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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12화
퍽 소리와 함께 이다가 그대로 나뒹굴었다. 아르디온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 숨을 몰아쉬며 다시 이다에게 달려갔다. 앞에 있던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르디온을 막았다.
“죽여 버릴 거야! 네가 뭔데! 뭣도 아닌 게 누나한테!”
아르디온은 차마 그 끔찍한 단어를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아르디온은 제 몸을 붙잡은 하인들을 밀치며 미친 것처럼 버둥거렸다. 이다는 얼얼한 뺨을 감쌌다가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이다는 예상보다 침착했다.
그러나 좋은 종류의 침착함은 아니었다. 이다는 짐승처럼 날뛰는 아르디온과,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멜로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곧 그녀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과연, 딸은 어머니 인생을 닮는다더니.”
이다가 턱짓으로 멜로디아를 가리키자,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멜로디아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이다 앞에 섰다. 멜로디아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이다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르디온이 비명을 질렀다.
“별 같지도 않은 여우에게 남자를 뺏길 뻔했잖아.”
이다는 멜로디아 앞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댔다. 낮게 속삭였다.
“너희 어머니도 남의 남자를 후리며 산 모양이지?”
이번에 비명을 지른 건 아르디온이 아니라 멜로디아였다.
멜로디아는 불시에 이다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대로 몸을 밀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참을 수 없어. 우르르 몰려와 제 어깨를 잡아채는 하인들의 억센 손을 느끼며 멜로디아는 온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멜로디아의 비명이 식당 전체에 울렸다.
“남매가 쌍으로 손버릇하고는.”
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이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날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어머니도 쓰러진 이 저택에서, 내 남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내가 움직여야 해. 이다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난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멜로디아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트리톤 저택에 온 이후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멜로디아는 제가 심하게 몸부림친 탓에 옷이 망가지고 머리가 헝클어지는 줄도 몰랐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하늘에 맹세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래? 그걸 누가 증명해 줄 거지?”
이다가 이죽거렸다. 그러면서 이다는 소란에 가까이 몰려든 사용인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너와 샤론의 결백을 누가 증명할 거냐고. 디아누가 널 찾아갔을 때 다른 하녀들도 거기 있었다던데. 누구든 증언해 봐. 내가 듣겠다.”
멜로디아는 휙 주위를 살폈다. 눈이 마주친 하녀들 중에는, 디아누가 자길 억지로 취하려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있었다. 멜로디아가 간절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멜로디아가 어딜 보는지 안 이다가 그 하녀를 지목했다.
“너.”
“네, 네?”
“말해 봐. 그날 거기 있었나? 뭘 봤지?”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황은 명백했다.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상황이야 어쨌든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다도 멜로디아를 때렸으나 아가씨가 하녀를 때린 것과 그 반대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이미 이다는 디아누가 결백하고 멜로디아가 음녀라 결론지은 상태였다.
“전, 저는 나중에 도착해서…… 잘은 못 봤어요.”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멜로디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았다. 다 아는 얼굴이었다. 2년을 저택에서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다의 물음 앞에 다 모르겠다는 대답만 내놓았다.
“형! 형도 봤잖아요! 그 사람이 누날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형도 봤잖아요!”
아르디온이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그러나 그 하인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샤론 누나를 어떻게 하는지도 봤잖아요!”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멜로디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혼자 얼굴을 붉힌 채, 사람들의 침묵과 배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막힌 벽을 향해 소리치는 동생이 보였다.
멜로디아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다들 봤잖아! 다 알잖아, 다 알고 있잖아!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왜!”
“아르.”
멜로디아가 동생을 불렀다. 아르디온이 시뻘게진 눈으로 멜로디아를 돌아보았다. 붉은 뺨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멜로디아는 기듯이 다가가 아르디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일부터 이 둘을 저택에 들이지 마.”
이다가 둘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지시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지만, 유배 형식으로 온 거니 어쩔 수 없지. 둘 중 하나라도 저택에 발을 들이는 날엔 다들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사람들은 조용했다. 이다는 그대로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구두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사용인들도 하나씩 그 자리를 떴다.
엉망이 된 식당에는 곧 멜로디아와 아르디온만 남았다.
“아르. 아르, 울지 마.”
멜로디아가 아르디온의 뺨을 쓸어 주며 말했다. 아르디온은 이를 악물었다.
