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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8화


피 말리는 침묵이 흘렀다. 멜로디아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부인과 이다를 보았다. 아르디온도 슬쩍 남작의 뒤에서 반걸음 물러났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사용인들도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새하얀 얼굴이 참기 어려운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 딸 같은 여자를 데려오셨군요.”
어찌나 흥분했는지 이다는 온몸을 떨었다. 이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쏘았다.
“지난번엔 이름난 창녀, 그보다 더 전엔 남의 약혼녀, 어떨 땐 영지에서 채소 팔던 여자를 데려오시더니 이젠 스무 살도 안 된 여잘 데려오세요? 다음엔 아예 남자를 데려오시죠?”
“말조심해라.”
남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이다는 진정하지 못했다.
“어머니 혼자 영지를 관리하는 게 말이나 되나요? 세상이 비웃어요! 사교계에서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세요? 아버지 이름이 어찌나 유명한지 수도 부인들까지……!”
이다는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그 모멸과 수치를 어떻게 잊겠는가. 연인인 디아누에게조차 그 수군거림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말하지 못했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관심 없다.”
남작은 무심하게 이다의 말을 끊었다.
“어른들 일에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제발 정신 차리세요, 그전엔 별거 아닌 첩질이기라도 했지 결혼 서약까지 하면 어쩌시겠다는 건데요!”
“이다!”
이다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자 부인이 만류했다. 만류라기보다는 비명 같았다. 이다는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이다만을 보고 있었다.
“그만하거라.”
이다는 이를 악물었다. 선 채로 덜덜 떨던 이다는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기하던 하인들이 허둥지둥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닫히고 식당에는 정적만 내려앉았다.
“결혼 서약을 할 거면 하고 다시 가 버리면 되지, 왜 굳이 여기까지 데려온 거죠?”
남작 부인은 지쳐 보였다.
화낼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앙상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어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리라. 부인은 이미 그걸 알았다. 그녀는 일어났다. 휘청거림 없이, 똑바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멜로디아가 뒤를 따르려 했지만 부인은 손을 저어 거절했다.
멜로디아는 꼿꼿하게 걸어 사라지는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요.”
“당신은 그냥 즐기는 상대가 아니야. 정식으로 첩이 될 건데 사람들하고 얼굴은 봐야지.”
뒤에서 남작과 레다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멜로디아는 대강 흘려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아르디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멜로디아를 보고 있던 아르디온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다 트리톤은 자기가 사용인들 앞에서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트리톤 남작가의 짧은 치정극은 그날 밤 바로 저택 전체에 퍼졌다. 모두가 모이기만 하면 저녁 식사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수군댔다.
저택의 분위기는 다음 날까지도 좋지 않았다. 트리톤 남작은 참 대단한 인사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새로 들인 첩과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날이 지나고 다음 날 점심 식사 때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식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작 부인은 음식을 먹는 시늉만 하다 그만두었으며 이다는 눈물을 글썽이며 앉아 있기만 했다.
정절과 순결이 숭배받는 시대였다. 정숙함이야말로 부인의 미덕이었고, 남편의 순정은 최대의 명예였다. 설령 외도 상대가 있더라도 공공연하게 첩으로 들이는 건 모두의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었다.
멜로디아는 이다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라면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었을 것이다. 말로 위로할 수 없다면 평소보다 좀 더 다정히 굴며 마음을 달래 주려 했을 것이고. 그러나 멜로디아는 이다가 무섭고 불편했다. 저택에서 지낸 게 벌써 1년 반이었다. 멜로디아도 예전의 선하고 순수한 사람일 수만은 없었다.
곧 남작 부인은 그만 먹어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이다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이다도 사람들이 계속 자기와 어머니를 흘끔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이다는 앉은 채로 소리를 쳤다.
“뭘 보는 거야! 다들 고개 숙여!”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멜로디아도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 기척을 느꼈는지 이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의 일치였다.
짜악!
이다가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멜로디아는 버틸 생각도 못 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온 무게를 실어 치기도 했고, 얼굴을 맞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상태라 그대로 나동그라진 것이다.
“건방진 것.”
이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누구에게라도 화를 풀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멜로디아. 너도 어제 그 일을 봤겠지. 자기 입으로 말했지만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멜로디아가 다른 하녀들과 붙어 낄낄대고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고개 숙이랬지.”
멜로디아는 맞은 뺨을 감싸 쥐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폭력이었다. 트리톤에 팔리기 전에 이리저리 밀쳐졌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처음에 멜로디아는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 왜 뺨이 화끈거리는지도 몰랐다.
상황 파악이 되자 가슴에서 울컥, 낯선 분노가 치밀었다. 까닭 없는 폭력. 오직 상대의 기분 때문에 맞았다. 멜로디아는 카펫을 꽉 움켜쥐었다.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우습게 보지 마!”
