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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11화


“죄송합니다. 더 주의시킬게요.”
멜로디아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순응했다. 목을 가리기 위해 턱 바로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는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이다의 말 때문인지 유독 가슴이 답답했다. 멜로디아는 이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아예 사용인 관리에서 손 떼. 임금도 내가 알아서 지급하겠어.”
멜로디아는 깜짝 놀랐다. 부인이 정신을 잃기 한참 전부터, 사용인들에 대한 일은 멜로디아가 처리해 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그만두게 하다니. 하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멜로디아는 그 결정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택에서 이다는 거의 고립된 상태였다. 이다도 그걸 알았다. 사용인들은 멜로디아를 편히 여겼고 이다를 기피했다. 이다도 그들에게 특별한 걸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좋을 게 없었다.
서서히 저택 내부 일을 모두 자기 손에 쥐어야 했다. 지금까진 익숙하지 않아 멜로디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 그녀를 배제할 때가 된 것이다. 디아누가 도와준다고 했다. 디아누가 성인이 되면 그와 결혼을 하리라. 그러면 모든 게 더 나아질 것 같았다.
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디아누가 성인이 될 다음 해를 상상했다. 8월이 끝나 갈 무렵, 수도에서 한 통의 편지가 오기 전까진.
공교롭게도 그 편지를 이다에게 건넨 건 멜로디아였다. 9월 초입, 편지를 분류하던 멜로디아가 문득 손을 멈추더니 이다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수도에서 편지가 왔어요. 렐로 공 앞으로 온 편지인데요.”
이다는 그 편지를 받았다. 여자의 감은 무서운 것이어서 그녀는 하얀 편지 봉투를 보자마자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서명된 이름을 보니 모르는 여자 이름이었다.
자기 것이 아닌 편지를 뜯어보는 건 당연히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이다는 디아누와 이런 문제로 충돌이 잦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다가 판단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많은 여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자제해 주길 부탁했고 디아누도 몇 번의 다툼 끝에 승낙했지만, 이런 식의 연락이라니…….
이다는 봉투를 뜯었다. 얇은 편지지가 나왔다.
편지는 ‘그리운 디아누’로 시작해서 ‘당신의 종달새로부터’로 끝났다. 멜로디아는 편지를 쥔 이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았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저 디아누의 편지를 저렇게 뜯어도 되는 걸까 잠시 생각했을 뿐.
그날, 멜로디아는 이다의 저녁 시중을 들지 않았다. 샤론과 다른 하녀들이 식당에 들어갔다. 멜로디아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방에서 쉬고 있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멜로디아.”
문을 열어 주자마자 샤론이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아가씨랑 렐로 공이 싸웠나 봐. 밥 먹는데 정말 둘이 한마디도 안 하더라. 아가씨는 인사도 안 하고 쌩 올라가 버리고……. 아까 방에서 큰소리도 났대.”
“그래?”
과연 사용인들의 걱정거리가 될 만했다. 이다가 디아누와 교제한 후 완전히 달라졌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둘 사이가 다시 틀어지면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무슨 편지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그냥 아가씨 기분이 좀 날카로워질 것 같아서, 미리 말해 주려고.”
“너도 아가씨 시중들잖아. 같이 조심하자.”
멜로디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샤론을 돌려보냈다. 샤론은 영 멜로디아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멜로디아……. 너 괜찮을까?”
“난 괜찮아.”
“렐로 공이 자꾸 널 건드려서. 어제 일도 그렇고……. 조심해. 아르는 괜찮아?”
“응. 오늘 하루 쉬었어. 며칠만 지나면 더 좋아질 거야.”
사실 아르디온은 괜찮지 않았다. 소년은 밤새도록 고열에 시달렸다. 멜로디아는 동생이 걱정되어 입술이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아르디온이 병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건 처음이었다. 아르디온은 온갖 생경한 통증과 굴욕감, 자책감에 짓눌려 괴로워했고 멜로디아는 힘이 되어 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샤론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용인들의 걱정은 크지 않았다. 모두 이다와 디아누가 며칠 다투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좋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며칠 후, 그사이 몇 번 더 큰소리를 낸 이다와 디아누는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했다.
이다는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배신당하는지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이다는 절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누차 다짐하며 자랐다. 게다가 그녀는 감수성 풍부한 열일곱이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인생을 걸고 사랑해도 좋다 생각한 남자의 바람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다의 의심은 날로 더해 갔다. 그녀는 저택으로 오는 모든 편지를 직접 확인하더니, 나중에는 디아누의 서랍장까지 뒤졌다. 그리고 디아누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하녀들을 의심했다.
“멜로디아.”