제 뺨에 닿은 누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떨림이 낯선 듯, 멜로디아가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했다. 손이 싸늘했다. 울지 말라면서, 멜로디아는 울고 있었다. 자기가 우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창녀 주제에!’
‘너희 어머니도 남의 남자를 후리며 산 모양이지?’
아르디온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여자를 때렸다. 이다를 때린 손이 욱신거렸다. 그 입을 뭉개 버렸어야 했는데. 갈 길 모를 증오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손끝 발끝의 혈관이 뛰는 것까지 느껴졌다. 소년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 그 욕망이 너무 강해 온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누나.”
아르디온이 떨리는 누나의 손을 잡았다. 멜로디아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부은 뺨을 감싸 주었다. 이 가벼운 접촉이 혹여 통증이 될까 조심하면서.
“울지 마.”
아름다운 나의 누나. 정결한 나의 누나. 이토록 연약한.
“내가 갚아 줄게.”
아르디온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반복했다.
“내가 갚을 거야.”
*
사용인들은 남매를 피했다. 아무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두 사람이 식당으로 내려가면, 사용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르디온은 한 스푼도 먹지 못했다. 그는 빵을 찢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어서 스프에 찍었다가, 또 내려놓길 반복했다. 앞에 있는 누나 때문에라도 제대로 먹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르.”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르디온이 고개를 들었다. 멜로디아가 미소 짓는 얼굴로 자길 보고 있었다.
“많이 먹어.”
멜로디아는 평소 같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리고 아르디온도 그걸 알았다. 누나라고 지금 속이 편할까. 식당의 숨 막히는 정적, 눈은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힐끔거리는 사람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어울리고 떠들던 사람들이 이토록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마음 여리고 착한 누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누나는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응.”
아르디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빵을 먹었다. 다른 형들과, 이건 늘 싱겁게 나온다며 불평했던 닭 요리도 먹었다.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아르디온이 다 먹길 기다리면서, 멜로디아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했는데, 하고 아르디온은 생각했다. 씩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누나도.”
“난 걱정 안 해. 네가 있잖아.”
멜로디아는 애써 장난스러운 척 웃었다. 아르디온도 마주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억지인 걸 알면서, 걱정하지 말라, 나는 괜찮다 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인가 보다. 아르디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
아르디온은 맞장구를 치면서 멜로디아의 야윈 손목과 움푹 꺼진 눈을 보았다. 터진 입술과 손질이 덜 된 옷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누나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내가 있잖아.”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일어났다.
그날, 멜로디아는 정원에서, 아르디온은 마구간에서 일하게 하라는 이다의 지시가 전달되었다. 말을 전한 하녀는 달아나듯 사라졌다.
두 사람은 묵묵히 일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평소와 비슷한 얼굴을 유지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누군가 먼저 멜로디아에게 말을 붙였다. 아르디온에게 지목당하고도 증언하지 않았던 하인이었다.
“멜로디아.”
그는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정원에서 일하다 보니 하인들과 많이 마주치게 되었다. 멜로디아는 잔디 사이에서 잡초를 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하인이 멜로디아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날은 다들 어쩔 수 없었어.”
멜로디아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멜로디아가 응대하지 않자 그는 조금 무안해진 듯 다른 말을 덧붙였다.
“지금도 다들 아가씨 눈밖에 날까 봐 눈치 보고 있는 거야.”
“네.”
멜로디아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다시 일거리로 고개를 돌렸다. 늦가을 따가운 햇볕에 잔디가 누렇게 시들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더 이상 하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하인은 일어나서 멀어졌다. 멜로디아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상대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다. 조금 예민해져서 그랬겠지.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내일은 다르겠지. 그러나 이 저택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던 하녀들. 아르디온을 우악스레 붙잡던 하인들.
2년을 함께했는데, 그들은 멜로디아 면전에서 쾅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멜로디아는 처음으로 냉소했다. 저들의 사정에는 관심 없어.
‘창녀 주제에!’
멜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바닥을 기며 잡초를 뽑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머니에 대한 말은 차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멜로디아는 생경한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며칠 후, 멜로디아는 샤론이 저택 밖으로 쫓겨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동생도 그 사실을 아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아르디온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멜로디아도 굳이 묻지 않았다.
긴 가을은 침묵 속에 지나갔다. 울긋불긋 온힘을 다해 타오르는 나뭇잎들은 상처받은 남매의 마음에도 새하얗게 불을 질렀다.
저택에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첫눈 오는 날이었다.
“이다를 불러오렴.”
