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계농부 1권 (10화)
05장―쟁기 (1)
더트퍼리의 북쪽 언덕. 이곳은 마을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곳인데, 평지보다 확실히 지대가 높았다.
“자유 방목형 소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는데, 이거였구만.”
“흐음, 답답한 우리보다는 이게 훨씬 낫겠구만, 소의 입장에서.”
“저놈 웃는 거 보게. 매우 즐거워 보여.”
무언가를 보고 골똘히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도 저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우아 신기하다.”
“나름 귀엽게 생겼어!”
“아이들에게 좋은 동물이 될 것 같아.”
에이린은 어떤 소의 등을 쓰다듬었다.
“안녕, 소고기야.”
으, 음머?
“왜 이렇게 놀라니?”
에이린보다 열 배는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소가 흠칫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하나, 그녀의 입술은 아직까지 닫히지 않았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음성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는 무슨 맛이니?”
…….
“무시하면 먹어 버릴 거야.”
음머! 음머, 음머!
한쪽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퓨리스는 설마하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서, 설마… 소가 말을 들었다? 그럴 리 없지.’
기겁한 표정의 퓨리스의 곁으로 베그마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어이, 퓨리스.”
“예.”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소를 이용한 농사라는 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통 모르겠구만.”
“흠.”
생각해 보니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궁금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저 ‘동물’로만 여기던 소가 농사를 짓는데 일조한다? 만약 자신이 이곳의 사람이었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퓨리스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제 곡괭이를 들었던 농부들을 떠올렸다.
“아! 진작 이리 말씀드릴 거 그랬습니다.”
“오오, 무엇인데?”
“소가 아주 커다란 곡괭이를 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끌고 가는 것이지요.”
나름 쉽고 간결한 설명이라 생각해서 퓨리스는 사뭇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데, 베그마는 여전히 아리송한 반응이었다.
“소가 곡괭이를 메고, 또 끈다고?”
“예.”
“네가 왜 직접 봐야 한다고 했는지 알 법하구나.”
역시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100번 설명하는 것보다 1번 실제로 보여 주는 게 확실할 것 같았다. 문득 베그마가 소를 쭉 바라보다가 의문을 표했다.
“근데 말이야.”
“예.”
“원래 소는 저리 게으르냐?”
퓨리스의 답이 이어지기 전에 베그마가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아, 글쎄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인다니까? 먹을 때 말고는 움직이는 걸 못 봤어.”
“그게… 원래 소가 좀 그럽니다.”
“게으르다고?”
“예.”
이러면 한 가지 의문이 당연한 수순으로 나타난다.
“그런 소가 농사를 어떻게 지을 수 있지?”
“그 전번 회의에서 코뚜레라는 것을 알려드렸지요? 그걸 써야 합니다.”
“아아. 한데, 저렇듯 비대한 놈들에게 그런 걸 하려면 꽤나 애를 먹겠군.”
“저도 그게 고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코뚜레가 아니면 불가능한가?”
“거의 그렀다고 봐야지요.”
베그마의 표정이 심통하게 굳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게으른 동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코뚜레에 관한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뚫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후우, 정말로 꽤나 고생이 심하겠는데.’
코뚜레는 소의 코에 구멍을 내어 줄을 연결하는데 필요한 것인데, 이르자면 뒤에 메고 다닐 ‘곡괭이’를 메다는데 쓰이는 거라고 할 수 있다. 하나 문제는 갓 태어난 소에게도 코뚜레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렇듯 산만 한 덩치의 다 큰 소를 어떻게 붙잡고 뚫어낼지가 관건이었다.
‘후우.’
거듭되는 한숨. 사실 이 부분은 저번 회의에서도 거론되었던 것인데, 거기서도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다. 조선에서 살 적에 보편화된 방법은 일단 소를 붙잡고 코를 뚫어내는 것이었으나, 말했듯 저러한 덩치의 소를 붙잡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코드라스 님은 어린 소를 구하셨다 하셨는데.’
코드라스가 이 세계에 대해 알려줄 적에 당연히 소에 관해 얘기한 적도 있었다. 그는 다 큰 소에게 코뚜레를 씌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보고, 방방곡곡으로 찾아다녀 어린 소를 구했다.
물론 퓨리스도 그런 방법을 쓰고자 했다. 어린 소에게 코뚜레를 씌우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괄시되다시피 버림받은 소에게서 새끼가 태어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단 교배를 시키면 숫자가 더 늘어나니 손해라 본 것인가.’
어찌 되었든 확실한 것은 어떻게든 이 소들에게는 반드시 코뚜레를 씌운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를 사올 이유도 없었고, 애초부터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응?’
문득 고개를 돌린 퓨리스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의 에이린. 그녀는 아직 소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아, 너 제법 빠르구나.”
음머어.
“조금 더 빨리 가 보렴.”
음머어.
마치 대장에게 명령을 받드는 수하의 모습처럼 소는 에이린의 말에 단 하나의 거절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퓨리스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베그마가 떠듬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이, 퓨리스… 저건 무슨 경우일까?”
“그러게 말입니다.”
“소가 에이린의 말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아닙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본래 소는 코뚜레가 아니라면 인간의 말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소의 습성은 원래부터 게으르고 누군가의 말에 따를 만큼 순종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데, 저 모습은 필시 사람의 말에 따르는 순종적인 소의 모습이었다. 게으름도 어디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허어.’
