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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5화)
5장 양유가 산을 내려오다 (2)


“내가 보기에는 지금으로는 그리 높게 쳐줄 수가 없다. 스승이 아니라 너와 같은 세계에 있는 무인으로서의 평가다.”
“왜요?”
“경험이 아예 없으니 그렇다. 너 사람 죽여 본 적 있느냐?”
“아뇨.”
“그럼 한 수십 명쯤 되는 적들과 난투를 벌여 본 적은 있느냐?”
“일 대 이로 싸워 보지도 못했는데요.”
기병(奇兵)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검을 든 상대와 겨루어 본 적도 없었다.
양유의 경험은 극도로 편중되어 있었다.
수공 고수인 수옥하고만 칠백여 번을 싸운 것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심산유곡의 애송이밖에 더 되겠느냐.”
광억이 지적하는 바가 참으로 날카로워 가슴을 찌르는데, 양유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겠죠. 백암산이야말로 심산유곡 그 자체라 할 수 있겠고 제가 무슨 닳고 닳은 노강호겠습니까.”
“잘 아는구나. 그러니 이만 하산해라.”
“예?”
그 말하는 투가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 듯이, 지나가는 말과 같아서 양유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뭘 하라고요?”
광억은 자세를 가다듬고 한숨과 시원섭섭함, 비장감과 결연함을 담아 말했다.
“내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구나. 네 능력을 세상에 펼쳐 보일 때다. 그러니 이만 하산하도록 하여라.”
광억의 주름진 눈에는 씁쓸함과 대견함이 함께 녹아 있었다.
양유가 물었다.
“그건 또 뭐예요? 갑자기 무게를 잡으시고.”
“네가 바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느냐?”
“네, 갑자기 왜 하산하라 하시는지가 궁금한데요.”
광억은 그럼 영원히 백암산에 눌러살 생각이냐고 했다.
무림에 나가서 부족한 경험을 채우고 한 명의 독립된 무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양유는 백암산을 떠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백암산 칠 년의 기억과 삼 년의 거지 생활,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런 것들을 비교하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양유에게는 백암산이 최고의 장소였고 괜찮은 추억들도 다 여기서 만들어졌다.
“그럼 나가서는 뭘 해요?”
광억은 품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내 건넸다.
“네 사형에게 전해라. 철검성으로 가면 될 것이다.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알아서 생각하거라.”
양유는 서신을 받았다.
정반대의 생각이 요녀처럼 살랑살랑 올라왔다.
하긴, 백암산에만 있어서 뭘 하겠는가?
자신도 이제 다 컸고 세상을 겪을 나이가 된 것이다.
등 떠밀리는 감이 있으나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수옥은 양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키 차이가 꽤 나서 쉽지가 않았다.
양유는 고개를 숙여 수옥이 편하도록 해 주었다.
“그 어린애가 이렇게 크다니 세월이란 참 알 수 없어요.”
수옥도 이제는 완연히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히 흘러나오는 품위 가득한 아름다움은 나이가 든다고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눈가에 살짝 잡힌 잔주름이 그나마 나이대를 짐작할 수 있게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눈매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웃을 때마다 사람을 포근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했다.
“무상하죠, 뭐.”
“그건 유가 할 말이 아니잖아요.”
수옥은 눈을 흘기더니 이것저것 챙겨 넣은 보따리를 등에 매어 주었다.
“안에 은자를 조금 넣었으니 유용하게 쓰도록 해요.”
양유는 알겠노라고 했다.
수옥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떠나보내지 못하고 양유의 얼굴을 매만졌다.
“할 일을 못 찾으면 그냥 돌아올게요.”
양유는 수옥을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광억에게 간다고 할 때와는 다르게 따뜻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그럼 갈게요.”
양유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걸음을 뗐다.
몇 번 뒤돌아보다가 마음을 먹고 섬혼영을 전개했다.
일각도 되지 않아 백암산을 내려왔다.

백암산 근방은 오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황막함 속에서 양유는 자기가 철검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상기해 냈는데 더 중요한 지리 개념, 여기가 하남성(河南省) 어느 구석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함께 깨달았다.
“그럼 그냥 아무 데로나 가 보는 수밖에.”
양유는 검에게 운명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검집째로 풀어내 공중에 던졌다.
빙그르르 회전하며 땅에 떨어졌다.
양유는 검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살폈다.
“북쪽이로군. 좋아, 그럼 진로를 북으로 잡는다.”
다시 섬혼영을 펼쳤다.
경공의 두 미덕은 속(速)과 지(支)이다.
경공술이 경지에 이르면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게 된다.
인간 주력(走力)의 한계를 넘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력 또한 인간 기준을 벗어나 폐장(肺腸)과 다리 근육은 쉽사리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달릴 수 있다.
섬혼영은 지보다는 속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원래 신법이 주인 무공이라 극한의 쾌속함만을 추구했다.
