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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7화)
03장―화전민 (3)


‘하나, 처음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의 눈빛에서는 지독스런 표독을 느낄 수 없었어.’
첫인상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래도 퓨리스는 오는 길이 힘들었을 테니 쉬라고 했다. 이것은 다른 의뢰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 보통의 의뢰인이었다면 당장에 호통을 쳤을 것이다.

“어디서 빈둥대는 거야? 빨리빨리 움직여!”

일단 건축 의뢰가 시작된 시점부터는 ‘의뢰인’의 상황적 신분이 올라간다. 똑같은 평민의 위치에 있더라도 마음껏 쏘아붙이고 부려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의뢰인이 혹여 정말 말도 안 되는 윽박지름을 가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켄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

***

새까맣게 덧칠된 숲길로 기다란 행렬 하나가 유유히 움직인다. 오랜 걸음이었던 듯 행렬을 이루는 이들의 모습은 대개가 지친 기색이었다. 하나, 그들의 눈빛만은 붉게 타오르고 있어서 중간에 멈추거나 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너무나 깜깜하고 어두워서 주위는커녕 바로 눈앞도 잘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눈이라는 게 어둠에 익숙해지면 깜깜한 풍경도 들여다볼 수 있다지만, 이곳이 숲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쓸 수 없는 말이었다.
한데, 이 행렬은 원래부터 가던 길을 가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중점에 서 있던 사내가 생각했다.
‘비록 한 번 올라와 본 길이지만 외우는 거야 어렵지 않지.’
사내는 ‘조선’이라는 곳에서 수없이 산을 올랐던 사람이었다. 또, 어려운 지역을 오르내리기도 했었다. 고로, 한 번밖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그곳’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이젠 조금이다!’
누군가를 ‘지휘’하는 식의 입장에 놓은 이들은 곧잘 거의 다 왔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그래야만 행군이 원활해지고, 움직이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힘을 더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현재는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일부러 하는 거짓말이 아닌, 정말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화전민촌에서 생활해서 산행에 익숙했던 게 다행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산행을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넝쿨과 바위와 돌들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가던 길을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어서 도착하자!’
하나 말했듯 불편하지는 않지만, 힘들어서 퓨리스는 최대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행군을 빨리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이스라는 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나타났다. 주위가 스산하고 멀쩡한 나무가 없었으며, 판판한 땅도 없었다. 또한 물도 흐르지 않았으며 지저귀는 새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이러한 곳의 한복판에 집이 나타났다.
자그마치 100채. 이상하고 잘못 지어진 집이 아닌, 정식 건축 공들이 지은 집이었다.
이곳은 더트퍼리. 호켄은 뒷짐을 진 상태로 소장들과 서 있었다.
“거, 참 잘 지었군.”
“그러게 말이야. 오늘 만큼은 자화자찬이 아깝지 않아.”
“후후,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소소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움직이던 그들이었지만, 눈앞에 떡하니 집이 완공된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었다. 건축 소장들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이제부터 편할 일만 남았겠지?”
“당연하지.”
“마누라한테도 어깨 당당히 펼 수 있을 거라고.”
이미 건축소를 통합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건축 수준, 의뢰, 명성과 입지 등 모든 게 좋아진다.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들!
호켄의 입가에 말도 안 될 만큼의 커다란 미소가 잡혔다.
‘후후.’
그동안 가족에게 얼마나 미안했던가? 도통 의뢰가 잡히지 않아 집에서 뒹굴기만 했다. 어떨 때는 잡일이나 소일거리를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다섯이나 되는 가족들을 모두 배불리 먹게 하기에는 역부족했다.
궁핍하면서 대단히 슬펐던 그 순간들. 하나,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 되었다.
건축소의 총통합. 적어도 하루 삼시 세 끼, 두 다리 뻗은 잠, 언제든지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한편, 바닥이 더럽거나 말거나 벌러덩 드러누워 한창 열변을 토하는 이들이 있었다.
각개의 건축소의 건축 공들!
“후아, 드디어 완공이구만!”
“이거야 뭐,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심정이야.”
“하하하!”
탄성하고, 기뻐하고, 웃는 모습. 어떤 의뢰든지 끝나는 그 순간에는 성취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지금 만큼은 아닐 듯했다. 너무나 기뻤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를 심정이었다. 물론 건축소의 총통합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건어물이 아닌 가지각색의 양념이 베인 고급 건어물!’
‘넉넉하게 자리할 수 있는 텐트!’
‘윽박지름 하나 없는 기분 좋은 환경!’
먹는 것에 걱정이 없었으며 자는 것도 평온했다. 작업 환경 또한 너무나 편안해서 오히려 일이 더 잘되었다.
아무래도 저것이 이 말도 안 되는 성취감의 원인인 듯싶었다.
더 애착이 갔다. 더 관심이 갔다. 더 사랑이 갔다. 적어도 이번 의뢰는 두 눈에 불을 키고 열심히 작업했다.
‘어서 빨리 와서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구만!’

