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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17화)
5장 양유가 산을 내려오다 (4)


노상은 꼭 초출자 티를 낸다고 생각하며 양유에게 물었다.
“성벽이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높이가 얼마나 될지 재는 거야. 네가 보기에는 어때?”
“한 사오 장 되지 않을까요?”
“정확히는 사 장 반이지.”
양유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게다.
다만, 그럴 거면 왜 자기 의견을 구했는지?
노상은 그런데 높이를 알아서 무엇하려고 그러냐고 물었다.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툭 던지는 말에 노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는데, 노상의 면상은 햇볕에 그을려 새까맸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노상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라고 했다.
“왜, 못 넘을 것 같아?”
노상은 넘고 못 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짓을 하다가는 침입자 취급을 받아 척살당할 것이라고 양유를 말렸다.
그리고 본심을 말했는데, 양유뿐 아니라 자기도 엮일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알았어, 그냥 해 본 소리인데 뭘 그렇게 정색하고 반대해?”
사형의 문파이니 성벽 한 번 넘는다고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 노상과 같은 수준의 위기의식을 공유하지는 못했으나 군유현과 친하지도 않으니 얌전히 지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둘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이각 뒤, 철검성 정문 앞에 섰다.
“그럼 이제 작별이로군. 그동안 수고했어.”
양유는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냈다.
그러다 삯을 주기로 하고 데려온 것도 아닌데 너무 과하다 생각되어 반을 잘랐다.
“가면서 여비로라도 써.”
노상은 말은 감사하다고 하며 허리를 굽혔지만, 크게 고맙지는 않은 듯했다.
사실 은자 반 냥이면 큰돈은 아니다.
그래도 이거라도 받은 것이 어딘가.
노상은 자유를 찾은 기쁨에 양유에게 덕담까지 해 주었다.
“이렇게 무림에 나오셨으니 무명(武名)을 구주팔황(九州八荒)과 사해오호(四海五湖)에 널리 떨치시기 바랍니다.”
“너희 인활단도 번창하여 하남무림의 기둥이 되기를 바랄게.”
서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소리를 주고받은 뒤, 양유는 정문 앞에 늘어선 방문객 줄에 합류했다.
정문에는 통로 세 개가 있어서 하나는 방문객을 받아들였고 다른 하나는 철검성 무사들이 지나다녔다.
가장 넓은 통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주 중요한 손님, 철검성의 고위 간부 등이 이용할 것으로 짐작되었다.
노상은 신나서 날듯이 사라지는 것 같더니 웬일인지 양유에게 다시 왔다.
“무슨 일이야?”
노상은 철검성에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양유는 그렇다고 했다.
“그냥 구경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나 보죠?”
“내가 할 일 없이 철검성 겉모습만 보자고 정주까지 발에 땀 나도록 뛰어왔겠어? 볼 일이 있으니까 왔지.”
“철검성에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것은 아시죠?”
“그렇겠지, 하지만 난 아무나가 아니니까.”
노상은 양유가 자신만만한 것을 보고 자기도 데리고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양유는 왜 집에 가지 않고 갑자기 그러냐고 했다.
“철검성에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일생을 자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것인데, 그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양유는 그러라고 했다.
노상이 무림을 얼마나 동경하는지 오면서 잘 느꼈다.
그런데 무공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 좀 불쌍하지 않은가?
줄이 점점 줄어들고 양유의 차례가 왔다.
문지기는 양유에게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심부름으로.”
“별호와 이름을 대시오.”
“별호는 없고 이름은 양유요.”
문지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꺼운 명부를 꺼내 뒤적거리더니 양유에게 말했다.
“하남성에 그런 이름의 무림인은 없소.”
“그야 당연하지, 이제 막 출도했는데.”
“그럼 그 심부름을 보냈다는 이는 누구시오? 그분의 신분을 증명할 것을 보이시오.”
양유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억이 준 서신을 꺼내어 보니 겉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억이 그대로 사형에게 전해주라 한 것인데 찢어서 내용을 보여 줄 수도 없고.
“이걸 보낸 사람은 광억이라 하는데…….”
문지기는 또 명부를 뒤졌다.
그러나 거기에도 광억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안됐소만, 당신은 철검성에 들어올 수 없소. 좀 더 명성을 쌓은 뒤에 오든지 명성이 있는 사람의 심부름을 하든지 하시오.”
양유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여기 성주가 내 사형이다. 사제가 왔는데 어떻게 이리 문전박대를 한단 말이야?”
그러자 약간은 딱한 듯이 보고 있던 문지기가 거의 미친놈 바라보듯 하는 것이었다.
