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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2화)
4장 군하경과의 동거생활 (2)


군하경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군하경은 양유가 검사위를 마치기를 기다려 얼른 달려가 챙겨온 수건을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사숙님.”
최대한 애교를 담아서 바치는데, 양유는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눈으로 군하경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까지만 해도 멸시의 시선을 보내던게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미쳤나 싶은 것이다.
“왜 그렇게 보세요. 사숙님께서 열심히 수련하시는데 제가 도울 방법은 이것뿐이잖아요?”
양유는 땀을 닦으면서도 영 찜찜했다.
사숙님, 사숙님 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너무 이상했다.
맛이 두 번 가서 정상이 된 것일까?
양유가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아프긴요, 제가 며칠 깊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그간 제가 너무 버릇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양 사숙께서는 저와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더라도 분명 저보다 손위이시고 거기다 항렬은 거의 삼촌뻘이지 않은가요?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예를 갖출 생각이에요.”
“음…… 그럼 다행이지.”
양유는 뭐라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얼떨떨하고 황당해서 군하경이 달라붙는데도 미처 떼어내지 못했다.
“사숙님, 목에 땀 찬 것 좀 봐요.”
군하경은 꿉꿉한 체취가 훅 끼쳐 오는데도 싫은 내색 없이 양유의 목을 닦아 주었다.

군하경은 계속 이상했다.
섬혼영과 구구회류검 구결을 습득저장하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고 같은 상에 앉기를 거부해 항상 혼자 먹던 녀석이 저녁 먹을 때가 되자 양유 곁으로 와서 수저를 뜨는 것이었다.
양유는 이때는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군하경을 피했으나, 그 후 며칠이 지나도 계속 사숙님을 입에 달고 따라다니니 마음을 열게 되었다.
거지가 된 이후로 친구라는 게 아예 없었던 양유라 여자라고는 해도 또래 애의 존재는 무척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양유는 틈틈이 무공을 지도해 주었고 심심함을 달래 주려고 장난감 같은 것을 만들어 놀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하경이 넌지시 물었다.
“사숙님, 정말 여기 온 뒤로 산 아래에 내려간 적이 없어요?”
양유는 그렇다고 했다.
양유에게 산 밖의 세상이란 춥고 배고픈 곳일 뿐이었다.
여기 있으면 제때 밥이 나오겠다, 따뜻한 집도 있겠다 굳이 험난한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군하경이 그러면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세상 구경은 어릴 때 이미 질리게 한 걸.”
“이 년이면 강산은 몰라도 인세(人世)는 엄청나게 변해요. 사숙님도 그때의 사숙님이 아닌 듯이요.”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건데?”
“그냥, 여기에만 있기 지루해서요. 가끔 외출이라도 하면 기분이 전환되지 않겠어요?”
군하경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것을 본 양유는 갑자기 호기가 들었다.
사숙된 입장에서 사질(師姪)이 바라는데 가만히만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었다.
“그럼 잠깐 내려갔다 올까?”
“정말요?”
군하경은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기쁨을 좀 과도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누가 보면 백암산 식구들이 괴롭히든지, 밥을 굶기든지 하는 줄 알 것이다.
둘은 어깨를 맞대고 산을 내려갔다.
평소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자 양유도 괜히 자유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경공으로 빨리 가자고 제의했다.
군하경이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양유는 뒤따라오라고 하고는 섬혼영을 전개했다.
양유 발끝이 톡톡 경쾌하게 산허리를 두드렸다.
섬혼영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그동안 백암산 구석구석 양유가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어느 길이 평탄하고 완만한지 다 알고 있었다.
군하경의 경공 역시 쓸만해서 양유를 잘 쫓아왔으니 금세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평지라는 것만이 다를 뿐, 인적 없고 길 좁고 수풀만 우거진 것은 같으니 백암산과 차별화되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양유는 실망했으나 이는 당연했다.
백암산부터가 등산객도 꽃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없는 외딴곳인데 산자락부터 도회지가 펼쳐져 있겠는가?
군하경은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온다고 했다.
아버지와 오는 길에 들렀다는 것이었다.
다만, 좀 먼 것이 문제인데 자기 달리는 속도로 반 시진은 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가지 뭐,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뜻을 접어야 하겠어?”
이제부터는 군하경이 길을 안내했다.
족히 반 시진을 채웠는데, 마을은커녕 집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양유는 걱정되어 물었다.
“마을이 있는 것 맞아?”
“그럼요, 다만 정확히 반 시진은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한 시진은 안 됐을 거예요.”
양유는 왠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시진을 경공으로 달려가는 건 강행군이지 외출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투자한 반 시진이 아깝다.
