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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6화)
03장―화전민 (2)
“안녕, 반가워.”
“…….”
코시는 대답 없는 에이린에게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에이린, 이리 와서 같이 얘기하렴.”
“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고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는 에이린. 길게 늘어뜨린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호수 같은 눈동자. 그리고 오뚝한 콧날과 새하얀 얼굴은 곱게 치장만 한다면 귀족 영애와 비등될 것 같았다.
하나, 퓨리스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로 보였다. 에이린의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지만, 실상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깅스턴이 코시 가족에 대해 소개할 때 에이린의 나이가 열여섯이라 하였다.
퓨리스와는 무려 7살이나 차이가 나는 ‘소녀’인 것이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부끄러워하던 에이린은 어느새 빼꼼히 서서 꾸벅 허리를 숙였고, 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에이린을 반겨 주었다.
한데, 퓨리스를 놀라게하는 에이린의 말이 이어진다.
“오라버니라 불러도 되죠?”
“응? 오라버니?”
“네.”
절대로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저씨라 불려야 할 상황에서 오라버니, 즉 오빠로 불리는 것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퓨리스가 놀란 이유는 에이린이 응당 아저씨라 부를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나야 당연히 좋지!”
“정말요?”
“그럼. 사실 나는 네가 아저씨라 부를 줄 알았거든.”
“오라버니는 젊잖아요?”
“그래도 7살이나 차이가 나는 걸?”
코드라스에게서 이 세계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나이에 관한 얘기도 물론 있었다. 한데 코드라스도 정확히 결론을 주지는 않았다.
“네놈이 젊어 보이면 오라버니, 애늙은이 같으면 아저씨나 노인으로 불릴 것이다.”
노인으로 불릴 수도 있다는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아무튼 오라버니라 불리게 되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코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퓨리스 군, 그럼 우리 에이린 말동무 좀 해 주겠어요? 저녁을 준비할게요.”
“네.”
“그럼.”
이 상황 역시 조선이었다면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저녁을 준비하거나, 옆에서 소일거리라도 맡아서 하겠지만, 이곳에서는 ‘대접’을 받는 것이 오히려 ‘예의’가 된다. 때문에 퓨리스는 에이린과 말동무를 하기로 했다.
“에이린.”
“응.”
“어, 너?”
“왜?”
굳이 자세히 생각하지 않아도 에이린이 갑작스럽게 말을 놨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 존댓말을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지금은 말을 놓고 있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라서.”
“오라버니한텐 원래 말을 놓는 거야?”
“음… 아니.”
“근데 넌 왜 말을 놓았어? 그것도 갑자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존댓말을 쓰다가 갑자기 말을 놓아서 그 까닭이 궁금한 것뿐이었다. 에이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오라버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응?”
“존댓말을 쓰면 거리감이 느껴져.”
“그런가?”
“응. 근데 나 말 놓아도 되죠?”
“푸훕,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 안 되요?”
두 눈이 촉촉해지는 듯한 기색에 퓨리스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당연히 되지!”
“이히, 나는 안 되는 줄 알았어.”
입술 밖으로 빼꼼히 혀를 내미는 에이린. 퓨리스는 에이린이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그녀의 말도 그렇고, 저렇듯 혀를 내미는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게 순수한 웃음을 짓는 것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정이 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요한 화전민촌의 중심부에 남자 여럿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는 새하얀 노인 깅스턴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중년 화전민들이 자리했는데, 퓨리스는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때마침 입술을 부딪히는 중이었다.
“그리 급박한 일이 아니니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닐세, 서두르고 싶어.”
“예?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깅스턴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네. 하나,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지를 밟고 싶어.”
“…….”
“그리고 낮은 공기를 마시고 싶고, 어서 농기구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깅스턴의 말이 대변되는 듯하다. 퓨리스는 깅스턴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자그마치 100년.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죽은 사람도 있다.’
울분이 터지려 한다. 화가 나려 한다. 분노가 솟는다. ‘그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한순간의 감정 표출이 아니다. 몇 년, 몇 십 년이 걸리더라도 그들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보여 주고 싶었다.
‘지켜봐 주십시오.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불끈 쥐어지는 퓨리스의 두 주먹.
간의 회의소의 내부에 기다란 적막이 흐른다. 하나, 그것은 적막이되 적막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일까?
퓨리스는 다급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깅스턴 님은 계속 존칭하실 참이십니까?”
“그럴걸세.”
“하… 제가 불편합니다. 방금 한숨 들으셨지요? 지금 그게 제 심정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여전히 그 이유입니까?”
“그렇네.”
아주머니들이야 이 세계에서의 원래 풍습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나잇대가 비슷한 사람들이나 아저씨들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지냈다. 한데, 깅스턴만은 계속해서 존칭을 낮추지 않았다.
그 까닭은 퓨리스를 ‘구원자’로 생각하는 이유였다.
“아니, 베그마 아저씨도 코우즈 아저씨도, 그 어떤 아저씨도 모두 저를 편하게 대하십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
“그렇지요? 그러니 깅스턴 님도 그만 생각을 접어 주십시오.”