이다가 쾅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멜로디아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하는 발악이었다.
“너희 전부, 어머니랑 날 우습게 보지 마! 밤새 쑥덕거린 거 다 알아,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열여섯 소녀는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소리쳤다. ‘이런 일’이라는 게 뭔지 아무도 몰랐지만 이다에게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멜로디아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웠다. 멜로디아도 알게 모르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명이 들렸다. 통증 때문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당장 일어서. 시위라도 하는 거야?”
멜로디아는 멍한 머리로 고개를 들어 이다를 보았다.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나. 비웃는 것처럼 보였나. 맹세코 그런 적 없었다. 멜로디아는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몰라 이다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다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저앉은 채 자길 바라보는 멜로디아는, 명백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양심의 가책은 갈 길 없는 분노와 뒤섞이고 말았다. 피해자는 나야. 모두가 날 비웃어. 아버지는 나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어머니는 무력해. 날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날 지켜야 해.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일어서랬지!”
이다는 지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소리칠수록 외로웠다. 아무도 이다를 이기려 하지 않았지만 이다는 진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아가씨를 만족시키기 위해 비척비척 일어났다. 이다는 멜로디아와 다른 사용인들을 한 번씩 노려본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아르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야.
멜로디아는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간신히 그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가만 안 둘 거야.”
아르디온이 이를 갈며 그렇게 말했을 때, 멜로디아는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줄 거야.”
아르디온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사랑하는 누나였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누나였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누나에게 손찌검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감히, 뭣도 아닌 지방 귀족 따위가. 그런 여자에게 누나가 맞았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가장 답답한 건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누나, 얼굴 좀 봐 봐. 부었어.”
멜로디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하녀들이 갖다 준 얼음주머니도 옆으로 밀어 놓았다.
사람의 몸이란 게 참 연약한 모양이었다.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고, 누굴 때려 본 일은 더욱 없어서, 뺨 한 대 맞았다고 얼굴이 이렇게 부을 줄은 몰랐다. 맞은 곳이 무겁고 뜨거웠다.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조차 불편했다.
“아르, 괜찮아. 사람들이 그러는데 내일 아침엔 좀 가라앉을 거래.”
“안 괜찮아.”
아르디온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 괜찮잖아.”
“걱정 마. 이다 아가씬 곧 다시 수도로 돌아갈 거야. 그럼 전처럼 지낼 수 있어.”
멜로디아는 동생에게 말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이 정도로 우는소리 하면 안 돼. 버티는 수밖에 없어.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진…… 하지만, 성인이 된다 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멜로디아는 낙천적인 편이었지만 상황이 이쯤 되자 조금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은 몸이 안 좋아.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거고.”
아르디온이 말했다. 멜로디아도 그걸 알고 있었다. 트리톤 남작의 노골적인 외도, 수도까지 퍼지는 소문, 땅에 떨어진 귀부인의 명예……. 그제야 멜로디아는 왜 부인이 극단적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다른 것은 다 열어 보여도 편지함만은 자기가 관리하겠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조차 황후와 단 한 명의 후비만을 맞은 시대다. 속내야 어떻든, 금욕 시대의 귀족들 중 그 누구도 트리톤 남작처럼 노골적으로 외도를 즐기진 않았다.
“부인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다가 부인 역할을 하게 될 거야. 그럼 누날 더 괴롭힐 거고, 우릴 각자 다른 곳으로 팔아 버릴지도 몰라.”
멜로디아는 기운이 쭉 빠졌다.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저 생각이 다 아르디온 머리에서 나온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세상 풍파를 겪었어도 아르디온은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저런 구체적인 어려움을 상상해 낼 수 없다. 혹시 하인들에게서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건 아닐까.
“누가 그래?”
“다들 그래.”
“다들 누구?”
“모두 다!”
아르디온은 홧김에 소리치고,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물었다.
“중요해.”
“누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든, 그게 뭐가 중요해? 사용인들이 다 그렇게 말해. 이다는 누나랑 날 싫어하니까 조심하라고, 자칫하다간 누나나 날 다른 곳에 팔아 버리고 서로 영영 만나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있을 법한 일이잖아.”
아르디온은 흥분 상태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을 진정시키기 위해, 앞에 선 동생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르디온이 그 손을 꽉 맞잡아 왔다. 일이 끝나자마자 멜로디아의 방으로 달려온 아르디온은 분노 때문에 모든 피로를 다 잊은 것 같았다.
“아르. 그 사람들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진 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다가 수도로 돌아가면 부인께 말씀드려서 우릴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하자.”
