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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4화
“뭐 하고들 있니?”
남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부인이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멜로디아와 하녀들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남작 부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멜로디아 앞에 깨진 찻잔을 보더니 천천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찻잔이 깨졌구나.”
“멜로디아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안 하던 실수를 다 하네요.”
이다는 태연하게 말했고 남작 부인은 멜로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앞에서 멜로디아는 숨이 막혔다. 한 번도 이런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멜로디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잠시 후 멜로디아는 겨우 입술을 뗐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멜로디아는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남작 부인은 멜로디아를 보고만 있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새 티 세트를 가져와라.”
별다른 질책도 무엇도 없이, 남작 부인이 다른 하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다는 미심쩍은 눈으로 제 어머니를 살폈다가 아예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건 멜로디아 네가 치우도록 하고.”
“네, 부인.”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멜로디아가 허리를 굽혔다. 깨진 파편을 하나하나 주웠다. 머뭇거리던 하녀들 중 하나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멜로디아는 그저 고맙다는 뜻으로 짧게 그 하녀와 눈을 맞추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다와 함께 지낸 몇 달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억울한 일은 없었다. 자기를 보호하거나 변호해 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멜로디아, 잠깐 날 따라오련.”
티타임이 끝나고 남작 부인이 멜로디아를 불렀다. 티타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멜로디아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남작 부인을 따라갈 수 있었다.
부인의 방까지 갔을 때 멜로디아는 무어라 꾸중을 들을 각오를 했다. 이다는 남작 부인 앞에서 멜로디아와 잘 지내는 척했지만, 남작 부인이 둘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모를 리 없다. 부인은 아마 그 일에 대해서 책망할 시기도 가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다와 지내는 게 많이 힘드니?”
멜로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무슨 말에든 대답할 수 있었다. 제 처지를 살피고 상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해도 좋았다. 그 생각이 들자 더한 서러움이 차올랐다.
“그 애의 그릇이 작은 건 나도 안다. 네가 좀 더 참고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부인은 멜로디아의 표정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멜로디아는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또박또박 분명하게, 그러나 공손하고 사려 깊게 하라고 배웠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네, 부인.”
멜로디아는 이다와 함께 지내는 게 점점 끔찍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만 대답했다.
아르디온을 다시 그 사람 복작이는 숙소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르디온은 어렸다. 고작 열두 살이다. 혼자 조용히 쉴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하인 숙소에서는 간혹 거친 일도 일어나는 걸 모르지 않는다. 아르디온을 그런 곳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다도 널 더 잘 알게 되면 달라질 테지. 나가 보렴.”
멜로디아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인은 이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멜로디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티타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오해받지 않았는데, 어쩐지 더욱 서러웠다. 멜로디아는 심호흡을 했다. 울음을 참으려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았다. 오늘은 내도록 울고 싶었다. 아르디온이 제 방에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종 생각한다.
왜 네레이드 백작가는 멸문당해야만 했을까. 누명일까.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셨다. 하지만 부모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들이었다. 멜로디아는 다정한 아버지가 나쁜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멸문당한 직후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저택에 갇혔다. 불타고, 망가진, 텅 빈 저택에 둘만 남겨졌다. 밖으로 나가는 모든 문이 감시하에 놓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방에서 동생을 안심시키며 함께 지냈다. 간혹 지키는 자들이 그 방문을 열고 식사를 넣어 주기도 했다. 딱딱한 빵과 차가운 우유. 멜로디아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르디온도 의젓하게 견뎠다.
오해일 거라고 믿었다. 곧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거대한 불행과 풍파 앞에 멜로디아는 무력했다. 온몸으로 아르디온을 끌어안아도, 이 작은 아이를 지키지 못할까 겁이 났다. 생전 처음으로 멜로디아는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나, 얘기 들었어.”
멜로디아가 작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아르디온은 이미 멜로디아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멜로디아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
“뭘?”
“티타임 때 일. 그 여자가 누나한테 함부로 대했다고.”
“별일 아니었어.”
“누날 싫어하는 거야.”
아르디온은 단언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다가 멜로디아를 싫어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멜로디아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
“부인께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앞으론 더 심해질 거야.”