넋을 잃고 에이린을 바라보는 퓨리스. 에이린은 이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꺽어 보렴.”
음머.
에이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걷는 소. 비록 그 속도는 말과 인간이 달리고 걷는 속도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으나, 애당초 소에게 빠른 걸음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저씨.”
“어?”
“에이린이 다른 소도 저렇게 부릴 수 있을까요?”
“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코뚜레를 할 필요가 없어지잖아?”
“그렇지요.”
그러면서 곧바로 에이린에게 달려가는 퓨리스. 그녀는 아까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된지라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리로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에이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퓨리스를 발견하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오라버니?”
“에이린.”
“어?”
“너 다른 소들도 그렇게 해 보지 않을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이린에게 퓨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하는 것처럼 다른 소도 움직여 줘.”
“그 정도야 뭐.”
에이린은 타고 있던 소의 등을 몇 번 두드리면서 멈추게 하더니 손을 뻗었다.
“내려줘.”
“아, 내 손을 잡아.”
“응.”
퓨리스의 품에 안기면서 자리에 착지한 에이린이 널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소나 해 보면 되는 거야?”
“응, 어떤 소라도 괜찮아.”
“알았어.”
에이린은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힘차게 걷더니 이내 한 마리의 소에게 다가갔다. 곧 앙칼진 그녀의 음성이 입 밖으로 나오려 한다. 한데, 소가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은 왠지 모를 착각일까?
“노란 아이야.”
으, 음머!
“널 괴롭히지 않아. 나는 착한 아이니까.”
서서히 다가가는 에이린은 대뜸 소의 옆에 서서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
“앞으로 걸어 보자.”
…….
“너희들은 초반에 말을 안 듣는 게 취미구나.”
매우 날카로워진 에이린의 말. 소는 서둘러 자세를 잡고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물론 우렁찬 소리도 함께였다.
음머어!
“오오, 잘 걷는구나.”
음머, 음머?
“응, 한 열 번만 더 걸어 보자.”
하나씩 새겨지는 발자국. 정확히 열 개의 발자국이 찍혔을 때, 퓨리스의 입술은 두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이것은 비단 퓨리스만의 일이 아니었고, 모든 사람의 경우가 이러했다.
“시, 신기한데.”
“게, 게을렀는데.”
“자, 잘 따르네.”
마을 사람들은 소를 본 지가 오늘 처음이었음에도 소가 얼마나 게으른 가축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사람의 말을 더더욱 듣지 않는다. 차라리 갓 태어난 아기가 바로 걷는 것이 소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쉽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소는 게으르다고 확신했다.
한데 지금 에이린의 경우를 보면 그 말은 ‘가짜’가 되는 셈이었다. 소는 확실히 사람의 말에 따랐고, 움직였다. 먹이로 유인한 것도 아니었으며, 무언가 흉기를 들고 위협한 것도 아니었다.
퓨리스는 떠듬떠듬한 걸음으로 에이린에게 부탁했다.
“아, 에이린. 한 번만 더 할 수 있겠어?
“응.”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의 걸음은 자유롭기 그지없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소가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소가 게으른 가축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또 다른 소가 걷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 움직인 것이었다.
“또 해 볼까?”
“…….”
“오라버니?”
퓨리스는 생각했다. 이제 코뚜레는 필요 없어졌으며, 소를 이용하는 데는 에이린만 있으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것은 확신이요, 결론이었다.
“에이린. 너 농사에 힘을 보탤 생각이 있어?”
“당연하지!”
“꽤 힘들 수도 있어. 괜찮겠어?”
“그럼!”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퓨리스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본래 코뚜레를 하지 않고서는 소를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 사실 여기에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소들은 호프의 가축소에서 ‘먹이’ 때문에 눈치와 순종을 경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호프는 먹이를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의 말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처음 대면한 에이린이 비록 먹이는 아니지만, 호프와 비슷한 ‘쏘아붙임’을 보였다. 고로, 소들은 에이린을 ‘새로운 주인’이라 느끼고 그녀의 말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퓨리스는 이른 아침부터 통나무 여러 개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단단해 보이는 나무들.
소를 사올 적에 같이 구매해 온 나무였다.
베그마와 코우즈 등 농부 여럿이 퓨리스의 행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걸로 쟁기… 그걸 만든다고?”
“예.”
“흠, 일단은 지켜만 보겠어.”
농부들은 퓨리스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지켜볼 요량이었다. 만드는 방법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도와주면 방해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퓨리스가 슥슥 자무를 잘라 나갔다.
“일단은 이렇게 자르고서…….”
천천히 만들면서 이어지는 차분한 설명! 농부들은 큰 어려움 없이 쟁기를 만드는 과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또 끼워 맞추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명. 어느새 절반쯤 완성된 쟁기가 퓨리스의 손에 들려 있다. 농부들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호오, 정말 커다란 곡괭이처럼 생겼군.”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모양은 확실히 달라.”
“저걸 소가 끌고 간다면… 호오.”
퓨리스는 여전히 작업을 진행하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하나를 완성하고 시범 운용을 해 볼까 합니다.”
“시범 운용?”
“쟁기질이 잘되나 시험해 보는 것이랄까요.”
농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퓨리스의 말처럼 시범운용을 한다면 혹여 실수를 했다면 그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요,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메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