트리톤 남작 부인이 의식을 회복했다.
이제껏 그녀는 종종 깨어나긴 했지만, 의식을 차렸다고 보긴 어려운 상태였다. 헛소리를 하다가 다시 정신을 잃거나 그저 조용히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해의 첫 눈발이 날리던 날, 부인은 마침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 이다가 정신없이 그 방으로 달려왔다. 약혼자인 디아누도 함께였다. 부인의 안색은 놀랄 정도로 나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니?”
“얼마 안 되셨어요.”
이다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했지만, 불행히도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겨울이구나.”
부인은 어딘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눈에는 총기가 많이 돌아와 있었다. 이다는 어머니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그녀의 야윈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따라온 디아누를 소개했다.
“어머니, 디아누 렐로 공이에요. 저와…… 저와 약혼했어요.”
이 말을 하는 데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했다.
이다는 어머니가 쓰러져서 일주일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디아누와 약혼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잘못되면 이다의 남편이 사실상의 트리톤 영주 역할을 해야 할 거라는 디아누의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은 옳았으므로 이다는 사랑하는 그와 조용히 약혼식을 올리고 영지로 달려 내려왔었다.
“약혼이라니?”
과연 부인은 깜짝 놀랐다.
“약혼이라니, 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니? 내게 알리지도 않고 약혼을 했다니?”
“어머니, 제가 설명할게요.”
이다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에게 자기와 약혼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부인은 인내심을 갖고 그 말을 다 들어 주었으나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부인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디아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딸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네.”
“네, 실례하겠습니다.”
디아누는 그린 듯한 웃음을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이다의 손을 힘주어 잡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누가 나가자 부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댔다.
“이다……. 느낌이 좋지 않구나.”
“걱정 마세요. 저택이나 영지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네 약혼자 말이다. 이제껏 별일 없었니?”
이다는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의 눈은 또렷했다. 어머니가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다는 건 이다도 알고 있었다. 쓰러지게 되어 그 약을 끊으니, 어느 정도 독기가 빠진 모양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말에 이다는 더욱 디아누와의 문제에 대해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요……. 저흰 잘 지내요.”
“그렇구나.”
부인은 주의 깊게 이다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딸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다.
이다는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디아누가 이상해요. 수도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아요. 늘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말하고 저도 그 말에 동의하지만, 매번 가슴이 뛰고 불안해요. 그리고 가을 예술제 때는, 그가 샤론을…….
그러나 이다는 그중 단 한 가지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말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두려웠다. 말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의심이 사실로 변할 것 같았다.
이다는 희미하게나마 디아누의 거짓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약 디아누가 정말 샤론을 강간한 거라면. 멜로디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디아누와 헤어져야 하나.
‘트리톤 남작은 유명하지. 지난번엔 어떤 창녀를…….’
사교계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은 남작 부인에 대해서도 입방아를 찧어 댔다. 그 사이에서 느꼈던 모멸감. 말이 어떻게 이토록 치명적일 수 있는가.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인 동시에 묵직한 둔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까지 디아누와 파혼한다면,
트리톤은 최대의 스캔들 가문이 될 것이다.
“저택 일이며 영지 일을 보느라 힘들었겠구나. 멜로디아가 많이 도와주지 않았니? 멜로디아는 어디 있지?”
이다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혹여 어머니가 깨어나셔서 멜로디아를 찾으면 뭐라고 하지. 멜로디아를 신뢰하는 어머니에게, 그 하녀가 내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다는 자신이 없었다.
멜로디아에게 그토록 불같이 화를 내긴 했지만 사실 디아누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멜로디아를 내친 건, 그러는 편이 자기에게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말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한단 말인가.
“멜로디아는 잠깐, 쉬라고 보냈어요. 너무 오랫동안 일만 한 것 같아서.”
“그러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부인은 작게 웃으며 말하고, 대견하다는 듯 덧붙였다.
“너도 이제 가문의 안주인이 될 준비가 됐구나. 사람을 돌보고 챙길 줄도 알고…….”
이다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야윈 손을 잡아 주었다.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지만, 딸의 행동에 감격한 부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쁠 텐데 방해된 건 아니니? 나도 좀 더 자고 일어나야겠구나.”
부인이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다는 그러시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쳐서 방을 어둡게 해 주었다. 나가기 전, 이다는 문가에서 부인을 돌아보았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이제…….”
이다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별거 아닌 말인데, 긴장이 되었다.
“약은, 드시지 마세요.”
