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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9화


일에 몰두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멜로디아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어 부인 쪽을 보았다. 부인은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사탕 같았다. 부인은 비닐 포장지에 싸인 그것을 입에 넣더니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멜로디아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멜로디아, 이리 와 보련.”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부드럽게 멜로디아를 불렀다. 나른한 목소리였다. 멜로디아는 발소리를 죽여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인은 편안해 보였다. 나쁜 얼굴색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태도였다. 부인은 어쩐지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멜로디아를 보며 살짝 미소했다.
“그러고 보니 네게 일을 맡긴 후론 내가 사용인들 휴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구나. 동생과는 밖에 나갔다 왔니?”
부인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여, 멜로디아도 웃음을 띠우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일이 바빠서 시내엔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저런, 새해인데. 내가 요즘 신경을 못 써 줬구나. 이거 받으렴.”
부인은 하얀 봉투를 꺼냈다. 멜로디아는 두 손으로 받았다. 부인이 열어 보라는 듯 눈짓해서 멜로디아는 안을 확인했다.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액수는 몰라도 꽤 큰돈일 게 분명했다. 멜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여상한 미소로 멜로디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인, 이건 너무…….”
거절하려고 봉투를 다시 내미는 순간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크게 휘청거렸다.
“부인!”
멜로디아가 급히 부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당혹했던 부인은 다른 팔로 책상 모서리를 짚고 몸을 지탱했다. 부인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멜로디아는 부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부인, 괜찮으세요?”
멜로디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으려 했지만 곧 주저앉고 말았다. 부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건 처음이었다. 멜로디아는 수년 전 어머니에게 그랬듯 부인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사람을 부를게요. 물 한 잔 먼저 드릴까요?”
아픈 사람을 대할 때는 침착해야 한다. 멜로디아는 최대한 당혹을 감춘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나 부인은 어딘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괜찮아. 그러지 말고, 저쪽 맨 아래쪽 서랍에서 안에 든 걸 하나 꺼내 오렴. 열쇠는 여기.”
멜로디아는 부인의 손에서 열쇠를 건네받았다. 서랍을 잠그는 작은 은색 열쇠였다. 멜로디아는 부인의 말대로 맨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서랍 가득, 사탕이 차 있었다. 비닐 포장지는 투명한 것도 같았고 희미하게 분홍빛이 도는 것도 같았다. 멜로디아는 서랍 한가득 차 있는 사탕을 어쩐지 불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유 없이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졌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멜로디아는 서랍 안으로 손을 뻗을 생각도 못 하고 그 내용물을 바라만 보았다.
“멜로디아, 어서.”
부인이 채근하는 소리가 났다. 서랍을 열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던 멜로디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저앉은 부인을 보았다.
“부인.”
멜로디아는 망설였다. 이렇게 참견해도 좋은 걸까.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부인은 자기와 동생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부인이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주고 있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부인을 위하는 것은 멜로디아의 선한 의무였다.
“부인, 그러지 마시고, 제가 방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따뜻한 걸 마시고 아침까지 누워 계시면 나아질 거예요.”
“소용없어. 어서 그걸 가져와.”
부인은 초조해 보였다. 바닥에 앉은 채 고개를 책상에 기대고 있던 부인이 대답 없는 멜로디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멜로디아는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로 서랍 속과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인……. 이건, 이건 그리 좋은 약 같지 않아요.”
여전히 네레이드 백작가의 멜로디아 아가씨였다면, 그녀는 이게 뭔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하녀로 2년을 살았다. 사용인들은 어쩔 수 없이 말이 많았다. 멜로디아는 귀족이었을 때조차 몰랐던, 귀족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들었다. 이런 종류의 ‘약’도 그녀가 들은 것들 중 하나였다.
“제가 따뜻한 우유를 한 잔 가져다 드릴게요. 그런 다음 저랑 같이 방으로 가세요. 네?”
“그게 아니면 안 돼. 다른 건 아무 소용도 없어, 당장 그걸 가져와!”