“안 돼. 그랬다간 처지가 안 좋아질 거야.”
멜로디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인의 눈 밖에 나면 사용인들의 생활은 힘겨워진다. 가풍이 온화한 네레이드 백작가도 그러했는데 트리톤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 아르.”
멜로디아는 자기와 꼭 닮은 아르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앉지도 않고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어린 동생이 유독 외로워 보여 안타까웠다.
“난 괜찮으니까.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날 멜로디아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 새벽에 문득 깨는 일이 잦아졌다.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가, 피로감에 다시 눈을 감는다. 몸을 좀 더 웅크린다. 추운 계절이 아닌데도 행복한 꿈에서 깼을 때처럼 몸이 떨린다.
멜로디아는 여전히 겁이 났다. 아르와 헤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이다가 아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들지나 않을까.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웠고 그런 자기의 연약함을 동생이 모르길 바랐다.
“멜로디아, 너 이게 뭔지 알아?”
이다에게 가는 길에 샤론과 마주쳤다. 멜로디아는 샤론이 불쑥 내민 비닐 포장지를 잠시 살펴보았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쌌던 비닐 같았는데 내용물이 하나도 남지 않아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왜?”
“아니, 부인 방에서 계속 이런 게 나와서.”
“사탕 드시는 거 아냐?”
“부인은 그런 거 잘 안 드시는데…… 아까 식사 갖다 드렸는데 거긴 이런 게 없었거든? 휴지통 비우다가 보니까 이런 게 있는 거야. 꽤 됐어.”
“어제 드셨나 보지.”
멜로디아는 대수롭잖게 대답했지만 샤론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아. 다른 애가 어제 자기 전에 휴지통 비웠다고 했어. 그리고 부인 방에 이런 게 있을 일이 없는데…….”
“중요한 거야? 왜 그렇게 신경을 써?”
멜로디아는 되도록 이런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샤론이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이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닐까?”
“의원이 다녀간 적도 없잖아.”
“가끔 와. 서너 달에 한 번쯤…… 이제 올 때가 됐어.”
샤론은 마음이 약하고 세심했다. 멜로디아와 가장 친근한 하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이것저것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남작 부인이 좋은 사람인 건 인정한다. 몇 달 전이었으면 멜로디아도 부인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다의 괴롭힘이 계속되자 멜로디아도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대단한 일 아닐 거야.”
부인이 점차 말라 가는 게 눈에 보였지만 멜로디아는 개의치 않았다. 원래 귀족 여성들은 몸 가꾸기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애써 그렇게 넘어갔다. 이다는 그날도 성질을 내다가 엄한 자수틀을 부쉈고 그걸 치우는 동안 멜로디아는 샤론과의 대화를 거의 잊어버렸다.
과연 샤론의 말이 맞았다. 의원은 곧 왔다.
“넌 드레스를 정리해. 하나라도 장식이 떨어져 있으면 알아서 해.”
의원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이다는 벌떡 일어났다. 멜로디아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이다는 곧 방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부인의 건강이 안 좋으신가. 멜로디아는 드레스 룸에 들어서며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드레스는 너무 많았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멜로디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인에게 갔다가 돌아온 이다는 한층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입병까지 난 멜로디아로서는 불운한 일이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쨍하는 목소리로 이다가 따졌다. 이다가 유화를 그리느라 끙끙거리는 걸 보고 있던 멜로디아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특별히 이다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눈길이 간 것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뭘 훔쳐봐?”
“죄송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하는 수 없이 멜로디아가 무릎을 굽혀 사죄했다. 경험상 이렇게 굽히고 나가면 더 꼬투리를 잡히는 일은 드물었다.
멜로디아의 예상대로 이다는 딱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한참 멜로디아를 의식하며 맘대로 안 되는 그림을 앞에 두고 애쓰더니, 화가 난 듯 화구를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다행히 유화를 그리던 중이라 물이 크게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치워.”
이다가 턱을 치켜들고 명령했다.
