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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9화)
04장―농토구축 (3)


밥을 다 먹고 흐느적흐느적 제자리를 걷는 소가 나타났다.
“모두가 튼실한 놈들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저 잠시…….”
사실 호프가 이곳으로 온 정확한 목적은 남자에게 소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확히 몇 두가 있는지 몰라서였다.
‘서둘러 세자!’
호프는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하나 소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스물여덟, 스물아홉.
남자가 말한 것에 딱 한 두가 모자라는 숫자였다. 일단은 일부로 구경할 시간을 주었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다 구경하셨습니까?”
“예.”
“저… 손님. 한 마리가 모자랍니다.”
“스물 아홉 두입니까?”
“예.”
이 상황에서 호프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설마하니, 한 두가 모자라서 손님이 됐다며 떠나지는 않겠느냐는. 하나, 다행히도 남자는 괜찮다는 듯 미소 짓고는 손가락으로 둥그렇게 소들을 찍었다.
“괜찮습니다. 스물아홉 두를 모두 사지요.”
“알겠습니다.”
호프는 그리 대답하고는 재빨리 생각했다. 소에게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아서 가격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하하!”
남자에게는 대충 미소를 보이며 어물쩍 상황을 넘기고,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느 순간 호프의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
‘그때, 두당 30만 우옴에 샀었지.’
순간 싼 값에 혹해서 산 것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아무튼 다시 팔게 되었으니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호프는 바로 ‘30’이라고 외치려다가 순간 머리를 굴렸다.
‘같은 가격으로 되팔아도 이득이지만…….’
없애도 모자를 판의 골칫덩어리를 제가격에 다시 판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으나, 호프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슬쩍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평범한 표정에 걸려 있는 옅은 미소. 제법 소를 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두당 40만 우옴에 팔겠습니다. 모두 구입해서 싸게 드리는 겁니다.”
“예.”
“예?”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어떤 손님이라도 첫 가격을 들으면 일단은 흥정을 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파는 사람이 아무리 달변가라도 변치 않았다. 한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수락했다. 대개의 사람은 흥정을 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법도 하겠으나, 호프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더 높게 불러도 될 거였잖아!’
저리 쉽게 수락할 것이라면, 50만 우옴을 불러도 남자가 수락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는 필시 40만 우옴에서 흥정을 했을 것이다. 이해하기 약간 버거워도, ‘거래’라는 세계가 그렇다.
하나, 이미 지나 버린 일. 호프는 자신을 위안했다.
‘이미 대박이 터졌다. 괜찮아, 괜찮아.’
호프는 소우리로 움직이면서, 남자에게 물었다.
“이동 마차가 없으시면, 제가 불러드릴까요?”
“제가 미리 구해 뒀습니다.”
“그러셨군요.”
이날 오후, 큐스의 서쪽 중심부에서부터는 스물아홉의 소가 행렬하는 기이한 모습이 펼쳐진다.

***

더트퍼리의 오후는 아주 평화로웠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음식을 만드는 아주머니.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 땅을 갈고 있는 사내들이 있다.
“일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는 건가?”
“그러게 말일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영토, 더트퍼리. 이곳에서 갈려지는 땅은 ‘더트퍼리민’들의 것이다.
먼 훗날 이곳에서 피어날 황금빛의 열매를 생각하니 ‘일’하는 것이 절로 즐거워진다.
“근데, 이거 계속 갈아도 되는 건가?”
“왜?”
“퓨리스가 쉬라고 했지 않은가? 또, 회의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고.”
“뭐, 어떤가? 그리고 또 퓨리스만 힘들 수는 없지 않겠어?”
“그렇지?”
다시 땅 갈기를 시작하는 더트퍼리의 ‘농부’들. 저마다 곡괭이를 하나씩 손에 쥐고 농토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한참 더 일이 진행되었을 때, 코우즈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를 이용한 농사… 라고 했지?”
“어, 쟁기? 써레? 그것들을 이용해 하는 것이라고 했지.”
“대체 무엇일까?”
“퓨리스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일단은 기다려 보자고.”
“그래야겠지.”
코우즈의 말에 답을 주었던 베그마. 이번에는 그가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내뱉었다.
“근데, 깅스턴 님이 말하지 않으셨나?”
“무엇을?”
“소를 이용한 농사법은 엄청난 것이라고.”
“아… 그러셨었지.”
“하지만 정확히 어떤 농사법인지는 모르신다고 하셨고.”
“흐음…….”
베그마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던 코우즈가 서 있는 상태에서 손을 턱에 괴고는 뭔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어느 순간, 코우즈가 제법 확실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여하튼 대단한 건 확실하네. 벨스로크 최고의 제일 곡물 도시 쿠바크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였으니… 아니, 위협한 게 아니라 수식어를 이곳으로 가져왔으니까. 그러니까 100년 전에는 이곳이 제일 곡물 도시였으니까.”
“우리가 옛날의 그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나?”
“그럴 수 있을 걸세. 퓨리스도 꼭 그렇게 만들겠다고 했고, 우리도 다짐했지 않은가”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이 없구만.”
“왜?”
“소도시? 그것조차도 한 영주가 평생을 노력해도 될까 말까한 힘든 일이라고 하던데, 그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만 배는 더 힘들 일을 우리가 이뤄낼 수 있을까? 더구나 최고의 환경도 갖지 못한 우리가 말이야.”
코우즈는 평소의 모습과 다른 기죽은 행동에 베그마를 다그쳤다.
“어이, 베그마. 자네답지 않아.”
“…….”
“도전해서 안 될 것은 없어. 실패해도 오히려 이득이 남는 게 도전이니 말이야.”
“…….”
“힘을 내자고. 그래서 꿈을 이루자고.”
베그마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그의 곡괭이질이 이상하리만치 빨라졌고, 어느 샌가 그가 무리에서 가장 빨리 움직였다.