부인이 비명처럼 외쳤다. 멜로디아가 움직이지 않자, 부인은 안간힘을 써서 책상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책상 모서리를 지지대 삼아 힘 풀린 다리로 비틀비틀 멜로디아를 향해 걸어왔다.
부인은 거의 멜로디아의 발치에 엎어지다시피 했다. 멜로디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부인은 기는 것처럼 다가와 서랍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두 개의 동그랗고 하얀 약을 입 속에 넣고 삼켰다.
잠시 후, 부인은 조금 편해진 것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멜로디아는 부인 곁에 앉았다. 부인의 앙상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부인은 그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다. 멜로디아를 바라보는 트리톤 남작 부인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

부인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애써 모르는 척해 왔던 멜로디아는 더 이상 부인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멜로디아는 부인을 위해 노력했다. 일부러 단 음식을 권하기도 하고 규칙적인 식사를 유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총애받는 하녀라도 부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난 괜찮아, 멜로디아. 너무 예민하게 굴 거 없다. 사람들이 많이 먹는 약이니까.”
부인은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부인은 점점 더 심하게 약에 의존했다. 정체 모를 의원은 3주에 한 번, 2주에 한 번 하는 식으로 방문 기간을 줄이더니 5월쯤 되어선 한 주에 한 번 얼굴을 비쳤다. 벌써 6월이었다. 의원은 비밀스럽게 다녀가려 했지만 방문 간격이 짧아지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멜로디아는 키가 작고 어딘지 음습한 인상의 의원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찡그렸다.
“부인이 또 쓰러지셨어.”
식사 중에, 샤론이 멜로디아에게 속삭였다. 멜로디아는 이제 놀라서 달려가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부인은 다섯 번 혼절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번 쓰러지고 나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시간은 꾸준히 길어지고 있었다.
“그 의원이 오는 걸 막아야 돼.”
멜로디아는 자세히 얘기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는 아르디온에게조차 정체불명의 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부인이 자기를 믿었기 때문에 그 약이 있는 곳을 일러 줬다고 생각했다. 부인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약에 대해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소용없어. 네 말도 안 들으시잖아.”
멜로디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약을 먹어 기분이 좋을 땐, 부인은 멜로디아에게 무척 다정했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때를 틈타 멜로디아는 부인에게 약을 줄일 것을 권하거나 함께 산책이라도 하자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약효가 떨어질 즈음이면 부인은 눈에 띄게 예민해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약부터 찾았다.
멜로디아는 다시 한 번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인이 특별하게 대해 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는 하녀일 뿐이다. 주인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부인이 미쳐 가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2년을 그 곁에서 함께했는데도.
“샤론. 너 혹시, 부인이 무슨 열쇠 같은 거 갖고 계시는 거 본 적 있어? 이만한 은색 열쇠던데.”
멜로디아는 두 손가락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크기를 가늠해 보이며 물었다. 샤론은 살짝 인상을 쓴 채 기억을 더듬다가 언뜻 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예전엔 뭐든 빠뜨리고 다니시는 법이 없었는데…… 요샌 물건을 여기저기 두고 다니시는 것 같아. 그 열쇠도 요 근래야 봤어.”
멜로디아는 그 열쇠가 어디 있었는지를 물었다. 약을 어디로든 치워 볼 생각이었다.
위험 부담이 큰 계획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부인이 더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부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고, 병약해진 부인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멜로디아는 약을 치워 버리고 의원의 방문을 막아 볼 생각이었다. 주제넘는 짓인 건 알지만 하녀들과 하인들을 동원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샤론, 넌 혹시 의원이 오면 나한테 알려 줘. 또 올 때가 됐어. 부인에게 못 가게 해야 돼.”