멜로디아는 군말 없이 이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화구를 정리했다. 이다는 멜로디아를 내려다보다가 또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저택에 어린 아가씨가 갈 곳이 그렇게 많은가, 멜로디아는 여상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다가 없을 때의 한 달은 그저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익숙해지고 있다고 서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멜로디아는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이 미움받는 감각에 익숙하지 못했다.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다가 이런 식으로 엎드리게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남작 부인 앞에서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것이어서 더 괴로웠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련히 이다겠거니 싶어 멜로디아는 얼른 판에 올려 정리하던 화구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누나.”
“아.”
멜로디아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아르디온에게 다가갔다. 남색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아르디온이 문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여자가 나가는 걸 봤어.”
“아르, 아가씨 없어도 여기 들어오면 안 돼. 나가서 얘기하자.”
얘기하고 있다가 이다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게 뻔했다. 멜로디아는 서둘러 아르디온과 방 밖으로 나갔다. 이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멀리 갈 수도 없어 그저 문 앞에 서서 아르디온과 이야기를 했다.
“이 시간에 왜 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누나야말로 무슨 일이야?”
아르디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멜로디아의 손은 물감 때문에 엉망이었다.
“뭘 좀 치우느라. 어쩐 일이야?”
“그냥 누나 보고 싶어서.”
별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콱 목이 메었다. 멜로디아는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늘 네가 보고 싶어.”
손이 엉망이라 아르디온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불안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이다가 오면 어쩌지.
예상은 들어맞았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어깨 너머,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이다를 보았다. 하나로 묶어 정리한 적갈색 머리카락, 하얀 얼굴, 그녀가 걸을 때마다 구두 소리가 났다. 이다는 늘 높은 구두를 고집했다. 멜로디아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아가씨.”
“뭐야. 다 치웠어? 왜 놀고 있지?”
“죄송합니다. 잠시, 동생이 와서…….”
아르디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다는 멜로디아와 꼭 닮은 푸른 눈을 보고 움찔했다. 아르디온이 눈에 힘을 주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멜로디아는 늘 순한 인상이라 몰랐는데, 저런 표정을 지으니 그리 유순한 눈매도 아닌 듯싶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쳐다봐?”
이다는 누가 우위인지 알고 있었다. 냉랭하게 말하자 멜로디아가 얼른 아르디온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저녁 식사 때가 다 되었어요. 옷 갈아입혀 드릴까요?”
“그 더러운 손으로? 얘부터 보내.”
“누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아르디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멜로디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이다는 기가 막혀 멜로디아 곁에 선 아르디온을 내려다보았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어린애치곤 꽤 강경한 태도에 이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멜로디아가 좋은 사람이라니. 누가 그걸 모르나.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꼭 잘 대해 줘야 하나. 이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러 가지 하는구나.”
너흰 내가 못 가진 걸 다 가졌잖아. 어머니는 자주 멜로디아를 칭찬했다. 얼마나 온순하면서도 야무진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으며 얼마나 섬세하고 사려 깊은지. 또 얼마나 동생과 사이가 좋은지.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다. 제 처지도 모르고 무작정, 제 누나 편을 드는 걸 보니 더욱 속이 뒤틀렸다. 유치한 줄도 모르고 그저 한없이 멜로디아가 미웠다. 언제고 편들어 줄 사람이 있는 멜로디아가.
“너희 누나는 건방진 여우야. 같지도 않은 재주로 어머니 눈에 들어선…… 어차피 수도로 나가면 별것도 아닐 재주.”
이다가 있는 힘껏 비꼬았다. 열다섯 살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빈정거림이었다. 아르가 발끈해서 뭐라 말하려는데 멜로디아가 먼저 말을 돌렸다.
“어서 들어가세요, 아가씨. 저녁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이다는 코웃음을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멜로디아는 여전히 분을 못 이겨 숨을 몰아쉬는 아르디온을 보았다.
“아르, 난 괜찮아. 아가씨한테 그러면 곤란해져.”
“저 여잔 못생겼어.”
아르디온이 매몰차게 내뱉었다. 실제로 멜로디아는 이다가 꽤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디온은 어떻게든 이다를 모욕하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말했다.