퍽 소리와 함께 이다가 그대로 나뒹굴었다. 아르디온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 숨을 몰아쉬며 다시 이다에게 달려갔다. 앞에 있던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르디온을 막았다.
“죽여 버릴 거야! 네가 뭔데! 뭣도 아닌 게 누나한테!”
아르디온은 차마 그 끔찍한 단어를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아르디온은 제 몸을 붙잡은 하인들을 밀치며 미친 것처럼 버둥거렸다. 이다는 얼얼한 뺨을 감쌌다가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이다는 예상보다 침착했다.
그러나 좋은 종류의 침착함은 아니었다. 이다는 짐승처럼 날뛰는 아르디온과,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멜로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곧 그녀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과연, 딸은 어머니 인생을 닮는다더니.”
이다가 턱짓으로 멜로디아를 가리키자,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멜로디아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이다 앞에 섰다. 멜로디아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이다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르디온이 비명을 질렀다.
“별 같지도 않은 여우에게 남자를 뺏길 뻔했잖아.”
이다는 멜로디아 앞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댔다. 낮게 속삭였다.
“너희 어머니도 남의 남자를 후리며 산 모양이지?”
이번에 비명을 지른 건 아르디온이 아니라 멜로디아였다.
멜로디아는 불시에 이다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대로 몸을 밀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참을 수 없어. 우르르 몰려와 제 어깨를 잡아채는 하인들의 억센 손을 느끼며 멜로디아는 온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멜로디아의 비명이 식당 전체에 울렸다.
“남매가 쌍으로 손버릇하고는.”
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이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날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어머니도 쓰러진 이 저택에서, 내 남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내가 움직여야 해. 이다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난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멜로디아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트리톤 저택에 온 이후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멜로디아는 제가 심하게 몸부림친 탓에 옷이 망가지고 머리가 헝클어지는 줄도 몰랐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하늘에 맹세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래? 그걸 누가 증명해 줄 거지?”
이다가 이죽거렸다. 그러면서 이다는 소란에 가까이 몰려든 사용인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너와 샤론의 결백을 누가 증명할 거냐고. 디아누가 널 찾아갔을 때 다른 하녀들도 거기 있었다던데. 누구든 증언해 봐. 내가 듣겠다.”
멜로디아는 휙 주위를 살폈다. 눈이 마주친 하녀들 중에는, 디아누가 자길 억지로 취하려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있었다. 멜로디아가 간절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멜로디아가 어딜 보는지 안 이다가 그 하녀를 지목했다.
“너.”
“네, 네?”
“말해 봐. 그날 거기 있었나? 뭘 봤지?”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황은 명백했다.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상황이야 어쨌든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다도 멜로디아를 때렸으나 아가씨가 하녀를 때린 것과 그 반대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이미 이다는 디아누가 결백하고 멜로디아가 음녀라 결론지은 상태였다.
“전, 저는 나중에 도착해서…… 잘은 못 봤어요.”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멜로디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았다. 다 아는 얼굴이었다. 2년을 저택에서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다의 물음 앞에 다 모르겠다는 대답만 내놓았다.
“형! 형도 봤잖아요! 그 사람이 누날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형도 봤잖아요!”
아르디온이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그러나 그 하인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샤론 누나를 어떻게 하는지도 봤잖아요!”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멜로디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혼자 얼굴을 붉힌 채, 사람들의 침묵과 배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막힌 벽을 향해 소리치는 동생이 보였다.
멜로디아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다들 봤잖아! 다 알잖아, 다 알고 있잖아!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왜!”
“아르.”
멜로디아가 동생을 불렀다. 아르디온이 시뻘게진 눈으로 멜로디아를 돌아보았다. 붉은 뺨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멜로디아는 기듯이 다가가 아르디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일부터 이 둘을 저택에 들이지 마.”
이다가 둘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지시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지만, 유배 형식으로 온 거니 어쩔 수 없지. 둘 중 하나라도 저택에 발을 들이는 날엔 다들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사람들은 조용했다. 이다는 그대로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구두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사용인들도 하나씩 그 자리를 떴다.
엉망이 된 식당에는 곧 멜로디아와 아르디온만 남았다.
“아르. 아르, 울지 마.”
멜로디아가 아르디온의 뺨을 쓸어 주며 말했다. 아르디온은 이를 악물었다.
제 뺨에 닿은 누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떨림이 낯선 듯, 멜로디아가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했다. 손이 싸늘했다. 울지 말라면서, 멜로디아는 울고 있었다. 자기가 우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창녀 주제에!’
