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계농부 1권 (18화)
08장―칸 제작소 (4)


“흠… 어르신. 어르신 먼저 쉬십시오.”
“그럼 자네는?”
“저는 롬숄 강에 다녀오겠습니다.”
“이 시간에? 내일 나와 함께 가게. 체력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완전한 상태에서 찾는 게 더 나을 것이야. 또, 만약에 간다 하더라도 이렇게 깜깜한 시각에 무얼 찾겠다는 건가? 이것은 시간과 체력의 낭비밖에 되지 못해.”
퓨리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리페어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제가 원래 밤눈이 좀 밝습니다.”
“어째서?”
“깜깜한 밤에 수련을 많이 했거든요. 합합.”
허공을 가르는 빠른 주먹. 무위에 대해 잘 모르는 리페어도 퓨리스의 주먹이 빠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체력은?”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아주 팔팔합니다.”
제자리에서 두어 번 뛰는 퓨리스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쳐 흘렀다. 아까보다 체력이 좋으면 좋았지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리페어는 ‘코드라스와 같은 고향에서 온 무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대신 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알아 주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할 터이니,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여관으로 오게나.”
“예, 그러겠습니다.”

짙은 어둠이 자리 잡은 새벽. 태양은 당연히 있을 리 없고 빛나는 달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한데, 누구 하나 거닐지 않은 공간에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그의 발걸음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움직였고, 어느새 그가 어딘가에 당도한다.
좌르르―
물길이 흘러내리는 롬숄 강의 하류 부근. 인영은 거기에서 두 발을 지탱하고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후.”
달빛에 비춰지는 얼굴은 퓨리스의 것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던지라 여태까지는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퓨리스는 두 눈을 불태우며 꼭 찾으리라 다짐했다.
반드시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빨라서 나쁠 건 없다.
‘잠깐.’
곧바로 수로의 통로를 찾으려했던 퓨리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아무리 통로가 있는 대략적인 위치를 알더라도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까 낮에 그렇게 찾아 해맸는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길이 흘렀던 흔적이 있을 텐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한들 물이 흘렀던 곳이다. 고로, 예전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자연의 흔적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통로를 막아 놓은 곳은 다른 곳과 조금 다를 것이다.’
미세하게라도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주 약간이라도 다른 부분과 다르게 흐르는 것이랄까.
퓨리스는 흘러가는 롬숄 강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부분도 있었고 그늘에 가려 흘러가는 모양새만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하나 물줄기는 하나같이 동일했고 다른 곳과 다르게 이상하게 흐르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 퓨리스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아주 약간이라도 다르게 흐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윽고 퓨리스는 방금 전보다 더더욱 시선을 집중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눈은 낮만큼이나 밝아서 깜깜해서 찾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았다. 퓨리스는 이러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물은 아주 작은 틈새라도 파고든다. 바늘구멍보다도 좁은 곳을 들어가는 게 물이야.’
퓨리스가 찾고 있는 게 바로 그 틈새였다. 아무리 딱 맞춰 통로를 막아 놨다 하더라도 손톱만큼의 빈 공간이 없을 리 없다. 퓨리스는 그렇게 확신하고 그 빈 공간을 찾아 다르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확신’은 아니다. 하나 ‘도전’을 성공시키면 ‘확신’이 될 수 있다.
‘집중.’
내면까지 조종해 가며 퓨리스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든 달빛이 더 환해지든 상관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롬숄 강의 물줄기를 관찰하는 일.
‘어? 잠깐.’
통로가 있는 부근을 샅샅이 뒤지던 퓨리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몇 번을 지나쳤던 곳이지만, 이번만큼은 지나치지 않았다.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 물줄기 하나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너무 작아서 알고 보지 않는 한은 죽어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본 것이 효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하나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확실하게 살펴보자.’
퓨리스는 있는 집중과 가지고 있는 시선을 모두 그 곳에 가져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조차 이제 들리지 않는다. 무공간의 세계에서 오로지 그곳만을 바라보는 느낌. 이윽고, 어느 순간 퓨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찾았다!”
외침과 동시에 작은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몸이 강물로 빠져들어 간다.
첨벙!
물길이 대지로 튀어 오르고 퓨리스의 전신은 어느새 촉촉해졌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꽤나 수심이 깊다는 것.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수영을 할 줄 아는 퓨리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어느 순간 무언가가 시선에 잡힌다.
물속이었지만 퓨리스의 시선은 밝기 그지없었는데, 아무래도 통로의 입구를 찾았다는 기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듯싶었다. 어찌 되었든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진 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속에서 찾았어도 힘들었겠군.’
물속의 흙벽과 거의 같은 모양과 색을 유지하고 있는 커다란 인조 벽이 무언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인조 벽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무심코 지나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다. 찾았기 때문에.
퓨리스는 손으로 살짝 인조 벽을 만져보았다. 둥그런 모양의 무언가가 느껴진다.
‘바로 빼 보자.’
고민도 없었다. 머뭇거림도 없었다. 퓨리스는 곧바로 인조 벽을 잡아당겼다. 오랫동안 박혀 있어서 웬만한 성인이 잡아당겼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 이보다 더한 것도 들어보았던 퓨리스에게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파아아―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뭔가가 빠지는 느낌이 났고, 동시에 전신이 급격히 빨려 들어갔다.
퓨리스는 아차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대지로 뛰어올랐다.
아주 센 물길은 아니었지만, 넋을 놓고 있었으면 그대로 들어갔을 지도 몰랐다.
한데, 퓨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잡힌다. 방금 전의 위기 상황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됐다!”
분명히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물길이 뚫렸음에도 다른 갈래로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귀를 기울이면 무언의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온다.
좌르르르―
땅 속으로 뚫린 수로. 그게 겉으로 들어날 리 만무했다.



