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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10화


이다와 디아누의 약혼식은 수도에서 아주 간소하게, 또 아주 급하게 치러졌다. 트리톤 남작 부인이 의식 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치러진 약혼식이었다. 사실 약혼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둘은 트리톤 영지로 내려오기 전에 잠시 신전에 들러 서약을 했을 뿐이다.
두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공식적으로 서약까지 하고 내려올 줄은 몰랐던 사용인들은 디아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그 상황을 수습한 건 멜로디아였다. 멜로디아는 사용인들에게 디아누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지시하고, 이다의 안정에 디아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을 전했다.
멜로디아의 추측은 사실에 가까웠다.
“이다, 피곤하지 않아? 내가 도와줄까?”
디아누는 자주 이다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식사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그는 이다 곁에 머물렀다. 그는 이다를 졸졸 따라다니지도 않으면서 꽤 솜씨 좋게 이다를 챙겼고, 이다의 마음을 풀어 주었으며, 사용인들과도 전혀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다는 디아누와 함께 있으면 유독 부드러워졌고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아무 문제없이 시간이 흘렀다. 여름이 깊어 갔다. 나뭇잎이 우거지고 저택 창문은 늘 활짝 열려 있었다. 하인들은 햇볕 때문에 누렇게 타들어 가는 잔디에 자주 물을 주었고 식재료를 관리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멜로디아는 하루하루가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는 게 신기했다. 이다와 함께 있는데도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다른 사용인들도 한결 온화하게 변한 이다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트리톤 남작이 돌아오는 일만 생기지 않으면, 이다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8월, 여름이 길어지고 있었다. 부인은 여전히 의식을 차렸다 잃기를 반복했으며 특별한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이다는 생각보다 빨리 저택 일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차분하게 앉아서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탓인지 실수가 잦았다. 그래도 수습하기 어렵지 않은 정도였다.
“시내에 내려갈 거야. 따라와.”
무더운 날 이다가 멜로디아와 샤론에게 말했다. 이곳에 도착한 후 계속 일만 했으니, 이다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새 의원도 알아봐야겠다는 말에 멜로디아는 마차를 준비시켰다.
“이다, 같이 갈까?”
마차에 오르기 전에 디아누가 다가왔다. 이다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얼른 마차 안쪽으로 비켜 앉았다. 멜로디아와 샤론도 마차에 올랐다.
사병 몇을 데리고 마차가 출발했다. 이다와 디아누는 서로에게 계속 무어라 속닥거리며 웃었다.
“트리톤은 수도 같은 재미가 없죠?”
“조용해서 좋아. 수도는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웠어.”
“마음에 든다니 나도 좋아요.”
이다가 안심한 듯 디아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디아누가 자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멜로디아와 샤론은 머리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마차는 오래가지 않아 시내에 도착했다. 디아누와 함께 있는 탓인지, 이다는 멜로디아와 샤론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디아누와 둘이 있으려는 모양이었다.
“식사하고, 여섯 시 전까지 마차에서 기다려.”
“네, 아가씨.”
이다가 사라지자 멜로디아와 샤론은 훨씬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멜로디아는 조금 들떴다. 주로 동생과만 외출했고, 요 근래에는 그나마 저택 밖에 나갈 일도 드물었다. 트리톤에 온 후, 또래와 외출한 건 처음이라 새로웠다. 샤론도 제법 신이 난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샤론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멜로디아는 손목시계를 하나 샀다. 아르디온에게 줄 생각이었다. 남자아이지만 꽃과 함께 주는 것도 좋을 거야. 그 말에는 샤론도 동의했으므로 멜로디아는 남은 돈으로 노란 장미 꽃다발을 샀다.
마차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자, 이다와 디아누가 돌아왔다. 멜로디아는 오랜만에 이다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의 외출로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아가씨.”
“웬 꽃다발이야?”
“아. 동생에게 주려고요. 아가씨 드릴 것도 한 송이 사 왔어요.”
그러면서 멜로디아는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이다에게 건넸다. 이다는 그걸 받아 들며 흘끗 샤론을 보았다. 과연, 샤론도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이다는 멜로디아가 신기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런 면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예쁘네.”
이다는 선선히 대답하며 꽃을 받았다. 멜로디아는 돌아가는 내내 꽃향기를 맡으며 샤론과 함께 즐거워했다. 동생에게 줄 생각에 들뜬 모양이었다. 이다는 그 모습을 보며 습관처럼 디아누에게 기댔다. 디아누가 어깨를 감싸 주었다.
편안했다. 어머니의 상태는 악화되었지만, 의원도 새로 구했고 저택도 영지도 큰 문제없이 잘 꾸려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세상에서 자길 가장 사랑해 주는 약혼자도 있었다.
이다는 고개를 들어 디아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이다는 보았다. 디아누의 눈길이 노란 장미 다발을 안은 멜로디아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웃고 있는 멜로디아는 아름다웠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결 성숙해져 눈매가 깊어지고, 몸매도 한결 균형이 잡힌 듯했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얼굴에는 열일곱 소녀다운 혈색이 돌고 있었다.
