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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5화)
02장―퓨리스 (2)


최종적으로 행렬이 멈추었을 때 평범한 남자가 전면에 존재를 보이고 있었다. 까만 머리가 다소 특이한 인상을 주었으나 몇 번 만났던 터라 소장들의 얼굴에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까만 머리라?”
“흐음,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신기하긴 하군.”
“피부도 약간 다른 거 같지 않아?”
“기분 탓이겠지. 똑같은 사람에게 있어 다른 피부란 있을 수 없어.”
“그렇겠지?
웅성거리는 대화 속에 호켄이 소장의 대표로 나서 의뢰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고, 동시에 그의 손이 내밀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굳이 이름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지요?”
“하하, 물론입니다.”
“반갑습니다.”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뢰인은 밝게 웃으면서 가볍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충분히 쉬신 후에 일을 시작하셔도 되고, 기간 동안 먹을 음식은 제가 모두 준비해 놓았습니다. 물론 건어물과 육포가 대부분이지만, 이곳이 큐스와 꽤 거리가 있는 지라 그런 류의 먹거리밖에 준비할 수 없더군요.”
“정말로 음식을 모두 준비하셨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회의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감하고 나니 너무나 고마웠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대다수의 의뢰인들은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켰으며, 작업을 하는 동안 쉴 수 있는 시간은 밥을 먹을 때가 전부였다. 하나 밥을 먹는 그 시간도 너무나 짧아서 건축 공들은 어서 작업이 끝나기만을 빌 뿐이었다.
한데, 이 의뢰인은 어떠한가? 충분히 휴식 시간을 주었으며, 음식까지 준비해 준다. 유명 건축소도 아닌 이상 받을 수 없는 감사였다.
“아 참, 제가 미리 체험해 보았는데 이곳에서 자는 게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더군요.”
“텐트를 치고 말입니까?”
“예. 땅에 돌이 하나도 없어서 편안합니다.”
“그렇습니까? 불편할까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입니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더트퍼리에서 생활할 동안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잠자리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긴 일수 동안 쉬어야 할 공간이 불편하다면 작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호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 무섭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예?”
“그… 이곳이 워낙 스산해서 말이지요.”
“아아, 전혀 아닙니다. 되레 너무 평범하게 어둠이 흘러가서 심심할 것입니다.”
“하, 그렇다면야 편히 잘 수 있겠습니다.”
의뢰인은 방긋이 웃고는 인사를 표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의뢰인님은 어디 가시는지요?”
“아.”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약간은 소스라치게 하는 답이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 살 분들을 모셔와야 해서요.”



03장―화전민 (1)


더트퍼리의 왼쪽에는 커다란 산맥, 덩키가 있다. 그 부지런하다는 당나귀조차도 산행 도중 한숨을 내쉰다고 해서 덩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정말로 이 산맥은 와 보지 않고는 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
힘듦, 그 자체.
아니, 지옥이라는 고통의 최대어를 쓰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곳.
“산길이 왜 이리도 편한 거야?”
덩키를 거닐었던 사람들 앞에서 저런 말을 했다면 당장에 맞아죽었을 것이다. 중반부도 못가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게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 이 산행인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중간쯤 온 건가?”
땀이 흘렀을 뿐이지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두 다리에서는 여전히 힘이 느껴졌다. 걷는 속도는 빠르면 빨랐지, 느리지는 않았다.
까맣고, 그을린 피부의 사내.
퓨리스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퓨리스의 목적지는 산맥의 정상이 아니었다. 산맥의 중반부에 있는 ‘마을’. 애초부터 산행에는 관심도 없었다.
뾰족한 돌멩이와 커다란 바위들 그리고 삐죽삐죽하게 자리를 넓힌 넝쿨이 덩키 산행의 괴로움이었지만, 퓨리스는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다. 돌멩이야 차거나 그냥 밟고 지나가면 되고, 바위는 피해 가면 되며, 넝쿨은 헤치거나 뜯어 버리면 된다.
하나, 퓨리스에게는 간단한 일일지도 몰라도 웬만한 산행인에게는 충분히 나쁜 요소였다. 돌멩이와 바위가 한두 개가 아니고, 넝쿨 또한 우옴 수 없을 만큼 자리를 뻗고 있기 때문이다.
‘칠보산(七步山)은 이곳의 100배만큼 지독한 산이었지.’
잠시 옛 생각을 돌이켜본 퓨리스. 칠보산은 딱 일곱 걸음만 걸으면 ‘포기’라는 말이 저절로 내뱉어지는 곳이었다. 물론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숨이 차오르지는 않았지만 몸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지옥 불을 걷는다고 하면 표현이 될까?
‘후후.’
퓨리스는 회상을 멈추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목적지는 그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기만 했다.
산속이라 낮일지라도 공간이 어두웠지만, 막상 진짜 어둠이 다가오니 그것은 별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두움. 시간이 지나면 어둠에 익숙해져 잘 보여 지겠지만, 어쨌든 어둡기는 지독히도 어두웠다.
“흠.”
퓨리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어둠은 그의 발목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수없이 싸워본 탓에, 낮만큼이나 밤에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지도. 이것이 지금까지 퓨리스를 안내해 주었다. 물론 고급 지도만큼 세세하고 섬세하게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모든 게 어지러운 덩키에서 이 지도라도 없으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오오!”
저 멀리서부터 뻗어 나오는 빛줄기. 퓨리스는 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퓨리스의 발걸음이 멈춘다.
“…….”
나무로 쌓은 목책, 망을 보는 듯한 망루, 정겨운 냄새, 늦은 밤임에도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
드디어 도착했다, 산속의 마을 화전민촌에.
“누구냐!”
“…….”
기척은 진작에 느꼈지만, 혹시나 그들의 오해를 살까 퓨리스는 일부러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의 음성이 다시 귓전을 파고들었다.
“누구냐 물었다.”
차가운 칼날이 퓨리스의 목을 겨누고 있다. 심장이 오글거리고, 식은땀이 흐를 법한 찰나의 순간.
퓨리스의 허리가 구십도로 숙여졌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깜깜한 덩키 산맥을 크게 울렸다.
“반갑습니다!”

