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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3화)
4장 군하경과의 동거생활 (3)


군하경은 감히 지나치지 못했다.
그냥 미친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너무 공교롭다.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게 왜 하고많은 정상인이 아니라 미친놈이란 말인가?
포댓자루가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대는 발걸음을 멈춘 것이지?”
그 목소리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어디 가서 자살할 것만 같았다.
군하경은 태연히 대답했다.
“발목이 좀 아파서요. 쉬었다 가려고요.”
“그, 그럼 왜 앉아서 쉬지 않고 서 있는 거지?”
“먼 길을 가는데 벌써 편히 쉬다가는 퍼져서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주저앉게 될 거예요. 당신은 여행을 별로 안 해봤나 보군요.”
“그, 그렇군. 일리가 있어, 일리가 있어.”
정신 연령이 좀 낮은 것 같았다.
군하경의 말에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포댓자루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군하경에게 이리 오라고 했다.
군하경이 이유를 묻자 자신은 간단한 의술을 할 줄 아니 발목을 봐주겠다고 했다.
군하경은 호의는 고마우나 어떻게 아녀자가 함부로 남에게 발을 보일 수 있겠느냐고 거절했다.
그러자 포댓자루는 갑자기 분개하며 외쳤다.
“너, 너는 거짓말을 했구나!”
“거짓말이라뇨?”
물론 거짓말이 맞지만, 포댓자루가 관심법(觀心琺)을 쓰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너, 너는 아녀자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어린 계집애에 불과한데 내가 발목을 좀 보는 것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그, 그 말인즉슨 넌 발목이 아프지 않은 것이고 나에게 거짓을 전한 것이다.”
군하경은 포댓자루의 추론 과정을 듣고 그 논리적 완성도에 어떻게 할 말이 없었다.
속으로 미친놈 소리만 되뇌다 말했다.
일단 자신의 외관이 아녀자라 하기에는 아직 미성숙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중원의 웬만한 집 여식들은 자기 나이 정도면 모두 규방에 틀어박혀서 자수(刺繡)며, 요리법 같은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아녀자라는 것 말고도 발목을 보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더 있을 수 있는데, 세상에는 많은 흉적들이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는 것이다.
이렇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는데, 포댓자루는 어쩐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결, 결국 네 말은 네가 거짓말을 했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날 흉적으로 몰았다는 소리구나! 나, 날 어떻게 보고!”
포댓자루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리 길이 때문인지 몇 번 내딛으니 바로 군하경 앞이었다.
포댓자루는 으흐흐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가, 가까이서 보니 살결이 희고 부드러운 게 맛있어 보이는구나! 너, 너는 내가 왜 이렇게 말랐는지 아느냐?”
“몰라, 이 미친놈이!”
군하경은 내공을 실어 포댓자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런데 닿는 것은 딱딱한 하퇴골(下腿骨)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이었다.
포댓자루가 긴 팔을 내려서 군하경의 발을 잡아 버린 것이다.
“이거 못 놔?”
“너, 너는 내가 왜 이런 차림을 하는 것인지 왜, 왜 이렇게 우울한지 알고 있느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위로 뛰면서 다른 쪽 발로 포댓자루의 가슴을 때렸다.
포댓자루는 그 발마저 잡아 버렸다.
곧, 포댓자루가 군하경을 거꾸로 들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포댓자루의 가슴 어림까지의 높이보다 군하경 키가 더 작아서 바닥에 머리를 박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이 자세는 정말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긴 치마가 뒤집어져 속곳을 내비쳤다.
군하경은 몸부림을 쳤으나 포댓자루의 두 손은 족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내가 누군 줄 알아? 너 잘못 건드린 거야!”
포댓자루는 군하경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우울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 그건 내가 인육(人肉)을 먹고 살기 때문이지.”
누가 이런 얘기를 한다면 질 나쁜 농담 하지 말라는 말을 듣겠으나 포댓자루는 충분히 그러고 살 것 같았다.
군하경은 악을 쓰며 이 미친 새끼! 를 연발했다.
포댓자루는 계속 말했다.
“내, 내가 익힌 광살아수라파천마공(狂殺阿修羅破天魔功). 그, 그 마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난 사람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 그래도 아직 인성은 있어서 최대한 억제하느라 이 몸이 되었지.”
포댓자루는 여전히 군하경과의 이상한 결합 자세를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과, 과연 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잘, 잘 쳐줘야 반인반마(半人半魔)가 아닌가? 이, 이 포댓자루는 그것을 나타내는 듯하군.”
계속 물구나무선 자세로 잡혀 있으니 피가 머리로 몰리고 어지러웠다.
군하경은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기절했다가는 저 미친놈한테 뜯어 먹혀서 뼈다귀만 남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무너지는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포댓자루는 얌전히 군하경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군하경은 비틀거리며 제 살 길을 찾아갔다.
안도감이 커서 그저 멀리 벗어나기만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겁은 있는 대로 다 주더니 순순히 풀어주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포댓자루 쪽을 다시 보았다.
