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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4화)
4장 군하경과의 동거생활 (4)
양유는 자기가 죽은 줄 알고 눈을 꾹 감았다가 고통이 없길래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나무 여러 그루가 광살아수라파천마공의 기운을 못 이기고 분질러져 있었고 아래로 향한 힘은 땅을 파헤쳐 먼지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양유가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정반대 자리가 초토화가 된 것이었다.
양유는 광살마를 보았다.
광살마는 고통으로 신음하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무래도 광살아수라파천마공의 부작용인 듯했다.
“위력이 정말 대단한데? 그렇지만 애꿎은 나무 쓰러뜨리는 데나 쓴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광살마도 양유가 지적하는 바를 통감하는 듯했다.
“인, 인간이 감당할 기운이 아니다.”
“그런 것 같네.”
그러면서 양유는 검을 세우고 접근했다.
광살마는 그것을 보고 비겁하다, 비겁하다를 연발했다.
양유가 변명을 했다.
이건 자기가 생각해도 정대하지 못한 짓은 맞으나 미친 식인귀에게 정정당당해서 뭐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광살마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었다.
콰콰콰쾅!
다시 광살아수라파천마기가 방출되었다.
다행히 빗나갔으나 또 주위의 나무가 꺾여 나가고 거센 역풍이 양유의 얼굴을 때렸다.
이번에도 제대로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허리가 똑 부러질지 갈가리 찢길지는 잘 모르겠으나 뭐든 골로 갈 것은 분명하니 경시할 수가 없었다.
양유는 광살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너는 날 죽이기 어려울 것 같고 나도 네 이상한 무공이 무서우니 우리는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아.”
광살마는 양유의 탐스러운 두 볼이 아쉬운지 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양유는 미련없이 돌아섰다.
여기까지 왔던 것을 되짚으며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군하경이 양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유를 보자 반색하며 외쳤다.
“안 먹혔구나!”
“그럼, 내가 그런 정신 나간 인간한테 질 줄 알았어?”
말하면서도 좀 찔렸다.
군하경이 약간 존경스러운 듯 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광살마를 이긴 것이 아니라 광살마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양유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럼 이제 백암산 집으로 가자.”
군하경은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어찌 말로 들어야만 아는가?
달라진 군하경의 태도에서 느껴졌다.
양유 뒤에서 달리던 군하경이 문득 말했다.
“내가 왜 백암산에 있기 싫은 줄 알아?”
이미 말해 놓고는 왜 묻는지 모르겠으나, 양유는 군하경이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먹을 것, 입을 옷, 살 곳.
“그것도 그거지만, 실은 아버님 때문이야.”
군유현은 고리타분한 사람이어서 자신에게 가문의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는다.
출가외인이 될 딸에게 비전을 알려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암산에 놓고 간 것이 속이 너무 빤히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가문 무공 중, 아무거나 알려 줬어도 난 만족했을 거야. 오라버니들과는 달리 난 무공광이 아니니까. 가문에 소속되고 싶은 내 속뜻을 알면서도 무공을 배우고 싶댔으니 백암산에 두는 것으로 되었다고 말해 버리는 아버님. 너 같으면 여기 있고 싶겠니?”
양유는 그럼 집에도 가기 싫을 것 같다고 하려 했으나 군하경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긴장이 풀려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건가 봐.”
그리고 둘은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고 평소대로 수련한 것처럼 행동했는데, 광억도 수옥도 둘이서 나갔다 온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저녁 식사 시간, 양유는 광살마와의 싸움으로 느낀 바가 있어 광억에게 물었다.
“사부님, 그런데 구구회류검이 괜찮은 검법이 맞나요?”
“그건 왜 물어보느냐?”
광살마 얘기를 할 수가 없어 구구회류검으로는 수옥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다.
스승에게 전수받은 무공의 탁월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제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광억이 가르칠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무릅쓰고 말을 꺼낸 것이었다.
광억은 덤덤히 말했다.
“그걸 말이라 하느냐. 구구회류검은 기본 검술에 불과하다. 공격에 유용한 동작, 방어하기 좋은 동작을 골라 만든 연습용 검법이다.”
“역시 그랬어! 그러니까 어딜 가나 맞고 다니죠.”
광억은 어딜 갔길래 그러냐고 물었다.
양유는 아차 했으나 임기응변으로 왜 그걸 일 년 가까이나 익히게 했느냐고 화제를 전환했다.
“상승무공에 들어가기 전, 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초식 조합을 수없이 한 것은 앞으로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광억은 요즘 중원 무림이 장풍을 날리고 한 번에 몇 장을 뛰어넘고 하는 기예적 무공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중요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검합의 공방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잔말 말고 이대로 계속하라고 했다.
양유는 군하경과 빠르게 친해졌다.
이번에는 가장(假裝)이 아니라 군하경이 양유에게 마음을 열었다.