“살도 쪘고 말투도 천해. 피아노도 못 치고 그림도 못 그리고 춤도 못 출걸? 자기야말로 사교계에 나가서 형편없는 평가를 받은 주제에. 결혼할 나이가 돼도 청혼 한 번 못 받을 거야.”
방음은 되지만 멜로디아는 불안해졌다. 다행히 문은 꼭 닫혀 있었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왜? 다른 형들도 다 그렇게 말했어. 저 여자가 예민한 건 분명 수도에서 따돌림당해서 그런 거라고.”
“모르는 거야. 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저 여잔 누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잖아.”
아르디온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멜로디아는 당황했다. 그때, 안에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멜로디아는 얼른 아르를 한 번 안아 주고, 옷에 물감이 묻지 않도록 손목으로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자주 저러는 건 아니야. 난 가 봐야겠다, 이따 누나가 네 방으로 갈게.”
아르디온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멜로디아는 걱정스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과연 이다는 덜 치워진 화구를 보고 성질을 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것도 내버려 두고 동생이랑 노닥거려?”
“죄송합니다. 바로 치울게요.”
얼른 뛰어가 아까 화구들을 올려놓은 판을 들었다. 막 일어났을 때 이다가 판에 놓인 물감과 붓을 손으로 쳐 전부 떨어뜨려 버렸다.
멜로디아는 아크릴 판을 들고 있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뚜껑이 올린 물감통과 붓 같은 것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는 게 보였다.
“똑바로 해. 알겠어? 안 그럼 너흴 잘라 버릴 테니까!”
멜로디아는 이다를 보았다. 화내지 말자. 지난번 티타임 때처럼 될 거야. 멜로디아는 자기를 다스렸다.
“네, 아가씨.”
“저것부터 치우고 저녁 가져와. 방이 깨끗해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먹지 않을 테니까.”
멜로디아는 화구를 다 치웠다. 카펫에 물감이 묻었지만 나중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이다에게 저녁을 갖다 주었을 때, 이다는 후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푸딩을 바닥에 쏟아 그날의 대미를 장식했다.
*
“뭐 하고들 있니?”
남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부인이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멜로디아와 하녀들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남작 부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멜로디아 앞에 깨진 찻잔을 보더니 천천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찻잔이 깨졌구나.”
“멜로디아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안 하던 실수를 다 하네요.”
이다는 태연하게 말했고 남작 부인은 멜로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앞에서 멜로디아는 숨이 막혔다. 한 번도 이런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멜로디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잠시 후 멜로디아는 겨우 입술을 뗐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멜로디아는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남작 부인은 멜로디아를 보고만 있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새 티 세트를 가져와라.”
별다른 질책도 무엇도 없이, 남작 부인이 다른 하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다는 미심쩍은 눈으로 제 어머니를 살폈다가 아예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건 멜로디아 네가 치우도록 하고.”
“네, 부인.”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멜로디아가 허리를 굽혔다. 깨진 파편을 하나하나 주웠다. 머뭇거리던 하녀들 중 하나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멜로디아는 그저 고맙다는 뜻으로 짧게 그 하녀와 눈을 맞추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다와 함께 지낸 몇 달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억울한 일은 없었다. 자기를 보호하거나 변호해 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멜로디아, 잠깐 날 따라오련.”
티타임이 끝나고 남작 부인이 멜로디아를 불렀다. 티타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멜로디아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남작 부인을 따라갈 수 있었다.
부인의 방까지 갔을 때 멜로디아는 무어라 꾸중을 들을 각오를 했다. 이다는 남작 부인 앞에서 멜로디아와 잘 지내는 척했지만, 남작 부인이 둘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모를 리 없다. 부인은 아마 그 일에 대해서 책망할 시기도 가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다와 지내는 게 많이 힘드니?”
멜로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무슨 말에든 대답할 수 있었다. 제 처지를 살피고 상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해도 좋았다. 그 생각이 들자 더한 서러움이 차올랐다.
“그 애의 그릇이 작은 건 나도 안다. 네가 좀 더 참고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부인은 멜로디아의 표정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멜로디아는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또박또박 분명하게, 그러나 공손하고 사려 깊게 하라고 배웠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네, 부인.”
