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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15화)
07장―수로 공사 (2)
퓨리스는 익숙한 걸음으로 빠르게 발을 내딛었다. 이미 와 봤던 장소라 점점 더 속도가 빨라졌다.
이윽고 걸음이 멈추었을 때, 그의 시선에 ‘벤샨 곡물소’라는 푯말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어서 오십시오.”
“곡물 소장님 계십니까?”
“무슨 일로……?”
“저번에 오면 자기를 찾으라 하시기에…….”
“아, 몰라 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솔하는 매우 심오한 표정으로 퓨리스를 안내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설렁설렁 대하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그야말로 극진한 대우! 퓨리스는 떨떠름했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니 누군가가 맨 발로 뛰쳐나온다.
“아이구, 오셨습니까?”
“아, 예, 예.”
“이리 드십시오.”
단순히 쌀을 거래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저번에 사놓은 곡물이 아직 남아 있지만, 미리 사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 한데, 벤샨의 대우가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물론 이 시점에서 퓨리스가 벤샨의 ‘좋은 대우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라이라이 차를 내오너라.”
“라이라이 차요?”
“그래, 라이라이 차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퓨리스가 최상위 단골임을 망각한 솔하는 자신을 머리를 쥐어박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벤샨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띠운다.
“하하, 많이 기다렸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예. 음, 일단은 차가 나오길 기다리시겠습니까? 맛이 정말 일품입니다.”
“아, 그러지요.”
여전히 벤샨의 행동은 받기가 거북했다. 저번에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 때는 이런 행동을 받지 않았다.
그냥 일반적인 손님, 아니, 그 이하로 봤었다.
“빨리 처리하고 보내.”
“예.”
퓨리스는 빨리 처리하라는 벤샨의 말을 들었지만 일단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벤샨에게 자신은 바바루의 소개로 왔음을 알려 주었다.
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벤샨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다.
“아, 아이구 제가 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예에?”
“뭐하느냐? 어서 빨리 모시지 않고?”
“예? 예예!”
벤샨은 일단 ‘최상위급’ 단골이라 판명되면 나이와 직종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두 손을 비볐다. 이것은 퓨리스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쌀 30가마는 사갈 거라는 바바루의 언질이 있었기에, 벤샨은 그 순간부터는 퓨리스를 극진히 대했다.
허나 퓨리스는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게 가식적으로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당하니 기분이 상했다.
‘장사를 잘하려면 어쩔 수 없을 테지.’
장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손님에게 거짓을 말하거나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야만 조금 더 좋게 물건을 팔 수 있고, 손님의 입장에서도 거짓의 대우라 한들 안 받는 것보다는 좋기 때문이다.
물론 손님을 가려 받는 것은 충분히 나쁜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잠시 회상에 빠진 퓨리스의 눈앞에 차가 하나 놓여졌다.
이름마저 생소한 라이라이 차였다.
“라이 중도시에서 정평이 나있는 라이라이 차입니다. 한 번 먹으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두 번 마시면 직접 소크로 찾아가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이며, 세 번 마시면 중독되어 버리지요.”
“흠… 그렇다면 전 마시지 않겠습니다.”
“예?”
퓨리스는 라이라이 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가격이 비싸지요?”
“아, 조금 비싸기는 합니다만 손님을 위해서 이 정도쯤은…….”
“이런 비싼 차에 중독되기라도 한다면… 역시 전 사양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일품의 향기에, 입에 닿지 않았음에도 그 맛이 느껴지는 듯하다.
보고만 있어도 이 정돈데, 먹으면 중독될 게 뻔했다.
퓨리스는 다시 한 번 딱 잘라 말했다.
“정성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어, 얼른 다른 차를 내오지 않고!”
“그냥 얘기하지요.”
“아아… 예…….”
벤샨은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러기엔 이미 그르친 일인 듯하다. 퓨리스가 이대로 대면을 시작하려는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네놈은 죽은 목숨이로다!’
‘아, 아니……!’
솔하는 벤샨이 보내는 강력한 눈빛에 안절부절 못해했다. 이 직업에서 짤릴지도 모를 형국! 하지만 실상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어 있는가? 그저 말에 따라 라이라이 차를 가져온 ‘죄’밖에 없었다.
한데 잠자코 있던 퓨리스가 입을 열었다.
“혹, 혼내시렵니까?”
“예?”
“아니, 방금 솔하를 보는 눈빛이 차가워서 말입니다.”
“하, 하하… 혼내기는요? 저는 그런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벤샨은 손사래까지 쳐 가며 부정했지만, 퓨리스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방금의 그 눈빛은 처음 그날 자신을 빨리 내보내라는 음성의 느낌과 똑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예감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 퓨리스는 머리를 굴려 일부러 믿는 투로 말했다.
“그렇지요? 제가 예전에 대인답지 않게 솔하를 혼내는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하하…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합니다.”
“예, 저 또한 그런 사람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벤샨의 솔하 케블러는 크게 감복했다. 손님으로 찾아와서 자신을 이렇게 위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자신은 필히 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것이다.
벤샨은 분명히 그렇게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 방금의 말로서 벤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저 남자가 떠나더라도 ‘대인’이라는 말 때문에 벤샨이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을 증명해 주었다. 케블러는 아무도 모르게 꾸벅 인사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한편 벤샨은 약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지금까지 소인배의 행동을 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단은 솔하를 무르기로 판단했다.