이다의 가슴 한구석이 까닭 없이 선뜩해졌다.
“이다, 왜 그래?”
디아누가 이다의 얼굴을 봤는지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다는 디아누에게서 기댔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다는 디아누에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리라. 그저 과민 반응이겠지. 수도에 있을 때도 다른 여자가 디아누에게 말만 걸어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나. 이런 일로 디아누와 다투기도 여러 번이었다. 수도에서도 의심스러운 관계가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결국 모두 이다의 오해로 밝혀졌다. 더 이상 그를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이다는 애써 자기를 달랬다.

멜로디아는 가벼운 걸음으로 아르디온에게 가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이유 없이 꽃 선물을 주곤 했다. 무슨 날이냐고 물으면 아무 날도 아니지만 너희가 생각나서 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런 이유 없는 선물이 지금의 멜로디아를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러하듯, 아르디온도 사무치게 부모님을 그리워하리라는 걸 알았다.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다.
“멜로디아.”
일이 다 끝난 늦은 밤, 멜로디아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드물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다가 멜로디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디아누 렐로가 서 있었다.
“네, 부르셨어요?”
멜로디아는 얼른 무릎을 굽혀 보였다. 언제부터 따라온 거지. 전혀 느끼지 못했어.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지만 멜로디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둑한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멜로디아는 제가 끌어안은 노란 장미 다발 위로 등불의 빛이 어른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딜 가지?”
“저, 동생에게 갑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두 사람의 시중은 샤론과 다른 하인이 들고 있었다. 디아누가 뭔가 필요해서 여기까지 자길 따라왔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멜로디아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아니, 특별히 필요한 게 있어서는 아니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디아누는 미남이었다. 옅은 금발 때문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눈에 들어오고, 성실하고 다정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바짝 다가왔을 때, 멜로디아는 어떤 두려움을 느꼈다. 키 차이 때문에 그를 올려다봐야 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신을 감쌌다.
“동생에겐 좀 나중에 가도 되지? 시간을 내 봐.”
“무슨 일이신지 말씀을 해 주시면…….”
“밤이 늦었는데, 길을 잃었어.”
되도 않는 거짓말이었다. 특별히 거짓말임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여주인의 약혼자를 내버려 두고 갈 생각이야?”
“방이라면, 복도 끝으로 가셔서 계단을…….”
“데려다주지 그래?”
멜로디아는 여기서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멜로디아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아르디온의 방 근처까지 왔으니, 디아누가 머무는 곳은 여기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꽃다발을 안은 채 걸음을 서두르자 얌전히 따라오던 디아누가 덥석 멜로디아의 팔뚝을 잡아챘다.
“놔주세요!”
바짝 긴장하고 있던 멜로디아가 펄쩍 뛰었다. 그러나 디아누는 멜로디아를 놓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멜로디아를 복도 벽으로 밀쳤다. 멜로디아는 등을 부딪친 충격에 비틀거렸다. 디아누가 바짝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너희 아가씨는 순결 콤플렉스가 있어서.”
둘 사이에는 이제 장미 꽃다발이 끼어 있었다. 디아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그 꽃다발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러더니 멜로디아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거칠게 그 목을 물어뜯었다.
“어찌나 고상한 척을 하는지.”
멜로디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프고 무서운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디아누를 밀어 내려는데, 열아홉 남자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리에 자꾸 힘이 풀렸다.
“넌 목이 예뻐. 알아?”
숨 막혀. 아파. 어쩌지. 숨이 모자라. 멜로디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공기가 폐까지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안 돼, 하지 마세요, 하지 마!”
멜로디아는 몸부림을 쳤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난폭하게 드레스를 풀어헤치려는 디아누를 밀어 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싫어! 어머니, 안 돼! 놔, 놔, 아르, 도와줘! 아르!”
어쩌자고 열네 살 동생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버둥거렸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나!”
과연 온 복도를 울리는 비명을 들었는지 아르디온이 방에서 뛰쳐나왔다. 아르디온은 충격에 물든 얼굴을 하고 있더니 돌연 미친 사람처럼 디아누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디온은 그대로 온 무게를 실어 디아누를 밀쳐 냈다. 디아누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르디온이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그의 입을 후려쳤다.
잠시 놀라서 얻어맞고 있던 디아누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제 위에 올라탄 아르디온을 확 내팽개쳤다. 그러더니 작은 뺨을 있는 힘껏 갈기고 일어나서 배를 걷어찼다. 아르디온이 컥 소릴 내며 본능적으로 몸을 말았다. 다시 한 번 디아누의 발이 아르디온의 어깨에 꽂혔다.
덜덜 떨며 주저앉았던 멜로디아는 뜨거운 불덩이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무슨 힘이었는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아르디온을 걷어차는 디아누의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밀치려고 한 것인데, 남자를 힘으로 잡아당길 순 없었다. 디아누가 귀찮다는 듯 잡힌 팔을 휘두르자 멜로디아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감히 귀족의 얼굴을 쳐?”