멜로디아는 이다와 함께 지내는 게 점점 끔찍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만 대답했다.
아르디온을 다시 그 사람 복작이는 숙소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르디온은 어렸다. 고작 열두 살이다. 혼자 조용히 쉴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하인 숙소에서는 간혹 거친 일도 일어나는 걸 모르지 않는다. 아르디온을 그런 곳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다도 널 더 잘 알게 되면 달라질 테지. 나가 보렴.”
멜로디아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인은 이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멜로디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티타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오해받지 않았는데, 어쩐지 더욱 서러웠다. 멜로디아는 심호흡을 했다. 울음을 참으려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았다. 오늘은 내도록 울고 싶었다. 아르디온이 제 방에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종 생각한다.
왜 네레이드 백작가는 멸문당해야만 했을까. 누명일까.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셨다. 하지만 부모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들이었다. 멜로디아는 다정한 아버지가 나쁜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멸문당한 직후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저택에 갇혔다. 불타고, 망가진, 텅 빈 저택에 둘만 남겨졌다. 밖으로 나가는 모든 문이 감시하에 놓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방에서 동생을 안심시키며 함께 지냈다. 간혹 지키는 자들이 그 방문을 열고 식사를 넣어 주기도 했다. 딱딱한 빵과 차가운 우유. 멜로디아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르디온도 의젓하게 견뎠다.
오해일 거라고 믿었다. 곧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거대한 불행과 풍파 앞에 멜로디아는 무력했다. 온몸으로 아르디온을 끌어안아도, 이 작은 아이를 지키지 못할까 겁이 났다. 생전 처음으로 멜로디아는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나, 얘기 들었어.”
멜로디아가 작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아르디온은 이미 멜로디아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멜로디아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
“뭘?”
“티타임 때 일. 그 여자가 누나한테 함부로 대했다고.”
“별일 아니었어.”
“누날 싫어하는 거야.”
아르디온은 단언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다가 멜로디아를 싫어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멜로디아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
“부인께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앞으론 더 심해질 거야.”
“안 돼. 그랬다간 처지가 안 좋아질 거야.”
멜로디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인의 눈 밖에 나면 사용인들의 생활은 힘겨워진다. 가풍이 온화한 네레이드 백작가도 그러했는데 트리톤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 아르.”
멜로디아는 자기와 꼭 닮은 아르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앉지도 않고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어린 동생이 유독 외로워 보여 안타까웠다.
“난 괜찮으니까.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날 멜로디아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 새벽에 문득 깨는 일이 잦아졌다.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가, 피로감에 다시 눈을 감는다. 몸을 좀 더 웅크린다. 추운 계절이 아닌데도 행복한 꿈에서 깼을 때처럼 몸이 떨린다.
멜로디아는 여전히 겁이 났다. 아르와 헤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이다가 아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들지나 않을까.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웠고 그런 자기의 연약함을 동생이 모르길 바랐다.
“멜로디아, 너 이게 뭔지 알아?”
이다에게 가는 길에 샤론과 마주쳤다. 멜로디아는 샤론이 불쑥 내민 비닐 포장지를 잠시 살펴보았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쌌던 비닐 같았는데 내용물이 하나도 남지 않아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왜?”
“아니, 부인 방에서 계속 이런 게 나와서.”
“사탕 드시는 거 아냐?”
“부인은 그런 거 잘 안 드시는데…… 아까 식사 갖다 드렸는데 거긴 이런 게 없었거든? 휴지통 비우다가 보니까 이런 게 있는 거야. 꽤 됐어.”
“어제 드셨나 보지.”
멜로디아는 대수롭잖게 대답했지만 샤론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아. 다른 애가 어제 자기 전에 휴지통 비웠다고 했어. 그리고 부인 방에 이런 게 있을 일이 없는데…….”
“중요한 거야? 왜 그렇게 신경을 써?”
멜로디아는 되도록 이런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샤론이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이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닐까?”
“의원이 다녀간 적도 없잖아.”
“가끔 와. 서너 달에 한 번쯤…… 이제 올 때가 됐어.”