멜로디아는 샤론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 말은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전해졌다. 아르디온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멜로디아는 구체적으로 대답해 주진 않았다. 동생은 누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누나의 말에 따라 주었다. 모두가 의원이 오는지 안 오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멜로디아는 죄책감을 느끼며 부인의 침실에서 열쇠를 훔쳤다. 한밤중에, 멜로디아는 조용히 부인의 집무실로 숨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조용했다. 멜로디아는 맨 아래 서랍을 열고, 열 개 정도 남은 약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비워 버렸다.
멜로디아는 다시 서랍을 잠그고 부인의 침실로 돌아갔다. 부인이 깰까 염려하며, 멜로디아는 열쇠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달빛을 받으며 잠든 부인의 여윈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가슴이 울렁거렸다.
멜로디아는 내일은 아침 일찍 부인과 함께 시내에 나갈 계획을 세웠다. 새 드레스를 고르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은 후 전처럼 뱃놀이를 가자. 초여름 햇빛을 받으며 거닐다 보면 부인은 나아질 것이다.
‘좋은 꿈꾸세요.’
멜로디아는 마음으로만 속삭였다.
그러나 다음 날, 멜로디아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부인은 잠에서 깨지 못했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부인은 잠에 빠지듯 혼수상태에 빠졌다.
저택은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창백해졌다. 눈부신 여름이었다. 부인이 쓰러지고 일주일 뒤, 이다 트리톤이 약혼자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다는 변덕스럽고 짜증스러운 만큼 감정에 잘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사용인들은 그녀가 엉엉 울며 들어오진 않더라도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희는 무얼 했냐고 사용인들에게 성질을 낼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다는 예상보다 훨씬 더 침착했다.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사용인들에게 화풀이를 하지도 않았다. 이다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돌아왔다. 붉은 구두를 신은 그녀 곁에는, 수도에서 급히 약혼식을 올린 디아누 렐로가 서 있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려.”
돌아온 이다가 맨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지시를 받은 하인이 즉시 움직였다. 디아누는 가볍게 이다를 한 번 끌어안았다가 그 하인을 따라 사라졌다.
“어머니께 가자.”
이다는 피로한 얼굴로, 그러나 꽤 평이하게 말했다. 내심 이다가 뭔가 트집을 잡지 않을까 걱정했던 멜로디아는 안도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이다는 따라오는 멜로디아에게 챙이 넓은 흰 모자를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상태가 나빠지셨지? 지난 가을부터?”
“네, 아가씨.”
“의원은.”
“들렀다 갔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
이다는 짐작했다는 듯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멜로디아는 이다를 살폈다. 원래도 날씬한 몸이었지만, 몸이 더 아름다워지고 키도 자란 것 같았다. 한결 풍성해진 적갈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희고 가는 목을 드러내자, 그녀의 뒷모습은 정말 남작 부인과 비슷했다. 1년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인데, 이다는 숙녀가 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
이다는 남작 부인 곁에 서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부인은 눈을 뜨지 못했다. 아주 가끔, 부인이 의식을 찾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중 단 몇 시간뿐이었다. 부인은 돌아온 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다는 부인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잠시 어머니 옆에 앉아 있던 이다는, 곧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꼿꼿한 자세였다. 이다의 얼굴에서 어떤 고집스러운 의지와 다짐이 엿보였다. 멜로디아는 이다를 방까지 모시고 지시를 기다렸다. 이다는 뜻밖의 요구를 했다.
“네가 어머니를 도와서 저택과 영지 일을 봤다고 들었어. 어머니가 쓰러지셨으니 이젠 내가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야 해. 우리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날 도와줘야겠어.”
멜로디아는 당혹해서 잠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다는 아가씨 특유의 고압적인 얼굴로 멜로디아를 내려다보았다. 구두를 신어 훌쩍 키가 커지자 이다는 자연 멜로디아를 약간 내려다보게 되었다.
