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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7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계절은 또다시 겨울이었다. 연말이라 멜로디아는 평소보다 더 바빴지만 아르디온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르, 사 줄까?”
아르디온은 모자를 보고 있었다. 어린 귀족들이 쓰는 앙증맞은 중절모였다. 아르디온은 차려입혀 놓으면 정말로 옷 태가 나는 아이였다. 요즘은 늘 유니폼만 입어 제대로 된 정장을 입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곧 생일이잖아. 선물로 줄게.”
“아니야. 그냥 본 거야.”
아르디온은 진열대에서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부인 드릴 것도 하나 사자. 연말이니까 사람들 줄 것도 사고…… 신발 한 켤레라도 안 살래, 아르?”
“어차피 신을 일도 많이 없는데 뭐.”
필요 없다는 말을 한 것뿐인데 멜로디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괜히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아르디온은 얼른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냥 맛있는 게 먹고 싶어.”
멜로디아는 원래 마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더 말랐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드레스를 입으니 말라 가는 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다. 이다가 있을 때보단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건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아르디온은 멜로디아가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몸이 약했다. 원래 약했다고 한다. 유난히 몸이 좋지 않은 날이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비틀거렸다. 날이 갈수록 누워 있어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한다. 멜로디아는 특별히 잔병치레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먹어도 살이 붙지 않았고 도무지 튼튼해 보이질 않았다.
누나가 어머니처럼 되면 어떻게 하지. 아르디온은 두려웠다.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지만.
“배 안 고파?”
음식을 먹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멜로디아를 보며 아르디온이 물었다. 기껏 식당에 왔는데 멜로디아는 또 반 정도만 먹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요즘 먹는 양이 더 줄어든 것 같다.
“응, 배부르네. 많이 먹어, 아르.”
아르디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누나가 오래 살면 좋겠다. 날 두고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랑 살면 좋겠다.

아르디온과 외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멜로디아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인이 쓰러지셨다고? 왜?”
샤론은 저택 앞까지 나와 멜로디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부인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다. 멜로디아는 너무 깜짝 놀라서 곧장 부인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부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곁에서 하녀들이 계속 몸을 주무른 탓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부인은 잠시 가만히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하다가 바짝 다가온 멜로디아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멜로디아만 남고 다 나가도 좋아.”
하녀들이 부인의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멜로디아는 막 뛰어 올라온 참이라 숨이 찼지만 부인 옆에 몸을 낮춰 꿇어앉았다.
“부인,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들었어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의원을 불렀대요, 곧 올 거예요.”
“그렇구나.”
부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트리톤 백작가에 온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부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너무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편지 온 것 있니?”
“편지요?”
멜로디아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없었어요. 다시 확인해 볼까요?”
“그럴 거 없다.”
부인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는 부인 옆에서, 멜로디아는 불안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니, 상태가 나쁘긴 한 것 같았다. 불이 어두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몇 달 사이에 더 심하게 야위었다. 그래도 이다가 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딸이 떠난 후 외로웠던 걸까. 연말이라 일이 많긴 했지. 이것저것 추측하고 있을 때 부인이 입을 열었다.
“멜로디아.”
“네, 부인.”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1년이 조금 못 되었습니다.”
부인의 목소리가 꺼질 듯 작아서 멜로디아는 부러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게 말하면 잘 못 들을 것 같았다. 그만큼 부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쯤 되었으니 들었겠구나. 트리톤에 대해서.”
멜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사용인들은 멜로디아에게 친절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남의 일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는 법이다. 그들은 종종,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트리톤 남작과 점점 이상해지는 부인, 어릴 적부터 예민하고 공격적이었던 이다에 대해 수군거렸다. 멜로디아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추측뿐이었지만 트리톤에 문제가 있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부인, 저는…….”
“아니.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부인이 걱정될 뿐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부인은 멜로디아의 말을 끊었다. 경솔하게 말한 걸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곧 좋아질 거다. 호들갑 떨 거 없으니 다들 진정시키고, 너도 나가 보렴. 곧 의원이 올 테니까.”
멜로디아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나 부인은 말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굽혀 보이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신뢰해도, 서로 몇 달을 협력했어도, 귀족 주인과 사용인 사이에는 이런 벽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과 힘든 마음을 혼자 싸안고 끙끙거릴지언정 아랫사람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귀족의 자존심과 불안감. 부인은 멜로디아에게 이다를 부탁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멜로디아는 부인을 이해했다. 부인은 좋은 사람이다. 고마운 사람이다. 그래도 멜로디아가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어쩐지 더 바쁠 것 같았다.