샤론은 마음이 약하고 세심했다. 멜로디아와 가장 친근한 하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이것저것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남작 부인이 좋은 사람인 건 인정한다. 몇 달 전이었으면 멜로디아도 부인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다의 괴롭힘이 계속되자 멜로디아도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대단한 일 아닐 거야.”
부인이 점차 말라 가는 게 눈에 보였지만 멜로디아는 개의치 않았다. 원래 귀족 여성들은 몸 가꾸기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애써 그렇게 넘어갔다. 이다는 그날도 성질을 내다가 엄한 자수틀을 부쉈고 그걸 치우는 동안 멜로디아는 샤론과의 대화를 거의 잊어버렸다.
과연 샤론의 말이 맞았다. 의원은 곧 왔다.
“넌 드레스를 정리해. 하나라도 장식이 떨어져 있으면 알아서 해.”
의원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이다는 벌떡 일어났다. 멜로디아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이다는 곧 방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부인의 건강이 안 좋으신가. 멜로디아는 드레스 룸에 들어서며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드레스는 너무 많았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멜로디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인에게 갔다가 돌아온 이다는 한층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입병까지 난 멜로디아로서는 불운한 일이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쨍하는 목소리로 이다가 따졌다. 이다가 유화를 그리느라 끙끙거리는 걸 보고 있던 멜로디아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특별히 이다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눈길이 간 것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뭘 훔쳐봐?”
“죄송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하는 수 없이 멜로디아가 무릎을 굽혀 사죄했다. 경험상 이렇게 굽히고 나가면 더 꼬투리를 잡히는 일은 드물었다.
멜로디아의 예상대로 이다는 딱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한참 멜로디아를 의식하며 맘대로 안 되는 그림을 앞에 두고 애쓰더니, 화가 난 듯 화구를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다행히 유화를 그리던 중이라 물이 크게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치워.”
이다가 턱을 치켜들고 명령했다.
멜로디아는 군말 없이 이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화구를 정리했다. 이다는 멜로디아를 내려다보다가 또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저택에 어린 아가씨가 갈 곳이 그렇게 많은가, 멜로디아는 여상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다가 없을 때의 한 달은 그저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익숙해지고 있다고 서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멜로디아는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이 미움받는 감각에 익숙하지 못했다. 자존심 같은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다가 이런 식으로 엎드리게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남작 부인 앞에서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것이어서 더 괴로웠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련히 이다겠거니 싶어 멜로디아는 얼른 판에 올려 정리하던 화구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누나.”
“아.”
멜로디아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아르디온에게 다가갔다. 남색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아르디온이 문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여자가 나가는 걸 봤어.”
“아르, 아가씨 없어도 여기 들어오면 안 돼. 나가서 얘기하자.”
얘기하고 있다가 이다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게 뻔했다. 멜로디아는 서둘러 아르디온과 방 밖으로 나갔다. 이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멀리 갈 수도 없어 그저 문 앞에 서서 아르디온과 이야기를 했다.
“이 시간에 왜 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누나야말로 무슨 일이야?”
아르디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멜로디아의 손은 물감 때문에 엉망이었다.
“뭘 좀 치우느라. 어쩐 일이야?”
“그냥 누나 보고 싶어서.”
별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콱 목이 메었다. 멜로디아는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늘 네가 보고 싶어.”
손이 엉망이라 아르디온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불안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이다가 오면 어쩌지.
예상은 들어맞았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어깨 너머,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이다를 보았다. 하나로 묶어 정리한 적갈색 머리카락, 하얀 얼굴, 그녀가 걸을 때마다 구두 소리가 났다. 이다는 늘 높은 구두를 고집했다. 멜로디아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아가씨.”
“뭐야. 다 치웠어? 왜 놀고 있지?”
“죄송합니다. 잠시, 동생이 와서…….”
아르디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다는 멜로디아와 꼭 닮은 푸른 눈을 보고 움찔했다. 아르디온이 눈에 힘을 주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멜로디아는 늘 순한 인상이라 몰랐는데, 저런 표정을 지으니 그리 유순한 눈매도 아닌 듯싶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쳐다봐?”
