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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19화)
09장―농사의 시작 (2)


다시 며칠이 흐른 더트퍼리.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무리를 이뤄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베그마가 길게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드디어 나오는군.”
“기대 되는구만.”
코우즈 역시 쌍심지를 킨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며 어느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농지의 한쪽에 있는 ‘원형 통로’.
이윽고 일이 벌어진다.
좌르르―
콸콸콸 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물은 거침없이 나아가 농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농지 전체를 적셔 버리는 ‘농업용수’.
한 가지 모자란 부분이었던 ‘생기’가 드디어 채워진 것이다.
“대단하네!”
“아닙니다.”
“아니기는. 누가 이곳에서 이런 일까지 가능하리라 생각했겠는가?”
깅스턴은 퓨리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쁨을 표출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던 일이라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는 ‘가정’은 가지고 있었다. 하나 막상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니 어찌 이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이린은 큼지막하게 입을 벌리고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박이다.”
“왜?”
“그냥 이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퓨리스의 손이 에이린의 손에 들려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기까지 닿는 거지?”
“응.”
“우아, 대박이야, 대박.”
“자꾸 대박이래.”
“대박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표현할 순 없어.”
“하하!”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에이린의 모습에 퓨리스는 웃음을 지었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에이린이 물었다.
“오라버니, 저번부터 만들었던 거 있잖아. 그… 써레라는 거.”
“응.”
“그걸 물을 채운 논에 쓴다는 거지?”
“응. 써레질을 하면 논바닥이 평평해져서 모를 잘 심을 수 있어.”
“그렇구나. 오라버닌 참 대단한 것 같아.”
연속되는 에이린의 아부(?)에 퓨리스는 그저 머쓱하기만 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리페어가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만, 자네.”
“아,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야, 내가 몸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또, 방해할 생각도 없고 말이지.”
“예? 방해라니요?”
“아, 아니야. 아무튼 잘되어 다행이야.”
“모두 어르신의 덕입니다. 제가 주문한 것보다 더 좋게 제작해 주셨더군요.”
“무슨 소릴,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뿐이지.”
퓨리스가 애초에 주문했던 것은 까만색의 원형 통로였다.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에 길이는 호수에서부터 논 하나에 닿는 걸로 했다. 한데, 리페어가 최종적으로 보여 준 원형 통로는 한층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이동되기 편하게 구부러지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재질 또한 가벼우면서 튼튼한 것을 이용했다.
어쩌면 이게 대장장이와 제작자의 차이점일지도 몰랐다.
‘주문자의 제작 물품에 내 생각을 더해 더 좋게 만들어준다.’
리페어는 늘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제작에 임했고 이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퓨리스가 고마워하는 것에 손을 내저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어찌 되었든 리페어 역시 기분이 좋았다.
‘점점 더 100년 전의 더트퍼리에 가까워지는군.’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100년 전의 더트퍼리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특징적인 부분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 시절의 맑은 호수, 장대하게 펼쳐진 논, 지저귀는 산새, 파랗게 피어오르는 새싹까지.
아직은 모자라다. 한참은 더 부족하다. 하지만 급격히 가까워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물기 하나 없는 지옥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월아 네월아 맛있게 건초만 뜯고 있던 소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이번 임무는 저번과 거의 동일했다.
쟁기 비슷한 것을 메고 논을 가는 일. 달라진 점은 물이 있는 것 하나였다.
농부들은 저마다 장화를 신고 소를 끌기 시작했다.
“쟁기만큼이나 신기하군.”
“써레라…….”
“오오, 이것 보게. 흙덩어리가 잘게 부서지고, 땅도 판판해지는군.”
신기하게 써레를 바라보는 이. 써레를 생각하는 이. 벌써부터 써레를 써 본 이.
퓨리스는 그 중점에서 하하호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이 잘되어 간다.’
가장 어려운 작업일 것이라 생각했던 물 대기 작업을 최종적으로 끝마쳤다. 그리고 하루 동안의 축제를 열고, 오늘 써레질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써레를 미리 만들어 놓았기에 일을 시작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번 작업의 중점에도 역시 에이린이 있었다.
“우아, 신기해.”
“처음에만 그렇지, 나중 가면 재미없다고 할 걸?”
“아냐. 내가 쟁기질을 할 때 재미없다고 한 적 있어?”
“아… 없었네.”
“나는 농부 소녀야. 모든 게 재밌다구.”
“하하, 그래.”
에이린은 소를 운용해 가면서 퓨리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쟁기 비슷한, 그러면서 조금은 다른 모양의 써레.
써레를 멘 소가 지나갈 때마다 놀랍게도 땅이 판판해지면서 부드러워진다.
퓨리스 역시 써레질의 놀라움에 감탄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농업은 대단하군.’
이 세계에서는 써레질이라는 작업은 두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가 없다. 땅이 울퉁불퉁하든 어떻든 그냥 모를 심는다. 딱히 땅을 판판하게 할 방법이 없는 데다가 그렇게 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농부들과 에이린이 이토록 놀라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리페어는 다른 부분에서 놀라워했었다.