09장―농사의 시작 (1)


더트퍼리에는 요 근래 두 가지 기쁜 일이 생겼다.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해결된 것이 첫 번째 기쁨이요, 로크와 함께 더트퍼리에 필요한 물건과 물품을 만들어 줄 인물 하나가 생긴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일단 후자의 환영식은 뒤로 미루고 사람들의 시선은 ‘호수’로 쏠려 있었다.
“호오, 이건 천운이외다.”
“모두의 염원이 성사되었소이다.”
베그마와 코우즈는 말장난을 하면서 차올라 있는 물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흙바닥만 드러냈던 곳에서 이렇듯 콸콸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깅스턴은 손으로 물을 떠보았다.
아직 실감이 가지 않아서 직접 만져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오오!”
무뚝뚝한 깅스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기쁨을 알만했다. 깅스턴은 입으로 물을 가져갔다.
“시원하군.”
이 순간부터는 더 이상 큐스에서 물을 사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듯 많은 물이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으랴.
“먹어도 돼요?”
“그럼.”
롬숄 강의 물은 1급수로서 바로 마셔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기에 깅스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윽고 저마다 손바닥 가득 물을 떠보는 아이들.
하나 이것은 비단 아이들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중년의 사내들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도 물을 떠서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무언가.
말라 있었던 통로를 적셔 주면서 입안 가득 상쾌함을 전해 주었다.
“아, 좋다.”
깅스턴에게 물을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았던 에이린이 이번에는 세안을 하기 시작했다. 물속에 두 손을 집어넣어 적신 뒤 그것을 얼굴에 가져갔다. 물을 마실 때만큼이나 상쾌한 느낌이 났다.
일종의 군중심리가 작용해 버린 걸까. 이번에는 사람들이 세안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퓨리스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호수이되, 물 저장고인가.’
정확히 말해서 호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방향에서 물이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다. 하나 물이 새어 나가지 않고 모여 있어서 호수가 맞기는 맞다. 이게 맞은데 저것도 맞으니 결론적으로는 ‘가짜 호수’가 되는 셈이었다.
퓨리스는 깊은 감탄을 터뜨렸다.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니, 이걸 만들어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구나.’

더트퍼리에 호수가 생긴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 리페어는 더트퍼리의 환경에 거의 적응한 상태였다. 애초부터 저주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거기에 대한 부분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지만 주위가 너무 스산해서 약간은 간담을 졸였었다. 하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더트퍼리 마을의 남쪽 부근에 자리 잡은 ‘집’. 전체 100채 중에서 남은 집이 리페어의 제작소가 되었다.
“아, 그렇게 하면 되는군요.”
“그렇지.”
“감사합니다.”
리페어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는 로크였다. 정식으로 제작자의 길을 걷기로 한 로크에게 리페어는 스승이 되었다.
물론 리페어는 처음 약간 망설였었다.
지금까지 제작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내가 이 일을 잘할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고민’만 되었을 뿐,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로크는 금방 따라왔다.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안다라는 말이 딱 맞는 사내.
리페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좋은 후계자가 될 것이다.’
자신에게 제작을 배우려는 이는 없었다. 돈도 잘 벌지 못하는 데다가 제작자가 되느니 대장장이가 되겠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어느 대장장이가 십수 명의 제자를 두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장장이의 길을 걷는 게 어떻겠는가?”

몸은 간절했다. 그냥 그의 말을 따르라고 강하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은 따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땀과 열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한순간의 욕망 때문에 없앤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리페어는 꾹 참았다. 언젠가는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는 그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다.
리페어는 로크를 바라보았다. 번지르한 수염의 중년의 사내.
일찍이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한 세월의 반 가까이에 접어든 사람이 제작자의 길을 걷고자 한다.
‘상관없다.’
로크가 어떤 상황과 위치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크가 보여 주는 땀과 열정만으로도 그것이 모두 덮어지니까.
리페어는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혼자서 할 때보다 훨씬 편하고 수월한 작업.
“참 편리한 방식이야.”
“예.”
“아, 한데 다른 도시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물을 이용하지?”
“직접 물길을 뚫어 물을 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농토에 말이지?”
“예.”
리페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보다는 퓨리스의 원형 통로 방식이 수월하겠군.”
“예, 물 조절이 훨씬 쉬우니까요.”
대개의 도시에서는 농토 근처에 물길을 파서 그것을 강가 등에 연결시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물을 농토에 이용한다. 생각해 보면 단순하고 쉬운 방법 같지만 여기에는 나쁜 점이 많다. 물 조절이 쉽지 않아서 반드시 필요한 만큼만 쓰기가 어려울 뿐더러 비가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물이 넘치는 게 부지기수다.
한데, 원형 통로의 방식을 쓴다면 이 부분을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다. 필요한 만큼만 쓴 뒤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페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퓨리스의 제작에 감탄했다.
‘좋은 방법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