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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6화)
5장 양유가 산을 내려오다 (3)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너희들! 어르신께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뭐해?”
인활단원들은 고통을 참고 일어나서 양유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 광경은 괴상하기 그지없었는데, 새파란 청년에게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얻어터진 모습으로 설설 기고 있는 것이다.
양유는 생각나는 바가 있어 무식인에게 물었다.
“혹시 철검성이라고 알아?”
“네, 그럼요 어르신. 하남성에 살면서 철검성을 모를 수는 없죠.”
“어디 있는지는?”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습지요.”
“어느 쪽에 있는데?”
무식인은 양유가 온 쪽을 가리켰다.
양유는 헛달음질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껏 반대 방향으로 달렸던 것이다.
“혹여 무슨 문제라도……?”
“너 은혜를 갚고 싶다고 했지?”
잊지 않겠다는 것이지 갚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식인은 네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철검성까지 길 안내해 줘. 내가 거기 갈 일이 있거든.”
무식인은 헤헤 웃으며 그건 좀 곤란하다고 했다.
무림인 어르신의 하해와 같은 아량에 감읍하는 바이며 부탁하는 바를 들어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여기서 철검성까지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닌데, 그 많은 날을 공치면 집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처자식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양유가 말했다.
“누가 당신들을 다 데려간대?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해. 네가 길을 안다니 너만 가 주면 되지.”
무식인은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맞장구친 뒤,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인활단장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이란 다른 여섯을 합친 것보다 큰데 자기가 장기간 외유를 한다면 인활단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사정을 봐 달라고 했다.
양유는 그냥 패 버리고 데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식인의 혀가 매끄러우니 자기도 말로 설복시키고 싶었다.
양유는 자기 말고 최근에 강도질한 것이 언제인지 물었다.
무식인은 어제 한 탕 했다고 아뢰었다.
“그 사람이 봐달라고 하지 않던가?”
“그랬죠.”
“너는 뭐라고 했지?”
무식인은 양유가 말하려는 바를 알게 되어서 머뭇머뭇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자존(强者尊)! 억울하면 무공을 배우든지 아니면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든가.”
무식인은 그 말을 하더니 무척 괴로운 표정이 되었는데 자신 스스로 양유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변방에서 강도질이나 하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무척 웃기다는 것을 알고 자괴감에 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양유가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강자존의 법칙, 물론 내가 그걸 적용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다만 너희의 기준에 너희도 따라야 한다는 것뿐이지. 나도 무공이 없었으면 어제의 그 불행한 사람처럼 탈탈 털렸겠지? 그러나 나는 알다시피 무공이 뛰어나고 그것을 알았을 때는 너네들도 달게 털려야 한다는 거야. 그러니 나의 횡포는 무척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무식인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새파란 녀석은 무식인이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보아하니 강호초출인데, 초출자는 어수룩하거나 정의감만 앞서거나 가진 힘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거나 중 하나이다.
무식인은 양유를 첫 번째 인간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싫어? 그러면 뭐.”
양유가 주먹을 쥐니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무식인은 인활단원들에게 자기 없는 동안 강도질 잘하고 산불 조심, 관군 조심, 특히 무림인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는 양유를 따랐다.

무식인의 이름은 노상이라고 했다.
인활단원과 조우하기 전, 양유가 경공으로 주파한 거리가 이백 리는 되어 노상의 걸음으로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데만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양유는 하는 수 없이 노상을 들쳐 매고 달렸는데, 노상은 심심했는지 양유 위에서 노상 지껄여 댔다.
자기 신상 내력을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줄줄 늘어놓았고 화전민으로 떠돌다가 만난 동생들과 마음이 맞아 강도 집단을 결성했다고 인활단 창단 비화도 밝혔다.
양유는 노상이 뭘 하고 살았든 관심이 없어서 듣고만 있었는데, 인활단 얘기가 나오자 물었다.
“강도단 이름이 대체 왜 그래?”
“그게 요즘 사파무림의 유행이죠. 신의문(信義門)이 발흥하여 사파의 강자가 되었고 일약 발전해 삼대마문이 사대마문으로 바뀐 것이 십 년 전입니다. 사파에서는 너도 나도 신의마문을 따라서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죠. 그래서 요즘 저잣거리에서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놈들 문파가 협사문(俠士門)이니 인덕문(仁德門)이니 한답니다.”
양유는 허, 하고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유치한 사람들이라 생각되어서였다.
노상은 무림에 어떤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강도 패거리 따위에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그것의 표출이었다.
말하는 내내 열에 들뜬 듯이 신나 했다.
노상이 무림에 관한 지식이 좀 있는 듯하여 양유는 현 무림의 판세에 대해 물었다.
광억이 그런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아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노상이 말한 바는 이렇다.
무림을 사분(四分)하는 것은 구파일방과 십육대세가, 삼성과 사대마문이다.