더트퍼리의 정문은 완전히 바스러진 상태였다. ‘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인 것이다.
한데, 그런 정문 사이로 기다란 행렬 하나가 들어선다.
평범한 신장의 남자 하나와 누런 소.
“자자, 다 왔다!”
퓨리스는 계속해서 소를 다독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게으름뱅이들이 시시때때로 멈춰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소고집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하지만 사랑스럽군.’
하나 퓨리스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꿈을 되찾아줄 녀석들! 사람도 각자 성격이 있고, 그들은 자신의 성격에 맞춰 산다. 소도 마찬가지다. 태생이 게으르니 게으르게 행동하는 것은 소의 죄가 아니다.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면 굳이 할 말은 없겠다만, 어찌 되었든 퓨리스는 소를 사랑한다.
“확실히 이 세계에서는 소의 가치가 없군.”
또한 얼마나 싸게 구입한 녀석들인가? 소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데, 이곳에서는 돼지보다도 싼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퓨리스는 문득 가축소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자기가 키우는 소의 숫자도 가격도 모르다니.’
퓨리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뭔가 우물쩍대는 듯한 주인의 행동! 깊게 의심해 보지 않아도 주인의 옅은 거짓말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에 가격을 부르고도 후회하는 주인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내가 소의 가격도 모르고 왔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끝에서 흥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인에게 ‘후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만약 거기서 흥정을 했다면 주인은 자신이 이득 남는 장사를 했다며 좋아했겠지만, 그렇게 행동해 버림으로서 주인에게 기쁨을 주지 않은 것이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소를 얻었으니 퓨리스에게는 나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그 어디에서도 취급하지 않은 소를 그곳에서 가지고 있었으니까.’
희귀 동물로 구분되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소. 그만큼 이곳에서 소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숫자가 적으면 으레 가격이 올라가게 마련이지만, 아직 이곳에서는 소의 가치를 모르는 상태라 되려 가격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음머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퓨리스는 다시금 울음 짓는 소들을 다독이며 계속해서 행렬을 움직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마을에 기뻐하던 퓨리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의아해했다.
“어라?”
비록 멀리서 보았다고 하나 저것은 누가 보더라도 곡괭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또, 움직이기까지 했으니 땅을 가는 것이 확실했다. 이 모습에 퓨리스는 당연히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화전민촌에서 힘들고 고통 어린 삶을 살아왔음을 알기에 퓨리스는 그들에게 쉴 시간을 주고 싶었다. 이제 얼마 후면 쉬고 싶어도 못 쉴 정도로 바쁜 나날이 이어질지도 모르는데, 저렇듯 일하고 있다니!
퓨리스는 행렬의 속도를 약간 높여 서둘러 농부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한편,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반응이 일었다.
“…….”
말없이 전면을 바라보는 농부들. 뭔데라는 표정으로 동료를 바라보던 이들도 이내 전면을 확인하고는 넋을 놓는다.
모름지기 ‘대단한 광경’이라고 하면 웬만한 스케일이 아니고서야 주목을 받기 어렵다. 흔하거나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광경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저 모습은 흡사 거대 전투를 방불케 했다.
자욱한 흙먼지! 그리고 우렁차게 들려오는 함성!
“오오!”
“거… 놀랍구만.”
“허.”
할 말을 잃은 듯 농부들은 감탄사만 간신히 내뱉었다. 그때 베그마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직시했다.
“퓨리스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 거라 보는가?”
“일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한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치고는 너무 서두른다 싶지 않는가?”
“흠.”
하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퓨리스가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정확히 두 발이 멈췄을 때, 소리쳤다.
“에, 아저씨들의 손에 어째서 그게 들려 있는 것입니까?”
“일 좀 하려고 했지.”
“충분히 쉬어 두셔야 합니다. 또, 굳이 지금은 이렇게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코우즈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우리는 지독히도 쉬었거든, 농부로서… 그래서 일을 하고 싶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