“우린 감시를 받고 있어. 우리 가문은 역모 혐의를 썼어. 알잖아. 최소 10년 동안 우린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멜로디아는 자기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면죄처럼 보인다. 연좌에서 비켜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황은 면죄도 방면도 아니었다. 유배였다.
“난.”
아르디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애꿎은 입술만 깨물다가, 아르디온은 멜로디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누날 여기서 나가게 해 주고 싶어.”
“아르.”
멜로디아가 아르디온을 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르디온은 눈을 감았다. 멜로디아가 노래처럼 속삭였다.
“우리 여기서 살자.”
누나는 무엇이든 견디고 버티며 여기서 살자고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게 돼.”
근 10년을, 여기서…… 이렇게 살자는 것이었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안락했다. 멜로디아의 목소리는, 상처 입고 지쳤는데도 자장가 같았다.
“그때까지 여기서 같이 살자.”
아르디온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멜로디아의 부은 뺨이, 설움을 참느라 붉어진 눈이 떠올랐다. 아르디온은 그러자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아르디온은 소리 내지 않고 다만 고개만 끄덕였다.

이다는 달아나듯 수도로 돌아갔다. 모두가 안도했다. 부인조차도 그랬다. 차라리 수도로 가서 이런저런 난리들을 보지 않았으면 싶었을 것이다.
트리톤 남작은 딸처럼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났다. 떠나는 그와 그의 첩을 배웅하며 사용인들은 이럴 바엔 남작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작도 이다도 떠나자 트리톤 저택에는 마침내 평화가 돌아오는 듯했다. 가을 예술제가 끝나고 겨울이 왔다. 트리톤은 또 새해를 맞았다. 멜로디아는 아무 일도 없이 열일곱이 되었다. 그렇게, 몇 달 내내 트리톤은 평화로웠다.
“부인도 참 대단하셔.”
부인의 시중을 들게 된 샤론이 소곤소곤 말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멜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톤 남작 부인은 정말 굳건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공식적으로 첩을 들여 망신을 당하고, 딸조차 도망치듯 떠난 저택과 영지를 홀로 지키는 여자였다. 멜로디아는 별다른 대꾸 없이 동의한다는 몸짓만을 취하며 샤론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해지신 것 같기도 하고.”
“왜?”
“넌 못 느껴?”
샤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못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멜로디아는 구체적으로 말하는 일을 피했다.
“글쎄.”
“내 생각엔…… 저택에 오는 그 의원 있잖아.”
“으응.”
“그 사람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요새 점점 더 자주 오지 않아?”
멜로디아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서 밥을 먹는 샤론을 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예전엔 자주 와야 석 달에 한 번이던 의원의 방문은, 요즘 들어 거의 한 달에 한 번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잦아졌다. 얼마 전에는 들른 지 3주도 되지 않았는데 한밤중에 급히 방문하기도 했다.
“넌 부인이랑 얘기 많이 하잖아. 이상한 거 없었어?”
“건강이야 늘 비슷하신 것 같던데. 사적인 얘긴 많이 안 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어.”
멜로디아는 일전에 의원이 왔다 했을 때 이다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때 이다는 좀 초조한 얼굴이었다. 혹시 부인에게 무슨 지병이라도 있는 것일까? 멜로디아는 몇 가지 추측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이럴 바엔 부인에게 직접 묻든지 좀 더 자세히 살피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나 먼저 가 봐야겠다. 정리가 덜 끝났거든.”
멜로디아는 샤론을 두고, 부인이 집무를 보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뭔가에 몰두해 있었다. 장부가 펼쳐져 있는 걸 보니 계산이 엉켰거나 뭐가 안 맞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부인을 살폈다. 샤론의 말을 들은 후라 그런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안색이 나빠 보였다. 손가락은 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앙상해졌고, 어깨도 드레스로는 가릴 수도 없을 만큼 야위었다. 목은 당장 부러질 것 같았다.
“저, 부인. 저녁은 드셨나요?”
멜로디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은 보던 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아니, 난 괜찮아. 식욕이 없구나.”
“그래도 안색이 나빠 보이세요. 간단한 거라도 내올까요?”
“아냐, 멜로디아. 난 정말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멜로디아는 반사적으로 흠칫 물러날 뻔했다.
부인의 눈자위가 움푹 꺼져 있었다. 촛불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인의 얼굴은 끔찍했다. 처음 트리톤에 왔을 땐, 좋은 인상은 아니어도 꽤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게다가 의식하고 본 탓인지 부인의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긴장한 것 같았다.
하지만 부인은 어쩐지 정말 기운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자세는 꼿꼿했고 손에도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멜로디아는 이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몸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정신만은 유독 각성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네, 부인.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
멜로디아는 더 묻지 못했다. 그저 무릎을 굽혀 보이며 인사하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