“자네는 구원자래도? 더구나 코드라스 님의 뜻을 받든 사람이 아닌가?”
덥수룩한 머리의 베그마가 슬쩍 퓨리스의 옆구리를 찌른다.
“퓨리스. 다른 건 몰라도 저런 부분에서는 깅스턴 님의 뜻을 꺾기 힘들어.”
“하지만…….”
“괜찮아, 언젠가 내기를 걸어도 되잖아? 무슨 일을 성공하면 말을 놓아 주시라고.”
“그래야 할까요.”
“그래, 그러면 돼.”
조선도 그렇고 이 세계도 그렇다. 아무리 흰머리가 수두룩한 노인이라도 손자뻘의 꼬마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것. ‘신분’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상 그것을 뒤집기는 힘들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신분이 없다. 아니 신분이 있더라도 똑같은 입장이다. 그러니까 깅스턴은 여기에서만큼은 제일의 자리에 있다.
우스갯소리로, 아니, 진담으로라도 깅스턴을 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베그마 아저씨의 말대로 나중에 내기를 하는 수밖에.’
하나 퓨리스는 포기한다. 이 이상 설득하고 부탁하더라도 깅스턴의 뜻이 굽혀지지 않음을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고로, 퓨리스는 크게 숨을 내쉬면서 상황을 반전시키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데… 이가를 서둘렀을 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아무래도 집이라는 게 완성되기까지 꽤 많은 시일이 걸립니다. 고로 서둘러서 내려가더라도 그 다음 상황에서 막막해질 수 있습니다.”
“흐음…….”
중년 화전민들 사이에서도 여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렇군.”
“마땅히 지낼 곳이 없겠어.”
“아이들 때문에 돗자리를 깔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깅스턴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이어 답했다.
“더트퍼리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했으니, 숙박을 하는 것도 무리로군.”
“예.”
“거, 슬프게 되었구만. 그래, 결정내림세.”
의외로 깅스턴은 빨리 결론을 지었다. 아무래도 나쁜 상황을 계속 생각하느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좌중에 모두 시선을 보내면서 깅스턴의 입술이 열린다.
“집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총이가를 하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박이나 반대는 없었다. 방금까지 서둘러 이가할 생각만 하다가 급작스런 퓨리스의 말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이상의 좋은 대안도 없었으니 차라리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나았다.
***
더트퍼리의 건축 현장이 조금씩 원활함을 잃고 있었다. 아니, 활발해야 할 건축 현장에 원활함이 사라진다니? 하나, 내막을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재 집 100채가 거의 완성되었다.
고로, 분주해지고 싶어도 더 이상 지을 집이 없으니 분주함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호켄은 후방에 서서 뒷짐을 지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저주란 없었다는 건가…….”
더트퍼리에서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곳에는 저주가 없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주가 있다고 판단되는 곳에서 집을 지을 위인은 없기 때문이다.
한데, 인간의 심리와 내면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걷고, 앉고, 누울 때마다 저주에 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다른 이들도 내색만 안 했을 뿐이지 속으로 앓고 끓었을 게 분명하다.
“아팠던 이도 나가겠다는 이도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건축을 했어.”
더트퍼리에는 저주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 또한, 큐스에 돌아가서 도시민들에게 이곳은 평범한 곳이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 단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반드시 저주가 있다고 믿었던 공간에서 그 어떤 피해도, 아주 조그마한 충격도 받지 못해서 그게 조금 이상할 뿐이었다.
“무슨 고민을 하는가?”
“그냥 이것저것.”
“혹, 저주에 대한 것이야?”
“허, 어찌 알았나?”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어서 물어본 거야.”
호켄의 옆에 서서 입을 연 인물은 키라스였다. 그 역시 호켄과 마찬가지로 소장의 위치에 있었는데, 이따금 대면할 정도의 친분이 있었다. 어느 순간 키라스가 건축 현장을 쭉 훑어보고 다시 호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저주에 관한 것보다는 이 자체의 상황이 더욱 의문스러운 게 아니겠어?”
“무슨 소리야?”
“아무리 자유 영토라 한들, 발전 확률 제로의 더트퍼리에 집을 짓는다? 그것도 자그마치 100채씩이나. 더구나 집을 지었지만 당장 이곳에서 살아갈 길도 막막해. 논밭도 없고, 물도 없어서 자급자족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거래길이 뚫려 있지 않아서 인근 도시에서 품목을 들여오는 것도 어렵지.”
키라스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떡 하니 10억 우옴을 내밀어서 집을 짓기 시작하더니,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데려온다… 이거야 뭐.”
“흠.”
호켄의 생각도 키라스와 동일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수긍’되는 게 하나도 없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하나, 이미 ‘그’가 의뢰인이 되었기 때문에 캐물어 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호켄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잡힌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지.”
“뭔가?”
“현재 의뢰인은 지금껏 만났던 어떤 의뢰인보다도 ‘선’하고 ‘믿음’이 간다는 것.”
키라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의뢰인에게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자는 것까지 생각해 주었다. 또한 건축 공들이 힘들어서 꽤 오랫동안 쉬어도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었다. 의뢰인이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