구명지은을 입어 놓고도 그게 뭐?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던 데다 백암산 생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양유하고라도 놀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저 친구였지 절대 사숙 취급은 해주지 않았다.
구구회류검과 섬혼영의 습득저장을 마치자 광억은 비급 세 권을 만들어 주었다.
바로 백위신공 기공편(氣功篇)과 팔방투예(八方鬪藝), 그리고 파왕검법(破王劍法).
백위신공 기공편은 넘치도록 모은 백위신공의 내공을 활용하는 법에 대한 책이었고 팔방투예는 광억이 앞서 말했던 무공의 기예적 활용에 대해 다방면으로 고찰한 서적이었다.
많은 분야를 다루다 보니 무식할 정도로 두꺼웠다.
파왕검법은 구구회류검 같은 초식검법이 아니라 검기 이상의 경지를 논하는 상승검법이었다.
이 세 권을 모두 습득저장하는 데는 일 년이 넘게 걸렸다.
그사이에 군유현이 방문하여 군하경을 데려갔고 양유는 수옥에게 삼백 연패를 넘게 하고 있었다.
이 연패는 육백팔십칠 회까지 압도적으로 이어졌고 새로 익히는 세 무공이 본궤도에 올라가자 이 년여간 지속되었던 대련은 끝이 났다.
어느 한쪽이 다치지 않고는 결판을 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삼 년이 더 지나서 양유는 수옥에게 비무를 신청했는데 양유 나이 열아홉, 드디어 지긋지긋한 연패를 끊었다.
총 전적은 칠백십육 전, 일 승 칠백십오 패.
5장 양유가 산을 내려오다 (1)
최근 양유는 할 일이 없었다.
삼종비급(三種祕笈)의 습득저장을 완성하자 광억의 간섭은 거의 없다시피 하게 되었고 체득이 훌륭하게 되었음을 수옥과의 비무에서 증명하자 이제는 거의 신경도 안 쓰는 것이었다.
그나마 아침에 영약 받는 것이 얼굴 한번 볼 기회인데 그 의식도 끝났다.
양유가 왜 영약탕을 안 주느냐고 묻자 광억이 대꾸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는 더는 양유가 손안의 제자가 아님을 선언한 것이었다.
한없는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나 양유는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칠 년을 규격화된 생활 속에서 보냈는데, 갑자기 그러한 모든 일과의 의무성이 사라지니 오히려 어색하고 거북하기까지 했다.
그 주된 이유는 백암산에서 할 일이라고는 없어서였다.
며칠을 방에서 뒹굴고 나무 그늘에 앉아서 구름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좀 돌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유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무공을 펼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나날이 지나가고 웬일로 광억이 불렀다.
요새 못 보는 날이 더 많아서 도대체 뭐하고 사는지도 모를 정도인데, 이렇게 오라 가라 할 정도면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 같았다.
광억의 방에 들어가자 스승은 뜻밖에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양유를 맞았다.
“앉아라.”
광억은 요즘 어떠냐고 했다.
양유는 살기가 지겨워진 것 같다고 했다.
광억에게는 역시 농이 안 통했다.
왜 생에의 의지를 잃어버렸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것이었다.
양유는 한숨을 쉬며 과장 섞인 수사(修辭)였음을 주지시키고 그 정도는 아니나 할 일도 없고 무공도 영 진전이 느려서 답답하다고 했다.
“지금 네 경지는 어느 정도인 것 같으냐.”
“백위신공 기공편은 오성(五成)이나 됐나 싶지만 팔방투예는 이젠 기본이죠. 파왕검법도 거의 깨쳤고.”
“거의 깨쳤다라……. 그럼 파왕검법 후이초(後二招)를 완벽히 펼칠 수 있느냐?”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한 팔성이라고 하죠 뭐.”
광억은 자기 질문의 의도는 지금 닦고 있는 무공의 성취가 아니라 중원에서 무림인 양유의 현재 위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양유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양유가 겪어본 무림인은 광억과 군유현, 광살마, 그리고 수옥과 군하경 정도였다.
하나씩 생각해 보았다.
광억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고 군유현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형이니 자신보단 강하지 않을까?
광살마는 어릴 때 겪은 것이라 정확한 수준을 가늠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다시 만난다면 자신이 있었다.
수옥은 이제 능히 상대할 수 있으며 군하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가지고 전 무림에 확장하여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유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래도 약한 편은 아닐 것 같은데요.”
양유는 두 손가락을 모아 벽에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부분은 내공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고 벽 내부는 양유가 움직이는 대로 변형되었다.
양유는 그렇게 흙덩어리를 긁어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걸 아무나 할 수 있지 않다면요.”
파사사 하는 소리와 함께 흙덩어리는 가루로 화했다.
나름 분위기를 잡고 상황에 맞추어 말도 했으나 광억은 별로 감명을 받지 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