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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8화)
04장―농토구축 (2)
퓨리스가 에이린의 짐을 나름으로써 이가는 대대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코시가 퓨리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퓨리스 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후훗, 역시 예의 바르군요. 잠시 쉬었다 가요.”
“아아, 그럼, 감사합니다.”
인상 좋은 코시의 손길에 퓨리스는 통나무집의 중간 즈음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다리를 쫙 펴고 양손을 뒤로 짚으니 이만큼 편한 자세가 없다. 그때 귀여운 소녀가 다가온다.
보라색의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 에이린이었다.
“헤헤, 고마워.”
“너도 같이 날랐는데 뭐가.”
“아니야.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더트퍼리민들이 이가를 하면서 가져온 물품은 한정적이었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라 짐차를 쓸 수 없어서 기본적인 것만 들고 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가를 하는 것 치고는 매우 적은 양의 짐을 들고 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양은 적었지만 내용물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활, 창 등의 무기들! 몇 개만 들어도 팔이 저려오는 그것들을 퓨리스가 많이 옮겨 날랐다. 퓨리스에게는 그렇게까지 무겁게 느껴지는 무게가 아니었지만, 에이린에게는 그저 힘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에이린은 뒤꿈치를 바닥에 붙여 쪼그려 앉더니 문득 묻는다.
“근데 오라버니.”
“어?”
“오라버니는 어디서 살 거야?”
에이린의 의문은 의외로 심각한 고민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더트퍼리민들의 집은 모두 정해져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집은 정해지지 않았다. 퓨리스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그럼, 여기서 살자!”
“여기서?”
“응! 오라버니가 없으면 너무 심심할 거 같아.”
잠시 생각하던 퓨리스의 고개가 다시 흔들어졌다.
“그건 안 돼.”
“왜?”
“계속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에이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민폐라니! 오라버니가 있으면 더 좋은데!”
“아니야. 그리고 한두 개 정도는 집이 남을 거야. 그걸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잖아?”
“…….”
울상이 된 에이린. 그런 그녀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난다. 짐을 풀고 있던 코시가 소리를 듣고 온 것이었다.
“퓨리스 군. 괜찮으면 같이 살아요.”
“그렇지? 엄마도 그렇지?”
“응. 어때요, 퓨리스 군?”
퓨리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코시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면 퓨리스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부담이 될 입장이었다. 그 까닭이야 간단하다. 늘 맛있게 식사할 수 있을 것이고, 에이린이 있어서 늘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삼십여 일을 함께했다.
“하하하!”
저렇듯 웃는 감탄사가 그 삼십여 일 동안 끊이지 않게 흘러나왔다. 그만큼 코시의 집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는 얘기다.
‘…….’
에이린의 눈동자가 점점 기대에 물들어갈 때, 퓨리스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한다. 공허한 공간에 꿀꺽―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럼 신세를 져도 될까요?”
“후훗, 신세라니요. 같이 살게 되어 반가워요, 퓨리스 군.”
에이린은 와락 퓨리스를 껴안아 버렸다.
“잘 생각했어!”
“야야, 넘어지겠다.”
“넘어지면 뭐 어때, 다 좋은 거지.”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에이린은 꽤 오랫동안 함께 했던 ‘말동무’가 사라지는 것에 슬픔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로, 퓨리스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에이린에게 만큼은 결코 소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더트퍼리. 퓨리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깅스턴의 집을 찾았다.
“아, 들어오세요.”
결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가지고 있는 깅스턴의 딸이 퓨리스의 방문을 반갑게 반겨 주었다.
그녀는 마주 인사하는 퓨리스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하고는 물었다.
“아버님을 찾아오셨어요?”
“예, 뵐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이리 들어와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예.”
잠시 후, 여전히 인자한 풍모를 가진 깅스턴이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퓨리스는 서둘러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깅스턴 님.”
“반갑네.”
자리에 앉아 대면했을 때, 먼저 열린 것은 깅스턴의 입술이었다.
“자네가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든 일단 내가 먼저 말해도 되겠나?”
“예, 물론이지요.”
퓨리스는 말을 경청하기 위해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리고, 두 눈은 깅스턴의 시선과 마주했다.
“자네에겐 참으로 지겨운 말일 거야.”
“예?”
“고맙네… 정말 고마워…….”
길게 내뻗어 퓨리스의 손을 마주잡는 깅스턴. 퓨리스는 얼른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워 쓰러지겠습니다. 사실 만나는 분마다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런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고마워 미칠 노릇인데.”
“…….”
“자네의 마음을 알겠으니 내 더는 말하지 않겠네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지.”
왠지 모르게 붉어지는 깅스턴의 눈시울. 지난 삼십여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던 깅스턴이 오늘도 어김없이 내뱉는다.
“고맙네.”
두 남자 사이로 물 두 잔이 놓여진다. 맑은 물이 마치 이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사하러 간 깅스턴의 집.
퓨리스는 결국 어떤 인자한 노인의 붉어진 눈시울만 보고 돌아온다.
***
큐스 소도시 내곽의 시장터에서 가축소를 운영하고 있는 호프는 오늘도 어김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음메에.
히이잉.
뀌이익.