“성주님은 사제가 없다. 이제 보니 이거 괜히 성에 들어가 보겠다고 뻗댔던 거구만?”
양유는 침착히 대답했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많다.
군유현이 남들 모르게 사제가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그런데, 이것은 군유현을 만나면 다 밝혀질 일이라고 말했다.
문지기는 코웃음을 쳤다.
“성주님이 널 만날 정도로 한가하신 분인 줄 아느냐? 그리고 설사 남모르는 사제가 있다 하더라도 너 같은 놈은 아닐 것이다. 다음!”
“아, 아니 잠깐.”
문지기는 더 양유를 쳐다보지 않았다.
양유 때문에 줄이 한참 정체되어 있어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못 참고 그만 꺼지라고 야유를 했다.
양유는 하는 수 없이 줄에서 물러났다.
노상이 양유를 잡아끌었다.
이놈이 돌았나? 하고 보는데 노상의 표정이 진지하게 험악해서 가자는 데로 가 주었다.
정문이 보이지 않게 되자 노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흥분하며 소리쳤다.
“철검성주의 사제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할 줄 알았습니까? 차라리 내가 군유현의 아비다! 라고 하시죠?”
“사형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어떻게 아버지가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는 달리 군 사형이 내 사형이고 내가 군 사형의 사제라는 것은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사실이지.”
“왜 이러십니까? 저한테 그래 봐야 철검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양유는 너나 그렇지 자기는 철검성 내부에 발을 디뎌보는 것에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사칭하겠느냐고 했다.
노상은 믿지 않는 듯했다.
“아무튼 앞으로 철검성 가서 그런 얘길랑은 하지 마십시오. 자칫 철검성주 귀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경을 칠지 모릅니다.”
그뿐 아니라 동행인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고 배후를 캐다가 인활단을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했다.
불행상상의 나래를 얼마나 더 펼치나 지켜보았는데, 처자식이 어쩌고 친척이 어쩌고 하고 계속 이어 갔다.
“군 사형이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자꾸 사형, 사형하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삼십삼존(三十三尊)일 뿐 아니라 무림십대고수를 꼽으면 항상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군유현이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십대고수는 말 그대로의 뜻이라 알겠으나 삼십삼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상에게 뭐냐고 물었다.
“삼십삼존은 정사패마 주요 문파의 수장들을 한데 묶어 지칭하는 표현이죠, 정도 문파 열 개, 사도에는 십육세가, 패도 셋, 마도 넷 해서 삼십삼 개니까요.”
노상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삼십삼존의 이름을 줄줄 외기 시작했다.
한 열 명까지는 신속하게 튀어나오다 그다음부터는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었고 열다섯 명째가 되자 생각나지 않는 듯 얼버무리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양유는 삼십삼존이 아니라 다른 데 관심이 있었다.
“십대고수…….”
군유현이 그 정도의 강자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군유현을 길러 낸 광억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자신은?
아직도 무림에서 자신의 강함이 상하 직선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 무림인들이 머무는 중앙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사형처럼 맨 꼭대기에서 굽어보고 있을 것인가?
“아시겠습니까? 제가 다 양 대협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고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노상의 걸쭉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양유는 노상이 훈계조로 나와도 가만히 있었는데, 노상이나 문지기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무척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면 자기가 나서서 바보 아니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상식을 벗어나는 일은 종종 벌어지는 법이다.
그러한 일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때, 그것만큼 답답한 것이 또 없다.
진실만을 아는 것은 오직 자신뿐인 것이다.
“군 사형과 대면할 방법이 없을까? 만나기만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인데.”
이제 노상은 양유가 겸연쩍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망상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여겼다.
노상의 그런 눈빛을 느껴서 양유가 말했다.
“너도 내가 돌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기라도 할래?”
“무슨 내기요?”
양유는 은자를 내보였다.
모두 열여덟 냥 반이었다.
“내가 철검성주의 사제가 맞는지 아닌지. 다 걸어도 좋아.”
노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응낙했다.
망상병자의 자기확신을 두고 하는 내기라!
승률 십 할의 도박이 아닌가?
그러나 노상이 가진 은자라고 해봐야 아까 받은 반 냥뿐이었다.
“전 이 반 냥에다 은자 열여덟 냥만큼 절 부릴 권리를 걸죠. 제가 은근히 쓸모 있습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으나 상관없었다.
양유도 어차피 이길 내기라 생각해서 노상의 판돈을 받아들였다.
“그럼 철검성주와 만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해봐야겠군요. 단, 면전에서 사제니 뭐니 하는 말은 마십시오. 진짜 사제라면 먼저 인사를 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