성의 있는 사과도 무엇도 없었지만 이다 트리톤에겐 당연한 일이리라. 누가 사용인에게 사과나 해명 따위를 하겠는가. 멜로디아는 편할 대로 납득했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난 우선 씻어야겠어. 샤론을 부르고, 넌 영지 세금 장부랑 사용인들 임금, 저택 보수비 같은 걸 기록한 장부를 다 가져와. 어머니가 집무를 보시던 곳에 두면 돼. 저녁 식사 후에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이다는 줄줄 지시하고 피곤한 얼굴로 나가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멜로디아는 무릎을 굽혀 보이고 방 밖으로 나왔다. 이다도 열일곱 살이 되었으니 변한 것일까. 아니면 상황 때문에 태도가 달라진 것일까. 어떻든 이다의 얼굴에선, 지난번 트리톤 남작이 왔을 때 보인 이유 없는 적의가 사라져 있었다.
“샤론, 아가씨께 가 봐. 시중.”
멜로디아는 장부를 내놓기 위해 부인의 집무실로 가며 샤론에게 말했다. 샤론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아가씨 기분 어떠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좀…… 괜찮으신 것 같기도 해.”
“그래?”
샤론은 불안한 얼굴로 사라졌다. 이다가 트리톤 남작과 식사를 한 이후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해 보면, 사용인들이 일제히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어쩐지 이다가 샤론이나 다른 하녀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손찌검을 하진 않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멜로디아의 느낌은 정확해서, 이다는 계속 조용했다. 이다는 목욕을 마친 후 디아누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왔다. 디아누는 살뜰하게 이다를 챙겼다. 이다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디아누의 모든 친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확실히 수도에서의 1년 반 동안, 이다는 사랑받으며 지낸 것 같았다. 이다는 내내 얌전했고 사용인들에게도 친절했으며 디아누에게는 더없이 다정했다.
“편히 쉬어요. 이따 밤에 잠깐 들를게요.”
이다는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디아누에게 말했다. 디아누는 이다의 손을 잡고 집무실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둘은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누구도 몰랐는데, 디아누가 이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어떻든 멜로디아나 다른 사용인들 입장에선 이다가 짜증을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멜로디아는 샤론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다. 멜로디아는 이다에게 그동안의 특별한 지출 내역이나 특기할 만한 보수 사항 등을 설명해 주었다. 이다는 종종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묻기도 하며 성실히 그간의 일을 파악하려 애썼다.
“좋아. 나도 수도 아카데미에서 대략적인 재무 관리에 대한 건 배웠어. 하지만 실제로 이걸 해 본 적은 없으니까 네가 알려 줘야 돼. 시중은 샤론이 들고, 넌 여기서 날 보조해. 할 수 있겠어?”
“네, 아가씨.”
멜로디아는 뒤늦게, 이다가 수도 아카데미에 다녔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알고 있었는데도 새삼 낯설었다. 이다는 장부를 좀 더 뒤적거리더니 한숨을 내쉬고 탁 그걸 덮었다.
“디아누가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와 줬어. 그동안 멜로디아 네가 사용인들을 관리한 걸로 아는데, 대접에 소홀한 점이 없도록 신경 써. 나머지는 하던 대로 해. 어머니 문병을 오겠다는 편지가 오면 나한테 가져오고.”
“네. 부인께서는 편지나 초대장을 직접 관리하셨는데, 제가 할까요?”
멜로디아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이다는 한결 여문 얼굴로 멜로디아를 바라보더니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쓸데없는 건 가져올 필요 없어. 어차피 편지는.”
그쯤에서 이다는 말을 끊었다. 뒷말을 잇지 않고 일어나서 이다는 디아누의 방으로 향했다. 시중을 들기 위해 그녀를 뒤쫓아 가는 샤론과 눈인사를 하고, 멜로디아는 어쩐지 긴장이 쭉 풀려 잠시 벽에 기대섰다.
이다가 변해서 돌아왔다. 최악의 상황을 면해 다행이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가슴 깊은 곳의 불안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순진하게 구는군. 아니면 앙탈인가?’
멜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다도 변했다. 디아누 렐로도 분명, 달라졌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