웬만한 사람은 버티지도 못하는 가축들의 울음소리. 하나, 호프에게는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어서 전혀 불편한 것이 못되었다. 오죽하면 ‘우는 소리’만 듣고도 그 가축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때마침 골칫덩어리 소들이 목청을 높힌다.
음머어어어!
“저놈들은 도움도 안 되면서 먹을 것은 곧잘 찾는군.”
아파서 그럴 수도 있으며 심심해서 일 수도 있다. 한데도 호프는 다른 경우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소들이 배고파서 저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지레 짐작이 아니라 ‘확신’인데, 그 까닭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호프가 울음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호프는 ‘골칫덩어리’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자자, 네들은 이만큼만 먹어라.”
음머어어.
“그래? 그러면 먹지 말아라.”
으, 음머! 음머어!
“네들은 눈치라도 없었으면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이야.”
대략 오간 상황은 이렇다. 쥐꼬리만 한 밥에 소들이 반박했고, 호프가 먹지 말라는 듯 행동하자 다시 미안하다고 소리친 상황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미쳤지.’
호프는 매우 아쉬운 눈길로 소들을 쳐다보았다. 한순간에 현혹되어 구입했던 것이 통탄의 한이었다.
‘이렇게 쓸모없을 줄이야.’
말만큼이나 덩치가 크고 다리도 제법 길어서 운행 수단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돼지 이상의 좋은 육질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한데,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밝혀졌다.
지독히도 느려 터졌다. 아니, 말도 안 되게 게을렀다. 대관절 이렇게 말을 안 듣는 놈들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호프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운행 수단으로 안 되면 먹는 용도로 쓰는 두 번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슨 고기가 그리 질기느냔 말이다!’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호프는 나무를 씹는 줄 알았다. 이렇게 질긴 고기가 있을까 싶었고, 열 번만 씹으면 치아가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배어 나오는 육즙이 이상하리만치 맛있기는 했지만, 고기가 너무 질겨서 그것도 그리 좋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잘 알아보고 살 것을…….’
하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 이대로 밥을 주다가 그때의 자신 같은 사람에게 다시 소를 되파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그때, 호프의 귓전으로 말과 돼지의 울음소리가 경쾌하게 들어온다.
히이잉!
뀌이익!
너희들이 있어 내가 산다.
호프는 고민 없이 먹을 거리를 퍼서 말과 돼지에게 뿌려 주었다. 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엄청난 양!
배불러서 죽는 가축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호프 가축소의 가축들이리라.
‘돈 덩어리들!’
군마상은 귀족에 버금갈 정도로 떼돈을 번다. 호프는 그러한 군마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은 명성이 있는 마주였다.
‘모든 말이 마차를 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겠지만, 일단은 차차 이루자.’
말의 최상위 가격에는 군마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차마(車馬)가 있다. 고로, 꼭 군마가 아니더라도 차마로 팔더라도 엄청난 이득이 남는 것이다. 귀족이 타는 마차를 끄는 말인데 싸게 팔리겠는가?
물론 차마의 다른 분류로 짐차마와 수레마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그리 좋은 가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호프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생각을 갖지 않았다. 하여튼 마차마로만 판다면 웃음 짓는 것이다.
이어 호프의 눈에 들어오는 뒤룩뒤룩한 돼지들. 호프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개구쟁이로 보였다.
‘돼지는 일단 파는 것으로 만족하자!’
돼지는 열이 있으면 열 모두가 먹는 용도로 쓰인다. 그 이유야 그것밖에 용도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한데, 아주 희박한 확률로 ‘제대로 미친’ 귀족이 나타나면 떼돈을 벌 수가 있다.
‘누가 내 돼지도 관상용으로 사 갔으면!’
바로 관상용 돼지. 대관절 뒤룩뒤룩하며 특유의 역한 냄새까지 풍기는 돼지가 뭐가 좋다고 화려한 옷까지 입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관상용 돼지는 일단 뽑히면 엄청난 돈을 주기 때문에 호프의 입장에서는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는 ‘구입 문화’였다.
‘그러고 보면 소는 정말 쓸모가 없어.’
다시 떠오르는 소의 악몽. 더 못생긴 돼지가 관상용으로 쓰이는데 소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소라는 건 대관절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거야?’
호프는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가축을 관리하고 살펴야 하는 게 그의 입장인지라 늘 휴식 시간이 부족했다. 때문에, 이러한 휴식은 호프에게 꿀이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젊은 남자의 음성이 공간을 울린다.
“주인장 계십니까?”
“아, 있소.”
호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맞이했고, 바로 용건을 물었다.
“잘 뛰어다니는 놈들과 육질 좋은 놈들이 즐비합니다. 일단 골라만 보십시오.”
“아, 저는 소를 사러 왔습니다만.”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자는 저 멀리 뒷 공간에 자리 잡은 ‘소’를 가리켰다.
“저것을 사러 왔다고 했습니다.”
“소, 소요?”
“예.”
“허, 허… 아, 알겠습니다.”
호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상황에서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를 사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몇 두를 사시겠습니까?”
“삼십 두요.”
“예, 알겠습니다.”
당장이라도 기겁해야 정상이겠지만, 이런 천운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호프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고, 일단은 남자를 소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물론 이런 호프조차도 절로 미소가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호프는 아무래도 잠시 후면 이곳에서 자신이 만세를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