‘너희 어머니도 남의 남자를 후리며 산 모양이지?’
아르디온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여자를 때렸다. 이다를 때린 손이 욱신거렸다. 그 입을 뭉개 버렸어야 했는데. 갈 길 모를 증오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손끝 발끝의 혈관이 뛰는 것까지 느껴졌다. 소년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 그 욕망이 너무 강해 온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누나.”
아르디온이 떨리는 누나의 손을 잡았다. 멜로디아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부은 뺨을 감싸 주었다. 이 가벼운 접촉이 혹여 통증이 될까 조심하면서.
“울지 마.”
아름다운 나의 누나. 정결한 나의 누나. 이토록 연약한.
“내가 갚아 줄게.”
아르디온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반복했다.
“내가 갚을 거야.”
*
사용인들은 남매를 피했다. 아무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두 사람이 식당으로 내려가면, 사용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르디온은 한 스푼도 먹지 못했다. 그는 빵을 찢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어서 스프에 찍었다가, 또 내려놓길 반복했다. 앞에 있는 누나 때문에라도 제대로 먹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르.”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르디온이 고개를 들었다. 멜로디아가 미소 짓는 얼굴로 자길 보고 있었다.
“많이 먹어.”
멜로디아는 평소 같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리고 아르디온도 그걸 알았다. 누나라고 지금 속이 편할까. 식당의 숨 막히는 정적, 눈은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힐끔거리는 사람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어울리고 떠들던 사람들이 이토록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마음 여리고 착한 누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누나는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응.”
아르디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빵을 먹었다. 다른 형들과, 이건 늘 싱겁게 나온다며 불평했던 닭 요리도 먹었다.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아르디온이 다 먹길 기다리면서, 멜로디아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했는데, 하고 아르디온은 생각했다. 씩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누나도.”
“난 걱정 안 해. 네가 있잖아.”
멜로디아는 애써 장난스러운 척 웃었다. 아르디온도 마주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억지인 걸 알면서, 걱정하지 말라, 나는 괜찮다 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인가 보다. 아르디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
아르디온은 맞장구를 치면서 멜로디아의 야윈 손목과 움푹 꺼진 눈을 보았다. 터진 입술과 손질이 덜 된 옷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누나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내가 있잖아.”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일어났다.
그날, 멜로디아는 정원에서, 아르디온은 마구간에서 일하게 하라는 이다의 지시가 전달되었다. 말을 전한 하녀는 달아나듯 사라졌다.
두 사람은 묵묵히 일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평소와 비슷한 얼굴을 유지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누군가 먼저 멜로디아에게 말을 붙였다. 아르디온에게 지목당하고도 증언하지 않았던 하인이었다.
“멜로디아.”
그는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정원에서 일하다 보니 하인들과 많이 마주치게 되었다. 멜로디아는 잔디 사이에서 잡초를 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하인이 멜로디아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날은 다들 어쩔 수 없었어.”
멜로디아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멜로디아가 응대하지 않자 그는 조금 무안해진 듯 다른 말을 덧붙였다.
“지금도 다들 아가씨 눈밖에 날까 봐 눈치 보고 있는 거야.”
“네.”
멜로디아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다시 일거리로 고개를 돌렸다. 늦가을 따가운 햇볕에 잔디가 누렇게 시들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더 이상 하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하인은 일어나서 멀어졌다. 멜로디아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상대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다. 조금 예민해져서 그랬겠지.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내일은 다르겠지. 그러나 이 저택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던 하녀들. 아르디온을 우악스레 붙잡던 하인들.
2년을 함께했는데, 그들은 멜로디아 면전에서 쾅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멜로디아는 처음으로 냉소했다. 저들의 사정에는 관심 없어.
‘창녀 주제에!’
멜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바닥을 기며 잡초를 뽑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머니에 대한 말은 차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멜로디아는 생경한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며칠 후, 멜로디아는 샤론이 저택 밖으로 쫓겨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동생도 그 사실을 아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아르디온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멜로디아도 굳이 묻지 않았다.
긴 가을은 침묵 속에 지나갔다. 울긋불긋 온힘을 다해 타오르는 나뭇잎들은 상처받은 남매의 마음에도 새하얗게 불을 질렀다.
저택에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첫눈 오는 날이었다.
“이다를 불러오렴.”
트리톤 남작 부인이 의식을 회복했다.
