꽤 하네!”
군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발했다. 매일 일상적으로 스칠 때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제대로 보니 훌륭한 것이었다.
무가에서 자랐으니 보는 눈은 좀 있었다.
저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철검성의 정예 무사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