‘더트퍼리의 논이 유난히 평평했던 이유가 이거 였었구만!’
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코드라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사실 몇 번 이러한 농사를 경험해 보기는 했지만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은 태초부터 무인이었기에 정식으로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코드라스가 농사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쟁기질은 어떻게 해야 잘 되는지, 또 물은 얼마나 대야 하는지, 거름은 얼마만큼 뿌려야 하는지, 지금 하는 써레질까지.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다.
‘꼭 좋은 결실을 맺겠습니다.’
퓨리스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

큐스 소도시는 상업이 주를 이루는 도시라 농업이나 어업은 크게 발달되지 않았다. 하나, 이상하게도 농부나 어부에 종사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큐스 소도시로 몰려들었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발달은 되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이 많다.
무슨 말인가 하면 농부에게 필요한 육묘장과 고기를 낚을 때 필요한 도구점이 적절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결국 논과 바다는 볼 수 없지만 농부와 어부는 넘쳐 난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이곳은 큐스의 대형 육묘장.
건물을 짓고, 그 안의 온도를 조절해 육묘를 하는 곳으로, 큐스에서 가장 크게 운영되는 곳 중 하나였다.
육묘장의 주인 커스는 손님이 오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났다. 앉아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서 오시오.”
“예.”
들어온 이는 평범한 남자였다.
젊은 농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기에 커스는 아무렇지 않게 남자를 맞았다.
“자, 얼마나 드릴까?”
“흠.”
청년은 장 곳곳을 둘러보면서 일단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무척 크군요.”
“이 근방에서 이곳만큼 크고 잘되어 있는 곳이 없지.”
“그렇군요.”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커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남자지만 육묘장을 좋게 봐 주어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게 웃음 짓는 커스의 귀로 남자의 말이 울려 퍼졌다.
“그럼, 여기에 있는 것을 모두 주십시오.”
“응?”
아무래도 귀가 이상한 모양이다. 이곳의 못자리를 모두 사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들리다니.
커스는 남자에게 말했다.
“잘못 들은 것 같아 그러니 다시 말씀해 주시오.”
“이곳의 것을 모두 사겠습니다.”
“…….”
두 번이나 잘못 들을 정도로 귀가 이상하지는 않다. 커스는 얼굴 가득 불신의 기운을 띠웠다.
이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자신을 두고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장난이나 하려거든 어서 가시오.”
“예?”
“가시오.”
손님이 잘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렇듯 장난치는 손님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었기에 커스는 정색을 풀지 않았다.
한데, 되레 청년이 이상하다는 듯 묻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육묘를 한 번에 살 수는 없는 것입니까?”
“거… 장난은 안 받는대도?”
이 육묘장은 중도시 이상으로만 넘어가지 않으면 그 어디와 견주더라도 하나도 밀리지 않을 만큼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한 영토의 영주가 아닌 이상은 전체를 모두 살 수 없다는 얘기다.
커스는 이만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으려 했다.
“정말입니다. 조금씩 사는 것보단 한 번에 사는 게 좋을 듯싶어 가장 큰 육묘장을 찾았고,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육묘를 전부 산다면 필요한 수량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커스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불신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이오?”
“예, 돈이라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 아니요.”
아직까지도 머릿속은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말하고 있었다. 장사를 해 오면서 이렇게 큰 거래는 처음이었고, 또 이런 거래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나, 바로 지금 현실로 다가왔다.
커스는 양손으로 육묘장 전체를 둘러 가리켰다.
“못자리는 상자 단위로 팔고, 하나에 2천 우옴이오.”
“예.”
“어찌 나를 것이오?”
“대형 운송 마차가 있습니다.”
이제는 머릿속도 이 상황이 진짜 사실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대형 운송 마차까지 끌고 왔는데 이 이상의 거짓이 어디 있겠는가? 커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괜히 미안하군.’
장난이라고 말하면서 정색을 했던 게 미안해졌다. 하나, 이 부분에서 커스에게 큰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아까 그 상황은 누가 있더라도 분명히 믿을 수 없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커스는 못자리를 상자에 담기 시작하면서 남자에게 물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예.”
“대체 이렇게 많은 못자리로 무엇을 할 생각이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농사를 지을 것입니다.”
“아…….”
청년의 대답은 커스의 질문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커스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게 아니었다.
“아니, 이 많은 못자리를 쓸 땅이 있소?”
그러고 보니 이게 제대로 된 질문이었다. 커스는 한 영토의 영주도 아닌 남자에게 이곳의 못자리를 모두 쓸 만큼의 땅이 있을지 궁금했다. 마음 속의 짐작으로는 여러 사람이 쓸 못자리를 한 번에 구입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예, 있습니다.”
“단체로 구입하는 모양이오? 그래서 땅이 충분한 것이고?”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셈입니다..”
“아, 알겠소.”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은 있었다. 아무리 단체라 한들 그 땅을 어찌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 인물들은 누구인지.
하나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파는 입장이니 내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커스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작업이 끝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