굳이 자세히 훑어보지 않아도 이곳이 심하게 열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은 모르고 세게 닫으면 쓰러질 듯했고, 의자 역시 앉을 때 부셔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을 해야 했다.
“일단 얘기를 해 보지. 무슨 일로 온 게지?”
지긋한 노인의 물음에 퓨리스는 차분히 대답했다.
“알려드릴 소식이 있고, 부탁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소식과 부탁? 어디 한 번 말해 보게.”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100년 전에 있었던 사건.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표정이 말도 안 되게 굳어졌다. 대관절 이자는 누구인가? 누구기에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노인이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자네… 누군가?”
“제 이름은 퓨리스. 코드라스 님께서 주셨습니다.”
“…….”
코드라스.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이름. 그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죄’요, ‘죄인’의 길이 되었다. 한데 그때의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그 사람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자가 나타났다.
노인은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네 코드라스 님이 누군지나 알고?”
“소도시에 불과했던 더트퍼리를 최초의 초특대도시까지 끌어오려 지상 최대의 곡물도시를 만드셨지요. 거기다가 인품이든 뭐든 누구에게나 박수도 받으셨지요. 아, 최초의 초특대도시와 같이 공작이라는 직위도 최초로 받으셨던 걸로 압니다.”
눈을 보았다. 전면을 보았다. 사내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확실하다. 사내는 코드라스를 알고 있다. 100년 전의 그 사건 이후, 더트퍼리에 관한 말은 모두 사라졌다. 한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한다.
노인은 사내에게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깅스턴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어르신. 퓨리스라고 합니다.”
사내, 퓨리스는 충분히 믿음직스러웠다. 하나, 노인, 깅스턴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코드라스 님을 알고 있나?”
“코드라스 님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자네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네만, 코드라스 님인 1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네. 한데, 이 시대의 사람인 자네를 어떻게 코드라스 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인가?”
“어르신.”
퓨리스는 깅스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깅스턴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깅스턴이 대답한다.
“왜 그러는가?”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잘 숨겨 주십시오.”
“어째서… 그러는가?”
“왜냐하면…….”
퓨리스는 깅스턴을 비롯, 깅스턴의 후방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시선을 던졌다.
“사후 세계에 대해 발설하는 것은 저승법에서든, 이승법에서든 모두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아침, 퓨리스는 화전민촌의 어떤 집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중년의 여자와 그녀의 딸이 살고 있었는데, 모녀가 모두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반가워요! 퓨리스 군! 어서 들어와요.”
“네.”
자신을 밝게 맞아 주는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가는 퓨리스. 그녀는 자리를 내주면서 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자리에 앉으려던 퓨리스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퓨리스라고 합니다.”
“훗, 그때 같이 소개받았는데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희에게 이미 퓨리스 군은 유명 인사인 걸요?”
“유, 유명 인사라니요… 부담스럽습니다.”
“후훗. 일단 앉아요.”
“네.”
예전의 ‘삶’이었다면 ‘퓨리스 군’이라는 호칭이 상당이 어색했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호칭인데다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는 이 세계의 사람이 된 만큼 저러한 것에도 적응해야 했다.
“코시 아주머니시지요?”
“네, 맞아요.”
“아까 그 아이는 에이린이구요?”
“네.”
어제 화전민촌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소개받았을 때 까지만 하더라도 코시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하나 그날 저녁 깅스턴은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코시의 집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고로, 퓨리스는 코시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한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어머, 예의도 바르네요.”
“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퓨리스는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무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눈빛을 쫓아 갔다.
밝고 맑은 두 개의 눈동자. 고민할 필요도 없는 에이린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