양유가 와 있었다.
틀림없는 양유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리로 달려가니 양유가 물었다.
“저 미친놈은 누구야?”
군하경은 저놈은 식인을 즐기는 광살아수라파천마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양유는 광살아수라파천마인에게 이름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 나는 이름이 없다. 그, 그대는 누구인가? 나, 나와는 상극의 힘이 느껴지는군!”
백위신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광억의 말이 맞다면 마공과는 상극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광억은 항상 다른 내공심법이 백위신공보다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그보다 더 정(正)할 수는 없다고 말해 왔었다.
“난 양유인데.”
광살아수라파천마인은 침울한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렇군. 이,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 나와 자웅을 겨루자. 이, 이긴 사람이 저 계집애를 먹는 거다.”
“누구 맘대로!”
군하경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양유는 검을 뽑았다.
애써 평상한 척하고 있었으나 긴장으로 침이 말랐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전은 처음인 것이다.
“군하경! 넌 여기 있지 말고 어디라도 좋으니 가 버려. 네가 있으면 나도 몸을 뺄 수가 없잖아.”
“알았어, 너도 잡아먹히지나 마.”
군하경이 이 구도에서 벗어나는데도 광살아수라파천마인은 여유만만 가만히 있었다.
“그, 그럼 간다.”
어쩐지 광살아수라파천마인은 좀 친절한 것 같았다.
군하경을 놓아 준 것이 그렇고, 공격 시점을 알려 주는 것도 그렇다.
정파 협객도 아니고 식인귀가 왜 이렇게 예의를 잘 지킨담?
그런 생각도 잠시, 자신의 검과 광살마의 가냘픈 팔뚝이 서로 부딪히자 묵직한 충격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제야 양유는 이 싸움이 서로의 목숨을 걸고 하는 생사투(生死鬪)임을 실감했다.
검을 거두고 나면 실실 웃을 수 있는 수옥과의 대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광살마의 긴 손이 양유의 목덜미를 잡아채 왔다.
양유는 검날로 앞섶을 가렸다.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다음, 뛰어올라 광살마의 안면으로 떨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구구회류검 공세식 사초, 비영낙천(飛影落天)이었다.
백위신공의 내력에, 섬혼영을 통해 극대화된 가속도, 양유의 체중이 모두 실렸다.
광살마는 이 위맹한 기세에 굴하지 않고 팔을 들어 막았다.
아름드리나무도 갈라 버리는 위력의 초식인데, 팔모가지 하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양유는 착지한 후, 연이어 공세식을 펼쳤다.
광살마는 일수를 뻗어 일일이 마주쳤다.
검과 손가락뼈가 부딪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겨루고 양유는 자신이 손해를 봤음을 알았다.
손아귀가 얼얼하고 손목이 저릿저릿한데 맨손으로 맞서는 광살마는 아픈 기색이 없었다.
양유는 질려서 뒤로 빠지며 수세식을 전개했다.
수옥의 화선수를 지겹도록 겪어서 광살마가 수법(手法)을 사용하자 내심 상대하기 편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옥도 이토록 무식하게 부딪혀 온 적은 없었다.
아무리 단련을 통해 인체의 한계를 넘었다 해도 병기의 이점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광살마는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손이 그렇게 단단해진 거야?”
양유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광살마는 공격하다 말고 우뚝 서서 멍하니 생각하는 듯했다.
“언, 언제부터일까……. 난, 난 분명 보통 인간이었다. 그, 그러나 광살아수라파천마공을 익히고부터…….”
광살마의 음침한 얼굴에 아련한 빛이 스쳤다.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양인데, 식인마의 추억이라는 게 뭐가 있을까?
인간의 어느 부위가 야들야들하고 어디는 또 팍팍해서 맛없고 그런 걸 생각하나?
넋을 놓고 있는 것을 보고 양유는 암암리에 내력을 끌어올렸다.
전신 기맥에 백위신공의 기운이 충만히 돌아다니고 온 근육에 긴장감이 퍼져 달려나갈 준비를 마쳤다.
양유는 망설이지 않고 구구회류검 공세식 구초, 일합경혼을 펼쳤다.
‘됐다!’
느낌이 왔다.
이 일합으로 목을 뎅강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유의 검은 광살마가 목 옆에 가져다 댄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광살마가 준엄히 꾸짖었다.
“비, 비겁하다 신공의 후예여. 무, 무인의 자존심도 없구나!”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그 음성이 추상같았으나 양유는 반성할 생각은 없었고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 베며 광살마를 두 조각 내려 했다.
광살마는 양손을 겹쳐 그것을 막은 다음 침음하며 말했다.
“강,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구나. 비, 비겁함을 알고도 고치려 하지 않다니!”
광살마는 분개해서 흡 하고 숨을 멈췄다.
무시하고 광살마의 어깨를 베었으나 오히려 검이 튕겨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양유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광살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했다.
광살마가 괴성을 지르며 눈을 번득이니 굉음이 터져 나오며 막대한 기운이 사방으로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