디아누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는 아르디온의 턱을 걷어찼다. 열네 살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었다. 멜로디아가 전력으로 달려가 디아누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하여 그를 밀어 버렸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그만두세요!”
간신히 일어난 멜로디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허둥지둥 아르디온에게 가 그 앞을 막아섰다. 목에 여전히 디아누의 잇자국이 선명했다. 멜로디아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가씨 약혼자면서 이런 짓을 하다니요! 가세요!”
이제 뒷수습이 어찌 되든 좋았다. 차라리 사람들이 달려오길 바랐다. 과연, 디아누가 뭐라 말하려 했을 때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이 한밤의 고함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멜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디아누를 노려보았다. 뒤에서 아르디온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저 작은 아이를.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맹렬한 분노가 타올랐다. 아르디온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식으로 맞은 적이 없었다. 분노가 커지자 숨이 가빠 왔다.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면 달려가 목이라도 졸랐을 것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충동이 치밀었다.
“멜로디아!”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샤론과 다른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멜로디아의 흐트러진 옷차림과 목의 붉은 자국, 코피를 줄줄 쏟고 있는 아르디온을 보고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가세요.”
멜로디아는 자신을 억누르며 디아누에게 말했다.
“가지 않으면 아가씨를 부르겠어요.”
이다의 방은 여기서 멀다. 운이 좋다면 소란이 거기까지 전해지진 않았으리라. 디아누도 그걸 계산할 수 있었다. 그는 분한 듯 멜로디아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멜로디아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아르디온을 돌아보았다. 그 곁에 무릎을 굽혀 앉으며 멜로디아가 조심스레 아르디온의 고개를 받쳤다. 온 얼굴이 성한 데 없이 퉁퉁 붓고 코며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차가운 손이 제 배 속을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녀들이 멜로디아를 도와 소년을 일으켰다. 아르디온은 혼미한 정신으로도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거의 뜯어지다시피 한 드레스와 흰 목에 남은 잇자국을.
죽여 버릴 거야.
아르디온은 그때 맹세했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을 침대에 눕혔다. 소란이 일어난 장소가 방과 가까워 그나마 다행이었다. 샤론과 다른 하녀들은 허둥지둥 약과 물수건을 준비해 주었다. 멜로디아는 발개진 눈을 하고선 고맙다고 말했다.
“저, 멜로디아.”
떠나기 전 샤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모르시게 하는 게 좋겠지?”
멜로디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상황은 명백하게 이쪽에 불리했다. 이다는 디아누를 신뢰한다. 그를 사랑한다. 디아누의 말이라면 뭐든 믿을 것이다. 디아누는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을 주제 모르고 폭력을 휘두른 사용인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죽도록 억울했지만 남매는 무력했다.
“그리고 이거……. 밖에 떨어져 있어서.”
샤론이 조심조심, 뭉개진 꽃다발을 침대 옆 탁상에 올려놓았다.
짓밟힌 노란 장미꽃을 보고 멜로디아는 샤론을 향해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가 떠난 방에는, 아르디온이 색색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짓무른 꽃향기만 남았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이 정신을 잃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고 상처 위에 조심스레 약을 바르며 멜로디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나.”
아르디온이 부은 눈을 뜨려고 애쓰며, 멜로디아를 불렀다.
“미안해.”
멜로디아는 숨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곧 의식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르디온의 터진 입가에 약을 마저 발라 준 후, 멜로디아는 옆에 놓인 꽃다발을 보여 주었다. 이미 망가졌지만 향기는 여전했다.
“오늘 나갔다가 너 주고 싶어서 샀어.”
채 울음이 덜 가신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외출하고 오시면, 가끔 꽃을…….”
콱 목이 막혔다. 멜로디아는 울음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억지스럽게 이어 말했다.
“사 오셨잖아. 아무 날도 아닌데…….”
멜로디아는 동생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드물게 자기를 몰아세웠다. 맞은 건 아르인데 왜 우는 거야. 거기서 이렇게 작은 동생 이름이나 불렀으면서. 디아누와 상대도 안 될 걸 알면서, 무섭다고 무작정 불렀으면서.
“예쁘지?”
그렇게 물으며 멜로디아가 웃었다.
그녀는 아르디온이 우는 것을 보았다. 푸른 눈에서 흐른 눈물이 귓바퀴에 고였다. 아르디온은 곧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도, 누나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사용인들 관리 똑바로 해.”
다음 날 이다는 대뜸 말했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멜로디아는 약간 긴장했다. 집무실에서 마주치자마자 인사 대신 들은 소리가 사용인들에 대한 거라니.
“디아누 얼굴 봤어? 하인이랑 잘못 부딪쳐서 그렇게 됐다고 해서 더 캐묻진 않았어.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면 내 약혼자가 지나다니는데 그렇게 조심성 없이 움직여!”
이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아침에 디아누를 보니 그의 입가에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상처였다. 기겁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일하는 하인 곁을 지나치다가 팔꿈치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다는 일반적인 주먹 다툼에 대해 전혀 몰랐으므로 디아누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하인들이 여주인의 약혼자가 지나다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일을 하다 부딪쳤다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