자연히 내공 소모가 심한데, 양유는 몇 시진을 내리 섬혼영으로 날뛰는데도 끄떡없었다.
칠 년을 먹은 영약탕의 힘이었다.
이제 와서 또 몇 그릇을 먹었는지 세어 봐야 의미가 없으리라.
양유의 단전은 커다란 호수와도 같아 퍼도 퍼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듯했다.
양유는 곧 멈추고 흙바닥에 털썩 앉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그랬다.
보따리를 풀어 수옥이 뭘 넣었나 보았다.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주먹밥 다섯 덩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은자 꾸러미도 있었는데, 무려 스무 냥이나 되었다.
노잣돈으로는 넘치게 많은 양이다.
양유는 주먹밥을 씹으면서 은자를 촤르륵 넘겨 보고 태양 아래에 비추어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백암산에서는 은자가 필요 없었으나 그렇다고 은자의 가치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양유는 주먹밥을 먹다 말고 보따리를 챙겨서 일어났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근처를 지나고 있음을 느꼈다.
말소리와 씨근거리는 숨소리, 발걸음 소리가 연이어 감지되었다.
양유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서 무리의 시야로 들어가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여기 사람 있어요!”
그들도 다른 사람이 그리웠는지 양유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왔다.
전부 일곱 명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모두 험상궂게 생겼고 손에 곤봉과 막칼 등 흉기를 들고 있는 것이 좋은 목적을 가지고 결성한 무리가 아닌 듯했고 양유에게 호의를 가진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가진 것을 다 내놓아라.”
다가오자마자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양유는 그들에게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무리의 선두에 있는 가장 무식하게 생긴 남자가 대답했다.
“보면 모르냐? 우리는 이 일대를 주름 잡고 있는 인활단(仁活團)의 나으리들이다.”
양유는 강도 행위가 과연 인활이라 할 수 있는가 의아했으나 더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물었다.
“이 일대라고 해 봐야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런 데서 활동하지?”
무식하게 생긴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다른 인적 잦은 곳에는 이미 강도 및 도적단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들과 구역을 나눠 먹을 실력은 없어서인데, 이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무식인의 열등감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강도는 하류 중의 하류 인생이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하류라니 도대체 뭐하는 삶이란 말인가?
무식인은 또 이런 생각이 들자 화가 난 듯했다.
다짜고짜 양유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이 새끼가 감히 우리 인활단을 모욕해?”
양유는 다가오는 곤봉이 너무 느려서 그사이에 주먹밥을 하나쯤 더 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게 아니라 자기가 다가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양유는 발을 가볍게 놀려 무식인의 품으로 파고들며 곤봉을 손으로 잡았다.
“뭐지?”
“뭐야?”
무식인 및 인활단원들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눈만 끔벅거렸다.
양유의 몸놀림이 인활단원들의 인지 능력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인데, 인활단원들에게는 무식인의 곤봉이 공격의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였고 그다음 장면은 양유가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이걸로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겠어?”
양유는 각각 손으로 곤봉 양 끝을 잡고 반으로 부러뜨렸다.
나무젓가락 부러지듯 손쉬웠다.
무식인은 생김새로만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있는지 인활단원들이 어리둥절하고만 있는 것과는 달리 양유에게 물었다.
“혹,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양유는 그렇다고 했다.
무식인의 얼굴에 아연함이 스쳤다.
“이, 이런 썩을! 아, 아니 어르신께 한 말이 아닙니다. 이 새끼들아 어서 꿇지 못해?”
무식인은 넙죽 엎드려 절했다.
무식인이 우두머리격인지 인활단원들도 무식인을 따라서 했다.
양유는 좀 더 드잡이질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나니 아쉬워서 보따리에서 은자를 꺼냈다.
“당신들 강도라며, 여기 은자가 이만큼 있는데 날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머리를 든 무식인의 눈이 탐심으로 빛났다.
그러나 자기 주제를 아는지 곧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다른 인활단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양유가 은자를 하나씩 소리내 세었고 총 스무 냥임을 알려주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양유를 향해 돌진들을 했다.
양유는 첫 놈의 턱을 갈기고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서 무기를 빼앗아 다음 인활단원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 인활단원의 무기를 뺏어 다음 인활단원을 내려치고 이 인활단원은 둔기가 아닌 칼을 들고 있는지라 강취한 것을 옆의 나무에다 던져 박았다.
이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하니 여섯 인활단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었다.
“너무 약하군.”
양유는 괜히 도발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무림인은 단순히 힘만 센 존재가 아니다.
내공심법의 효능,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으로 확장, 초발달된 감각으로 세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그 감각은 날카로워지고 움직임 역시 그에 걸맞은 신속함과 묵직함을 갖춘다.
양유는 이런 잡배들과는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식인이 우리 애들이 눈이 삐어 고인을 몰라보고 개긴 것을 용서해 달라고 빌기에 알겠다고 했다.
애초에 저들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자기 행동이 후회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