정사의 개념으로 구분하자면, 왼쪽 끝이 정(正)이고 오른쪽 끝이 사(邪)인 선분을 생각해 보자, 왼쪽 극단에 있는 것이 구파일방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이 십육대세가이다. 중간 지점에서 약간 오른쪽에 위치한 것이 삼성이고 오른쪽 극단에 사대마문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 구파일방과 십육대세가는 정파로 분류되기는 하나, 별로 교류도 없고 동지 의식 같은 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삼성과 사대마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좀 더 다원적인 구분 개념, 정사패마(正私覇魔)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정의 구현을 기치로 내세우는 정도.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 선을 지키는 편이나 궁극적인 목적은 가문의 유지 및 발전인, 십육대세가와 기타 가문 문파의 사도.
힘의 논리를 제일로 내세우는 삼성의 패도.
인간의 탈을 쓰고 끔찍한 짓을 자행하는 마도로 나뉜다.
사대마문과 마인들이 바로 그 길을 걷고 있다.
노상은 이어 사도(四道)에 속한 문파들을 각각 알려 주었는데, 십육대세가는 다 기억하지 못해 몇 가문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철검성이 위치한 정주(鄭州)에 도착하는데 칠 일이 걸렸다.
양유의 발걸음은 무척 변덕스러워서 내킬 때는 한나절이고 달렸으나 그렇지 않으면 느릿느릿 팔자 좋은 나그네처럼 유람하듯 풍광을 감상했다.
노상은 그 두 일면이 모두 지긋지긋했다.
양유가 자기를 거의 짐덩이처럼 다루니 경공으로 쌩 달릴 때는 하루종일 불편함 속에 있어야 했고, 늑장을 있는 대로 부릴 때면 돌아갈 시일이 그만큼 늦어지는 것이라 애가 탔다.
그래서 정주가 눈앞에 들어오자 기쁘고 또 기뻤다.
이제 해방인 것이다.
노상은 양유에게 정주에 도착한 이상, 철검성을 찾기는 무척 쉬울 것이니 이만 인활단에 복귀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양유는 단칼에 불가함을 표명했다.
철검성까지 동행하기로 약조한 것이지 정주까지만 가기로 한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노상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안 그래도 무식, 투박, 못생긴 얼굴이 더 흉해졌다.
그러나 양유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노상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으로 운 다음 철검성은 정주의 복판에 있다고 알리며 앞장섰다.

정주는 지나온 곳과는 달리 문물이 화려하고 거리마다 마차와 수레가 지나다녔으며 행인들로 넘쳐 났다.
양유는 신기해서 사방팔방 구경하며 난리가 났다.
거지일 때는 하남성 변두리만 돌았지 이런 번화한 곳은 얼씬도 하지 못했었다.
“정주가 큰 성읍이기는 하지만, 낙양이나 성도(省都)인 개봉만은 못합니다.”
노상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도 안 돌리고 걷기만 했다.
“그래서 넌 거기 가 봐서 이러는 거야?”
“물론입죠.”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무게를 잡았으니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양유는 미심쩍어서 물었다.
“그 두 곳은 뭐로 유명한데?”
“낙양 하면 용문석굴(龍門石窟)이죠, 개봉에는 개방(丐幫) 총단이 있고요.”
노상은 용문산 암벽을 따라 조성된 수많은 석굴과 탑의 웅장함, 정교한 내부 장식, 굴 안에 모셔진 거대한 불상 등에 관해 떠들어 댔다.
그리고 천하 거지들의 성지, 개방 총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를 주절거렸다.
양유야 용문석굴이 낙양이 아니라 장안에 박혀 있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고 개방도 존재 자체는 알긴 했으나 거지일 적에 그런 데가 있다더라 하고 들었던 정도라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주워들은 얘기에 살을 붙였을 뿐인 노상의 설명에 감복하고 견문이 넓어서 좋겠다고 했다.
‘이것만 보면 제일종(第一種)의 초출자인데…….’
노상은 입맛을 다셨다.
이 양유라는 녀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림인인데도 무림 정세에 깜깜하고 일반 상식도 부족하니 멍청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말하는 바는 정연하고 핵심을 찌르곤 했다.
오히려 총기가 있다고 해야 맞았다.
대체 사문이 어디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닙니다.”
정주의 중심지인 덕화가(德化街)를 지나니 철검성벽이 보였다.
높은 성벽이 시야 가득 뻗어 있었다.
말 그대로 진짜 성인 것이다.
인간은 기존 경험을 압도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 경외감을 느낀다.
양유는 끝없이 이어지는 견고한 성벽과 일정 간격마다 빠짐없이 배치된 수비 무사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위용이 장난이 아니군.”
“하남무림 최고의 문파라는 수식어가 과한 것이 아니죠. 아니, 천하제일문(天下諸一門)을 굳이, 정말 굳이 꼽으려고 한다면 철검성이 가장 유력할 겁니다.”
양유는 성벽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앞서 달려 나갔다.
노상도 여정의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에서 느린 걸음이나마 기꺼이 양유를 쫓아갔다.
한참을 뛰어서 땀범벅이 될 즈음에서야 목을 빼고 성벽을 올려다보는 양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