이다는 누가 우위인지 알고 있었다. 냉랭하게 말하자 멜로디아가 얼른 아르디온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저녁 식사 때가 다 되었어요. 옷 갈아입혀 드릴까요?”
“그 더러운 손으로? 얘부터 보내.”
“누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아르디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멜로디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이다는 기가 막혀 멜로디아 곁에 선 아르디온을 내려다보았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어린애치곤 꽤 강경한 태도에 이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멜로디아가 좋은 사람이라니. 누가 그걸 모르나.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꼭 잘 대해 줘야 하나. 이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러 가지 하는구나.”
너흰 내가 못 가진 걸 다 가졌잖아. 어머니는 자주 멜로디아를 칭찬했다. 얼마나 온순하면서도 야무진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으며 얼마나 섬세하고 사려 깊은지. 또 얼마나 동생과 사이가 좋은지.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다. 제 처지도 모르고 무작정, 제 누나 편을 드는 걸 보니 더욱 속이 뒤틀렸다. 유치한 줄도 모르고 그저 한없이 멜로디아가 미웠다. 언제고 편들어 줄 사람이 있는 멜로디아가.
“너희 누나는 건방진 여우야. 같지도 않은 재주로 어머니 눈에 들어선…… 어차피 수도로 나가면 별것도 아닐 재주.”
이다가 있는 힘껏 비꼬았다. 열다섯 살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빈정거림이었다. 아르가 발끈해서 뭐라 말하려는데 멜로디아가 먼저 말을 돌렸다.
“어서 들어가세요, 아가씨. 저녁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이다는 코웃음을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멜로디아는 여전히 분을 못 이겨 숨을 몰아쉬는 아르디온을 보았다.
“아르, 난 괜찮아. 아가씨한테 그러면 곤란해져.”
“저 여잔 못생겼어.”
아르디온이 매몰차게 내뱉었다. 실제로 멜로디아는 이다가 꽤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디온은 어떻게든 이다를 모욕하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말했다.
“살도 쪘고 말투도 천해. 피아노도 못 치고 그림도 못 그리고 춤도 못 출걸? 자기야말로 사교계에 나가서 형편없는 평가를 받은 주제에. 결혼할 나이가 돼도 청혼 한 번 못 받을 거야.”
방음은 되지만 멜로디아는 불안해졌다. 다행히 문은 꼭 닫혀 있었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왜? 다른 형들도 다 그렇게 말했어. 저 여자가 예민한 건 분명 수도에서 따돌림당해서 그런 거라고.”
“모르는 거야. 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저 여잔 누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잖아.”
아르디온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멜로디아는 당황했다. 그때, 안에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멜로디아는 얼른 아르를 한 번 안아 주고, 옷에 물감이 묻지 않도록 손목으로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자주 저러는 건 아니야. 난 가 봐야겠다, 이따 누나가 네 방으로 갈게.”
아르디온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멜로디아는 걱정스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과연 이다는 덜 치워진 화구를 보고 성질을 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것도 내버려 두고 동생이랑 노닥거려?”
“죄송합니다. 바로 치울게요.”
얼른 뛰어가 아까 화구들을 올려놓은 판을 들었다. 막 일어났을 때 이다가 판에 놓인 물감과 붓을 손으로 쳐 전부 떨어뜨려 버렸다.
멜로디아는 아크릴 판을 들고 있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뚜껑이 올린 물감통과 붓 같은 것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는 게 보였다.
“똑바로 해. 알겠어? 안 그럼 너흴 잘라 버릴 테니까!”
멜로디아는 이다를 보았다. 화내지 말자. 지난번 티타임 때처럼 될 거야. 멜로디아는 자기를 다스렸다.
“네, 아가씨.”
“저것부터 치우고 저녁 가져와. 방이 깨끗해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먹지 않을 테니까.”
멜로디아는 화구를 다 치웠다. 카펫에 물감이 묻었지만 나중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이다에게 저녁을 갖다 주었을 때, 이다는 후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푸딩을 바닥에 쏟아 그날의 대미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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