이제껏 그녀는 종종 깨어나긴 했지만, 의식을 차렸다고 보긴 어려운 상태였다. 헛소리를 하다가 다시 정신을 잃거나 그저 조용히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해의 첫 눈발이 날리던 날, 부인은 마침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 이다가 정신없이 그 방으로 달려왔다. 약혼자인 디아누도 함께였다. 부인의 안색은 놀랄 정도로 나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니?”
“얼마 안 되셨어요.”
이다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했지만, 불행히도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겨울이구나.”
부인은 어딘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눈에는 총기가 많이 돌아와 있었다. 이다는 어머니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그녀의 야윈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따라온 디아누를 소개했다.
“어머니, 디아누 렐로 공이에요. 저와…… 저와 약혼했어요.”
이 말을 하는 데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했다.
이다는 어머니가 쓰러져서 일주일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디아누와 약혼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잘못되면 이다의 남편이 사실상의 트리톤 영주 역할을 해야 할 거라는 디아누의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은 옳았으므로 이다는 사랑하는 그와 조용히 약혼식을 올리고 영지로 달려 내려왔었다.
“약혼이라니?”
과연 부인은 깜짝 놀랐다.
“약혼이라니, 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니? 내게 알리지도 않고 약혼을 했다니?”
“어머니, 제가 설명할게요.”
이다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에게 자기와 약혼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부인은 인내심을 갖고 그 말을 다 들어 주었으나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부인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디아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딸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네.”
“네, 실례하겠습니다.”
디아누는 그린 듯한 웃음을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이다의 손을 힘주어 잡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누가 나가자 부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댔다.
“이다……. 느낌이 좋지 않구나.”
“걱정 마세요. 저택이나 영지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네 약혼자 말이다. 이제껏 별일 없었니?”
이다는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의 눈은 또렷했다. 어머니가 이상한 약을 먹고 있다는 건 이다도 알고 있었다. 쓰러지게 되어 그 약을 끊으니, 어느 정도 독기가 빠진 모양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말에 이다는 더욱 디아누와의 문제에 대해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요……. 저흰 잘 지내요.”
“그렇구나.”
부인은 주의 깊게 이다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딸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다.
이다는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디아누가 이상해요. 수도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아요. 늘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말하고 저도 그 말에 동의하지만, 매번 가슴이 뛰고 불안해요. 그리고 가을 예술제 때는, 그가 샤론을…….
그러나 이다는 그중 단 한 가지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말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두려웠다. 말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의심이 사실로 변할 것 같았다.
이다는 희미하게나마 디아누의 거짓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약 디아누가 정말 샤론을 강간한 거라면. 멜로디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디아누와 헤어져야 하나.
‘트리톤 남작은 유명하지. 지난번엔 어떤 창녀를…….’
사교계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은 남작 부인에 대해서도 입방아를 찧어 댔다. 그 사이에서 느꼈던 모멸감. 말이 어떻게 이토록 치명적일 수 있는가.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인 동시에 묵직한 둔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까지 디아누와 파혼한다면,
트리톤은 최대의 스캔들 가문이 될 것이다.
“저택 일이며 영지 일을 보느라 힘들었겠구나. 멜로디아가 많이 도와주지 않았니? 멜로디아는 어디 있지?”
이다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혹여 어머니가 깨어나셔서 멜로디아를 찾으면 뭐라고 하지. 멜로디아를 신뢰하는 어머니에게, 그 하녀가 내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다는 자신이 없었다.
멜로디아에게 그토록 불같이 화를 내긴 했지만 사실 디아누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멜로디아를 내친 건, 그러는 편이 자기에게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말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한단 말인가.
“멜로디아는 잠깐, 쉬라고 보냈어요. 너무 오랫동안 일만 한 것 같아서.”
“그러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부인은 작게 웃으며 말하고, 대견하다는 듯 덧붙였다.
“너도 이제 가문의 안주인이 될 준비가 됐구나. 사람을 돌보고 챙길 줄도 알고…….”
이다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야윈 손을 잡아 주었다.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지만, 딸의 행동에 감격한 부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쁠 텐데 방해된 건 아니니? 나도 좀 더 자고 일어나야겠구나.”
부인이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다는 그러시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쳐서 방을 어둡게 해 주었다. 나가기 전, 이다는 문가에서 부인을 돌아보았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이제…….”
이다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별거 아닌 말인데, 긴장이 되었다.
“약은, 드시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