“너는 이만 가 보거라.”
“예.”
이러면서 벤샨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까지 좋은 대우를 보여 주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옷이 아주 멋들어지십니다.”
“시장 옷입니다만.”
“시, 시장 옷이라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곡물을 사려고 합니다.”
퓨리스의 행동은 벤샨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보통의 최상위 단골들은 벤샨의 저러한 말이 입에 발린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들어도 듣기 좋은 게 칭찬이기 때문이다.
하나, 퓨리스에겐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나쁜 대우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칠 노릇이로군… 더 구슬려서 완벽하게 단골을 만들어야 하는데.’
퓨리스는 담담한 표정을 말을 이어 나갔다.
“가마 수는 저번과 같습니다.”
“삼십 가마요?”
“예.”
“아,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배달을 맡겠습니다.”
“그래 주시면야…….”
한데 벤샨이 급히 퓨리스의 말을 끊는다.
“아아, 죄송합니다. 배달은 힘들겠습니다.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걸 깜빡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군요.”
“대신 운송 마차는 구비해 드리겠습니다.”
“저야 감사하지요.”
벤샨은 한숨을 내쉬며 가쁜 숨을 달랬다. 깜빡 잊고 있었다.
기다림의 음성을 뱉었다.
“거래를…….”
“아, 물론이지요. 가마 수만 말씀해 주시면 배달… 아니, 바로 실어 드리겠습니다.”
벤샨은 깜빡하고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남자는 더트퍼리의 사람이 아니던가? 곧 죽어도 그 저주받을 곳에 자신의 배달부를 보내기는 싫었다. 고로, 말을 바꾼 것은 벤샨의 입장에서 최고의 안심이었다.
“원산지와 가격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읽어 보십시오.”
“예.”
퓨리스는 벤샨이 넘겨준 종이 하나를 들고 시선을 내리기 시작했다. 원산지는 저번과 같이 베르토르라 쓰여 있었지만, 가격은 저번보다 내려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볼 때, 벤샨이 일부러 가격을 내려준 것 같았다.
물론 여러모로 퓨리스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돈이 내밀어진다.
“감사합니다.”
“예. 그럼 가 보지요.”
“아아, 음식점을 예약해 놓았는데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벤샨과 그리 오래 대면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마을에 가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퓨리스는 딱 잘라 거절했다. 벤샨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한탄의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것은 하나도 대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슬리기의 최고인 내가 벌써 손님을 내보내다니.’
***
퓨리스는 곡물소를 떠나 이번엔 제작소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하나, 그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제작소가 어디 있지?’
한 번도 찾지 않았고, 한 번도 가지 않았던지라 당연히 막힌다. 더구나 더 이상 바바루의 소개소를 찾지 않기로 해서 찾는 게 더 힘들었다.
‘큰 거래도 아니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매우 급한 상황이거나, 일일이 돌아다니기가 어렵거나, 한 번에 거래를 하고자 할 때 소개소를 찾는다. 퓨리스는 한 번에 집 100채를 짓는 의뢰를 구하기 힘들어서 소개소를 찾았고, 이번 곡물 거래 또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그 만큼의 물량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곡물소를 찾기가 힘들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소개소가 편하긴 편하군.’
꽤 오래 걸어 다닌 것 같은데 제작소의 제자도 찾지 못했다. 결국 퓨리스는 길을 거닐던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근처에 제작소가 있습니까?”
“근처랄 것도 없이 큐스에 제작소는 칸 제작소 하나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칸 제작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쭉 가시다가 두 번째로 나오는 왼쪽 골목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진작 이렇게 물어볼 것을. 굳이 소개소가 없어도 이제부터는 건물을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퓨리스의 발걸음이 벤샨의 곡물소를 갈 때만큼이나 빨라진다.
08장―칸 제작소 (1)
매우 허름한 곳이었다. 푯말은 낡아서 뜯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너무 위태해보였다. 더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 정도는 더 심했는데, 이곳이 제작소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계신지요?”
“아, 들어오게.”
발을 안으로 살짝 떼서 주인장을 찾으니 얼굴 가득 흰 수염을 뒤덮은 노인이 나타나 퓨리스를 반겼다.
노인은 손짓으로 퓨리스에게 자리를 건넸다.
“앉게.”
“예.”
퓨리스는 그러면서 제작소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먼지 같은 것은 없었지만, 공구나 의자, 도면 같은 것이 여기저기에 널 부러져 있어 여전히 창고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데, 이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연다.
“많이 어둡지?”
“아… 좀 그렇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장사가 되야 꾸미기라도 할 텐데 말이야.”
“장사가 잘 안 됩니까?”
“한 삼 년쯤 됐지.”
“삼 년이요? 장사가 안 된지?”
“그렇네.”
처음에는 노인이 귀찮거나 힘들어서 제작소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삼 년이나 손님이 없었다고 하니 단번에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생활한단 말인가?
장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손님이 없으면 무어로 먹고 사는가?
퓨리스의 얼굴에 말도 안 된다는 기색이 역력히 떠오른다.
“대, 대체… 지금까지 어찌 생활하셨습니까?”
“그냥…….”
“…….”
노인은 그리 말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동안의 노인의 삶을 알 수 있었다. 아끼고 아껴서 생활했을 것이고, 막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작소에 있는 물건을 팔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