이다는 멜로디아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도움이라기보다는 감시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멜로디아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길 바라보자, 차마 ‘하녀들 중에 디아누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야 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자존심도 상했다. 이다도 자기가 품위 없이 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마, 멜로디아도 그걸 알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품위 없어도 좋아. 구차해도 좋아. 나는 어머니처럼 되진 않을 거야. 이다는 가끔가다 눈을 떠서 공허하게 두리번거리는 게 전부인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멜로디아는 자기가 위험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멜로디아가 물정을 모르고 순진하다 해도, 이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건 알았다. 디아누는 자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사랑도 무엇도 아닌 육욕이지만, 이다가 알게 되면 일은 단숨에 커질 것이다.
멜로디아는 필사적으로 디아누를 피했다.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디아누가 이다 곁에 오는 일이 드물어져서, 멜로디아도 그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아르디온이었다.
아르디온은 저택 바깥에서 일하기보단 안에서 일했다. 트리톤 저택 자체가 수도 저택만큼 넓은 편은 아니어서, 아르디온은 디아누와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딜 건방지게 쳐다봐?”
디아누는 대체로 그렇게 한마디 내뱉고 지나치거나, 혹은 그냥 무시했다. 아르디온도 특별히 그에게 달려들진 않았다. 다만 당장 죽이고 싶다는 듯 노려볼 뿐이었다.
힘이 있어야 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울며 비명 지르던 누나의 모습이 생생하다. 분노에 차 보내는 시간은 그 모습을 구체화시키고 부풀렸다. 어찌나 멜로디아를 걱정했는지 아르디온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 누나는 얼마나 무서울까. 새벽에 벌떡 일어나 그 생각이 들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화가 나고 억울해도, 죽여 버리고 싶어도, 아르디온은 고작 열네 살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르디온은 그것 때문에 더욱 이 저택에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그렇게 폭풍전야 같은 한 달이 갔다.
이다와 디아누는 서로 말을 하기 시작했으나, 상황은 예전 같지 않았다. 부인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고 이다는 끊임없이 디아누를 감시했으며, 디아누는 그 나름대로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일은 그때 터졌다. 지난해처럼, 가을 예술제 때였다. 이다가 예술제를 보기 위해 모처럼 디아누와 시내로 외출하고 돌아온 밤. 트리톤의 외동딸은 편안히 잠들었다. 정원 구석에서의 비명은 아가씨의 방까지 닿지 못했다.
“왜 샤론이 안 보이지? 어디 갔어?”
다음 날, 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시중들던 하녀를 찾았다. 잠시 후 트리톤 저택에 몰아칠 폭풍을 예상조차 못한 채.
“잠시 사용인 숙소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멜로디아는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이다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멜로디아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녀가 허투루 행동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멜로디아가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다는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사용인 숙소까지 갔다.
이다 앞에서 샤론은 울기만 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으며 목에는 퍼런 손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과 손발까지 다 퉁퉁 부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하녀들에게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이다는 샤론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다는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신체적인 폭력에 시달려 본 적이 없었다.
“뭐야?”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이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샤론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탈진 상태에 이른 채 그저 눈물만 흘렸다. 백치 같은 얼굴이었다. 이다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멜로디아를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샤론이……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며 멜로디아가 살짝 눈을 돌렸다. 여자들만 있는 자리에, 아르디온이 끼어 있었다. 멜로디아는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아르디온이 먼저 나섰다.
“제가 무슨 일인지 봤습니다.”
아르디온은 이다 앞으로 나아왔다. 이다는 아르디온의 얼굴도 엉망인 걸 알아차렸다.
이다가 당혹한 동안, 아르디온은 자기가 끔찍하게 미워하는 어린 아가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실을 들으면 이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아르디온은 즐거웠다. 누나가 알았다면 어떻게 이 상황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느냐고 했을 것이다. 누나는 착하니까. 하지만 누나가 뭐라고 하든, 이다가 망가지기만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렐로 공이 샤론 누나를 강간했어요.”
아르디온은 또박또박 말했다. 참혹한 일을 입에 담으면서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르디온은 시체처럼 창백해진 이다의 얼굴을 보며 보란 듯이 부은 제 뺨을 보였다. 입술 끝도 터져 있었다. 관자놀이까지 멍이 번진 그 얼굴을 보며 이다는 굳어졌다.
“제가 사람을 부르겠다고 했더니 절 때렸습니다. 제가 소리를 지르자 다른 사람들이 왔고, 렐로 공은 그때 달아났어요.”
방 안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 자리에 선 하인들은 이다의 숨이 아주 느려졌다가, 점차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자 이다의 가슴과 어깨가 들썩였다. 이다가 휘청하더니 샤론의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아르디온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다른 형들도 봤어요.”
“거짓말!”