그래서 양유는 말없이 군하경을 따랐다.
이는 무척 잘못된 판단 준거이다.
반 시진은 이미 지나 버려서 되돌릴 수가 없는 시간이다.
마을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단지 지금까지 쓴 시간에 미련을 못 버려 앞으로도 시간과 내공과 정력을 쏟는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한 시진을 넘기자 미련 따위는 사라졌다.
양유는 군하경을 멈춰 세우고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너무 많이 왔다.”
군하경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양유는 도대체 그 조금만이 정확히 얼마만큼이냐며 더 갈 것도 없다고 했다.
“아이, 사숙님. 아직 해도 쨍쨍한데 왜 그렇게 조급하세요.”
“왜냐고? 스승님이 우리 없어진 거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기나 해?”
“아뇨. 어떻게 나오는데요?”
“나도 몰라, 그래서 더 무서워.”
양유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 군하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사실, 반 시진 거리에 마을이 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어요.”
“뭐?”
군하경은 백암산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유 보고 같이 철검성으로 가자고 꾀는 것이었다.
사숙은 철검성주인 아버지의 사제이니 자기와 같이 가면 섭섭지 않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유는 다 듣고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그러니까, 요 며칠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했던 것은 이걸 위한 밑밥이었단 말이지?”
군하경은 찔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죄책감인지 이 녀석이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 하는 의외로움의 표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저 사숙님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군하경의 목소리가 떨리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양유는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눈물샘을 자기 의지로 다루는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좋은 거겠지. 철검성까지 혼자는 못 가겠으니 나를 써먹으려는 거 아냐. 틀려?”
군하경은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오기를 부렸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도 어엿한 무림의 여협인데 설마 시정잡배들이 무서워 사숙에 의지하려 했겠어요?”
“그래, 그럼 너 혼자 가 봐라. 난 돌아가련다.”
양유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군하경 같은 애가 아무렴 아무 목적 없이 살살거렸겠는가?
거기에 순진하게 넘어간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고 이때까지 군하경을 위해 해 준 일들이 후회되었다.
양유가 정말로 가 버리자 뒤에서 군하경이 소리를 쳤다.
“그렇다고 진짜 가냐? 이 거지 자식이! 내가 사숙 대접을 해줬으면 자자손손 영광으로 알아야지 좀 도와 달라고 하니까 입을 씻고 가 버려? 거지 주제에…….”
양유는 멈춰 돌아 군하경을 노려보았다.
군하경은 움찔하는 듯했으나 이내 지지 않고 눈빛을 맞쏘았다.
양유가 말했다.
“내가 거지였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지? 너도 어머니가 병환으로 죽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좌절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게 되고 일가친척이라고는 없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난해서 거둬줄 여력이 없다면 거지 말고 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나도 철검성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면 거지가 됐겠냐? 난 내가 잘못해서 거지가 된 것이 아니고 또 너도 네가 공덕을 쌓아서 철검성주의 딸이 된 것이 아닌데 왜 나는 너에게 멸시받아야 하지? 대체 네가 무슨 권리를 가져서?”
양유는 지금껏 출생과 자신의 거지 이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한순간에 풀어놓았다.
봇물이 터지듯 저절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속이 시원하고 이제야 할 말을 다 한 것 같은데, 군하경은 약간 얼이 빠진 듯했다가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 대면 뭔가 대단한 것 같지? 그래 봐야 넌 거지일 뿐이야. 나와 너의 신분이 우연에 의해 갈렸다고 치자. 그게 내가 왜 널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현실은 넌 그저 운 좋게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거지이고 난 철검성의 소공녀란 말이야.”
양유는 별로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군하경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전진했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양유의 무공이 괜찮으니 호위로 삼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를 놓쳐 버린 것이다.
여협이니 뭐니 했지만, 자기 무공이 혼자 돌아다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 어떡하지? 그리고 또 혼자 갔다가는 아버님한테 혼쭐이 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양유는 얼마나 훌륭한 방패막이인가?
양유한테 다 책임을 전가하면 그 선비 같은 아버지는 꼴에 사제라고 크게 질책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군하경은 어떻게 하면 집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군유현에게 혼나지 않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런데 저 앞에 한 인형(人形)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군하경은 그 남자의 신색을 살폈다.
얼굴빛은 거무죽죽하고 키는 멀대같이 컸다.
팔다리가 길고 가늘어 괴상스러움을 더했다.
복장은 더 가관이었는데, 다 찢어진 포댓자루를 몸에 덮어씌운 채였다.
그것도 몸에 맞지 않고 작아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표정이나 풍기는 분위기는 음산해서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