***

퓨리스는 허둥지둥 달려와 건축 소장들과 마주했다. 정해진 기일에 오기는 했지만, 때가 약간 늦어 버렸다.
고로, 오자마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어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희야 원래 기다려야 하는 입장입니다.”
삼 일 뒤에 오더라도 따지지 않았을 것인데, 겨우 이만큼 늦었다고 미안해하는 퓨리스의 모습에 소장들은 크게 손사래 쳤다. 어찌 되었든, 정확히 36일 만에 대면한 퓨리스와 소장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동안 노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익숙한 일이라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퓨리스는 완공된 집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소장들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아도 대단한 집인 듯한데, 여러 분들의 노력과 땀이 보이는 듯합니다.”
“하하하!”
기분 좋은 칭찬 일색! 호켄은 두 손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집을 가리켰다.
“어디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 그러면 좋지요.”
“가시지요.”
“예.”
거친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 반대로 뜨겁게 햇살이 내리쬐면 시원하다. 한마디로 계절이 어떻든 살기 좋은 집!
집의 외관 모습도 동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오오!”
내심 마음을 졸였던 소장들은 퓨리스의 기쁜 반응에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퓨리스가 함박웃음을 짓고는 소장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잘 지어졌습니다.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러십니까?”
“예. 밖으로 나갈까요?”
“그러지요.”
퓨리스는 이 사람들에게 건축을 맡긴 것을 참으로 행운이라 여겼다. 또 어째서 건축소가 작든 크든 큐스에서 건축 의뢰를 신청하라는 코드라스의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면상으로는 충분히 ‘아래’로 평가될 법하지만 현실상으로는 기술과 노력, 그리고 열정가지 하나 모자람 없었다.

“100년 전에 큐스의 수식어가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코드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제일 건축의 도시.”

하나, 둘, 셋. 그리고 여덟이 될 때까지 퓨리스는 한 명 한 명의 소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마음 같아서는 뒤로 나열해 있는 건축 공들에게도 악수를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오히려 이분들의 시간을 뺏는 것일 수 있다.’
여덟 번의 악수가 끝나고 퓨리스는 전면을 쭉 바라보았다. 당연히 퓨리스의 얼굴은 웃음 천지였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완공되고 나서야 나타나는 못난 의뢰인을 잘 봐 주셨으면 합니다.”
“못난 의뢰인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이들보다 최고의 의뢰인이셨습니다.”
“의뢰만 하십시오. 당장에 달려오겠습니다.”
또다시 더트퍼리에서 건축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오더라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저주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적어도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건축 공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볼 기회가 되면 또 뵙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중에 또 봅시다!”
활기찬 분위기, 따뜻한 기운. 서로에게 인사가 오가기 시작한다. 비록 기쁜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으로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의뢰가 종점지에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아아!”
당연히 동료들의 의문이 그에게로 꽂힌다.
“왜 그래?”
“뭐 놀라운 일이라도 있어?”
“뭔데?”
그는 저만치부터 조금씩 크기를 키워 가는 수십, 수백 개의 까만 점을 가리켰다.
“저, 저것 봐! 사, 사람이야!”
“사람? 우리 말고 다른 사람?”
“그래!”
알고 있었던 사실. 하나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봐버려서 놀라움이 더 가증된 듯싶었다.
건축 공들의 얼굴이 하나씩 벌겋게 달아올랐다.
깜짝 놀라면 얼굴이 빨개진다는데 거기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
공허하게 변해 버린 공간. 그 누구도 음성을 내뱉지 않았고 한참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겨우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살 사람들…….”



04장―농토구축 (1)


퓨리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화전민들의 짐을 옮기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비록 허름한 옷가지, 찢어진 신발, 심하게 부식된 수통 등의 낡은 물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까지 함께해 준 고마운 것들이었다.
“오오, 드디어 들어가는구만!”
“궁금해 미친 노릇이야!”
“어서 들어가자고!”
화전민, 아니, 이제는 더트퍼리민이라 칭해야 할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들어가기 직전, 전체 외양을 쳐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오오, 딱 봐도 튼튼해 보이는군.”
“쓰러질 염려가 없겠어.”
“아름다움은 또 어떻고? 이보다 더 예쁜 집은 없을 거야.”
쏟아지는 감탄사. 하나 여기에 계속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아직 봐야 할 것이 태산. 어서 빨리 내부를 보고 싶었다.
드디어 내디뎌지는 집으로의 첫 발자국.
더트퍼리민들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기쁨이 터져 나왔다.
“대단하군!”
고급 침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카펫이 깔려 있지도 않았다. 그냥 공허한 공간이 보일 뿐이었다.
하나, 상관없었다. 이 자체로가 기쁨이요, 희망이다. 침대와 소파가 있든 없든 그것은 개의치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더트퍼리민들은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을 만져 보기 시작했다.
“오오, 이런 부드러움이라니.”
“벽이 부드러워?”
“어! 한 번 만져 봐. 벽에서 손이 미끄러질 지경이야!”
벽이 부드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화전민촌의 집에서는 늘 딱딱한 벽만 만져왔던 터라 이것조차도 기쁨이 되었다. 하나둘씩 벽을 만져보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문을 열고 닫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오, 이거 매우 부드럽게 열고 닫히는군!”
“삐걱거리지 않고?”
“어! 전혀!”
기쁨. 환호. 울분. 감사. 화전민촌의 사람들이 ‘본 고향’ 더트퍼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