부인은 며칠을 앓았다. 특별히 고열이 나는 건 아니었는데도 자주 비틀거리고 두통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녀가 일을 쉬는 일은 없었다. 멜로디아는 최대한 부인을 돌보려 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이러다 괜찮아져. 걱정할 것 없다.”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다른 하녀들에게 들으니, 부인은 유독 이 시기쯤에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돌연 쓰러진 건 이번 해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멜로디아는 최선을 다해 부인을 도왔다. 과연 부인은 곧 몸을 회복했다. 그러나 상태가 나아진 것 같진 않았다.
“멜로디아, 지난번에 준 건 정리가 끝났니?”
“네?”
“저택 보수 일 말이다.”
“어제 다 정리해서 부인께 드렸는데요……. 확인하시고 꽂아 놓으셨어요.”
부인은 잠깐 우뚝 선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지, 참. 내가 잠깐 잊었나 보다.”
이런 일이 점점 잦아졌다. 부인은 많은 것을 잊어버렸고 멜로디아는 그때마다 그녀가 잊은 것을 일깨워 줘야 했다. 자연 멜로디아가 맡아야 할 일이 많아졌다. 멜로디아는 이미 정리해 둔 일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부인에게 알려 주었고, 부인은 일을 하다가도 편두통을 호소하며 약을 찾는 일이 늘었다.
멜로디아는 부인의 약이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인은 일전에 샤론이 보여 준 적 있던, 이상한 사탕 봉지 같은 것에 싸인 알약을 먹었다. 멜로디아는 그게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평범한 약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르디온은 점점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멜로디아를 보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트리톤에 머무는 1년 동안 부쩍 어른스러워진 아르디온은 작은 손으로 밤마다 멜로디아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누나, 요즘 부인이 좀 이상해지신 것 같지 않아? 사람들이 자꾸 그런 얘길 해.”
어느 밤 아르디온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새해 준비를 하느라 저택 사용인들은 전보다 더 바빠졌다. 아르디온도 조금 버거운 모양이었다. 멜로디아는 씻고 나온 아르디온의 머리를 만져 주다가 대답했다.
“좀 피곤하셔서 그런 거야. 다른 문제는 없어.”
“부인이 쓰러지실까 봐 걱정돼.”
아르디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고, 멜로디아는 동생의 깊은 마음 씀씀이에 괜히 뿌듯해졌다. 힘든 상황에서도 아르는 아르였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이다가 다시 올 거야. 전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누날 괴롭힐걸.”
멜로디아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아르디온은 어리광을 부리듯, 뒤에 있던 누나에게 푹 기댔다. 그러면서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영영 여기 안 돌아오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
멜로디아는 고민했다.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넘어가야 할까. 멜로디아는 후자를 택했다.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괜한 말을 해서 아르디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걱정스럽기만 하던 새해도 아무 탈 없이 맞이했다. 다행히 부인은 기운을 회복한 듯 보였고 자기가 해내야 할 모든 일들을 잘 끝냈다.
새해, 이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디아누 렐로와 외국에 있는 별장으로 잠시 떠난다고 했다. 들르지 못해 죄송하다는 편지만 한 통 날아들었다. 멜로디아는 편지를 관리하지 않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고, 그저 부인으로부터 이다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어떻든 멜로디아로선 좋은 일이었다.
멜로디아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1월 23일, 멜로디아의 생일이 돌아왔다. 생일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아르디온에게 들었는지 사용인들은 멜로디아의 생일을 챙겨 주었다.
“생일 축하해.”
샤론이 대표로 케이크를 건네며 즐겁게 말했다. 물건을 받은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멜로디아 몰래 준비한 것이라, 그녀는 더욱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사 인사를 했고, 사용인들과 함께 그 케이크를 먹었다. 부인도 한밤의 소란을 용인했다.
조촐한 파티가 끝난 후, 멜로디아는 동생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르디온은 연분홍색 구두를 내놓았다.
“누나 거야.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아르디온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멜로디아를 침대에 앉히고, 자기가 직접 구두를 신겨 주었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힘든 날도 있었지만 견디면 이런 날도 오는 것이다. 멜로디아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감사했다.
“누나, 조금만 기다려. 내가 크면 꼭 여기서 나가게 해 줄게.”
멜로디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르디온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아르, 우린 갇힌 게 아니야.”
“알아.”
아르디온은 구두를 다 신겨 주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멜로디아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디온도 이제 열세 살이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럼에도 다짐이 선 표정만은 견고했다.
“그래도 누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아르디온은 자기만큼 그걸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좀 더 빛나는 곳에. 좀 더 아름다운 자리에. 누나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아르디온은, 이다 역시 그걸 알아 누나를 더욱 괴롭힌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더욱 그 여자가 미웠다. 누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누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게 싫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난 괜찮아. 난 여기도 좋아, 아르.”