이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숨을 헐떡거리며 내지른 소리였다. 아르디온은 냉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상처 입은 걸 보는 일의 쾌감이 아르디온의 가슴이 각인되었다. 아르디온은 이참에 디아누를 내보내고 이다를 망가뜨릴 셈이었다.
곧 이다는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샤론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달려 나갔다.
치장을 하기도 전에 샤론의 얘기를 들은지라 모습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다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랑과 의심에 빠진 열일곱 소녀는 태어나 거의 처음으로 숨이 차도록 달렸다. 이렇게 빨리 달린 적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디아누를 찾아간 이다가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랐다. 이다는 모든 사용인들을 다 물리고 디아누와 대화했다. 사용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을 죽였다.
이다는 그날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멜로디아도 그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이다는 집무실에도 오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샤론을 걱정했다.
이다가 조용한 건 딱 하루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 이다는 조용히 하녀들을 하나씩 불렀다. 하녀들은 이다와 1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다는 멜로디아를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멜로디아는 이다가 하녀들을 불러 뭔가 얘기를 나눈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나 하녀들은 멜로디아에게 이다가 무슨 얘길 했는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조금 불안했지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샤론이 큰일을 당해 다들 조심스러워졌으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이다가 식당에 사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이다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하루 사이에 엄청난 재난을 만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다는 처음 저택에 왔을 때보다 낯빛이 어두웠다.
그날도 멜로디아는 하루 종일 혼자 집무실에서 일을 했다. 방금은 샤론 옆에 앉아 있다 나오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다가 무슨 얘길 할지 몰라 긴장한 상태였다. 몇몇이 멜로디아를 힐끔거렸으나 멜로디아는 그걸 알지 못했다.
“내가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높은 자리에 선 이다는 사용인들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다는 그 말을 뱉어 놓고 한동안 침묵했다. 사용인들은 모두 조용히 기다렸다.
이다는 검은 눈을 들어 앞줄에 선 멜로디아를 바라보았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동시에 이다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눈빛이, 멜로디아를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했다. 멜로디아는 그저 선 채로 움찔했다.
“멜로디아.”
“네, 아가씨.”
“디아누와 무슨 일이 있었지?”
멜로디아는 굳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들켰다. 누가 말했구나. 설마 이다가 하녀들에게 이런 것까지 묻고 다닐 줄은 몰랐다. 잘 넘어갔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누가 말한 거야. 그 소란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말했을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녀와 하인들을 모두 합해 오십 명이 넘게 모인 식당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이리 가까이 와.”
멜로디아는 이다 앞으로 다가갔다. 몸이 덜덜 떨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디아누가 네게도 찾아갔었다고 하던데.”
“아가씨.”
“디아누는, 너랑 샤론이 유혹해서 어쩔 수 없었대.”
아연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걸까. 멜로디아는 이글거리는 이다의 눈을 보았다.
“디아누는 선하고 성실해. 얼마나 순진한 사람인데.”
이다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그 절박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와 샤론은 그런 적 없어요.”
멜로디아는 강하게 말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러나 마음의 동요 탓에 목소리가 떨렸다. 멜로디아는 자기를 가다듬기 위해 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흔들리지 마. 똑바로 말해.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시선을 이다에게 고정했다.
“신께 맹세코 저희는 결백해요. 단 한 번도 아가씨의 약혼자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말 안 했어?”
이다가 멜로디아 앞으로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반쯤 흐느끼고 있으면서도 따지는 투였다.
“하녀들이 그러더라. 며칠 전에 디아누가 널 찾아가기도 했다고. 디아누가 다친 것도 네 동생한테 맞아서 그런 거라던데.”
“전 그걸 말하면 아가씨가 절 오해…….”
“양심에 걸리는 게 있으니 말을 못 한 거겠지!”
이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멜로디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데 반대로 손발은 차가워졌다. 멜로디아는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억울함과 모욕감 때문에 솜털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전 하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어요! 그런데 렐로 공이 저를 억지로 벽에 밀치고 말리는 제 동생을……!”
철썩!
멜로디아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예상치 못했던 폭력에 멜로디아는 휘청거렸지만 뒤로 넘어지진 않았다. 익숙한 상황. 멜로디아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창녀 주제에! 내 약혼자를 모욕하지 마!”
이다의 목소리가 식당 끝까지 쨍하고 울렸다. 아르디온이 앞으로 뛰어나온 건 그때였다.
“누나!”
아르디온이 도열한 사람들을 밀치며 멜로디아에게로 달려갔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팔을 잡고 얼굴을 살피다가, 홱 고개를 돌려 이다를 노려보았다. 미친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다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 아르디온이 손을 뻗었다. 그대로 이다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은 아르디온은, 확 그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다의 얼굴이 낮아진 순간 아르디온이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