“누난 원래 어디든 좋아하잖아.”
아르디온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로디아는 머리를 풀어 내린 채였다. 어머니 같았다. 아르디온은 그녀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누나, 아직 죽지 않은 누나가 웃으며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따뜻했다.

*

아무 일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부인은 늦봄 무렵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을 데리고 강으로 나가 뱃놀이를 했다. 멜로디아는 이 뜻밖의 호의에 감사했고, 부인은 오랜만에 소년 소녀답게 신이 난 두 사람에게 모자를 선물했다.
부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고 앙상하던 몸에도 조금씩 살이 붙는 것 같았다. 부인은 전보다 공들여 치장하고 자주 외출을 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멜로디아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멜로디아, 이리 와 보렴.”
어느 날, 부인이 멜로디아를 불렀다. 부인은 어느 때보다도 들뜬 얼굴이었다.
“당분간 바빠지겠구나. 가을 예술제에 남편이 돌아오기로 했단다.”
부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잘되었다며 함께 기뻐했다. 물론 멜로디아로서는 특별히 좋을 게 없었지만, 부인의 몸이 좋아진 게 이것 때문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멜로디아는 한동안 또 정신없이 바빴다. 부인도 그랬고,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트리톤 남작가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부인과 남작 사이에 큰 불화가 있는 거 아니냐고 수군대던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남작의 귀환이 대단한 일이긴 한 모양이었다. 이다로부터도 한번 들르겠다는 편지가 왔다. 부인은 더욱 기뻐했다. 멜로디아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다도 1년 사이 많이 변했겠지,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494년 가을 예술제, 마침내 트리톤 남작이 돌아왔다.

지방의 가을 예술제란 대체적으로 규모가 작고 참여자도 많지 않았다. 예술제란 귀족 아가씨들이 춤과 그림, 악기를 겨루는 자리였지만 그건 수도의 이야기일 뿐, 지방 예술제는 영지 축제에 가까웠다.
멜로디아는 다른 하녀들에게서 바깥 분위기에 대해 들었다. 이번 가을 날씨는 최고였다. 비도 오지 않고 덥지도 않았다. 나비처럼 가벼운 옷을 입고 거닐기에 좋은 날씨였다. 부유한 집 아가씨들은 물놀이를 하러 나왔고 여유롭지 못한 평민들도 광장으로 나와 왁자하게 떠들었다.
어떻든 멜로디아는 주로 저택에 있었으므로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몰랐다. 멜로디아가 볼 수 있는 건, 트리톤 남작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다, 많이 컸구나.”
트리톤 남작이 이다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조금 곱슬곱슬한 적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사내였다. 특별히 인상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깊고 뚜렷한 눈매와 시원시원하게 뻗은 콧날이 그를 미남으로 보이게 했다. 멜로디아는 그의 잔을 채우는 아르디온을 잠시 보았다가 남작 부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적포도주가 투명한 잔에 찰랑였다.
“네, 아버지.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니 좋아요.”
이다는 평소보다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다는 트리톤 남작과 미묘한 거리를 유지했는데,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인지 어색함 때문인지 멜로디아는 알 길이 없었다.
“나도 그렇다.”
“이번엔 얼마나 머무르세요? 아직 일이 많이 바쁘신가요?”
“일이라.”
나직이 중얼거리며 트리톤 남작이 웃었다. 흐린 얼굴이었다. 남작 부인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트리톤 남작이 돌아온다 했을 때 들뜬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 얼굴에 불안이 어려 있었다. 멜로디아는 주위 하인들도 조심스럽게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걸 느꼈다.
“오래 있진 못할 거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들른 거야.”
순간, 식탁에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 깔렸다.
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남작 부인은 샐러드를 덜던 손을 우뚝 멈추었고, 이다도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아버지에게 눈을 고정했다. 트리톤 남작도 먹을 생각이 없는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누굴 말하는 거죠?”
부인은 언제나처럼 품위 있게 물었으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안색은 가여울 정도로 나빴다. 트리톤 남작은 흘끗 그쪽을 보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부인과 이다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남작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왔다.
화려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드레스는 군살 없이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드러난 어깨와 등을 지나 옆구리까지 쏟아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런히 남작의 손에 올리고, 여자는 검은 눈을 살짝 치켜뜬 채 걸어왔다. 남작보다 한참 어린 것 같았다. 이다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을 것이다.
“레다 스왈른이라고 하오.”
“처음 뵙겠어요, 부인.”
레다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 성의 있는 몸짓은 아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질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와 별장에서 머물게 됐소. 내일 신전에서 결혼 서약을 할 거고.”
트리톤 남작은, 정처와 딸이 자길 어떤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는 듯 기계적으로 말했다.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