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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20화)
09장―농사의 시작 (3)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더트퍼리는 완전히 달라졌고 그것은 실제로 보여지고 있었다.
스산하고 을씨년하기 그지없었던 근방 전체에 생기가 생겼다.
풀이 자라난다. 새싹도 피어오른다.
메마른 나무를 대신해 새로운 나무 종자가 심어진다.
사람들은 꽃도 심기 시작했다. 붉거나 파랗거나 노랗거나 오색 빛이 물든다.
갈라져서 흉측했던 땅도 모두 사라졌다. 기름지고 싱싱한 흙이 이리저리 바닥을 구른다.
이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할 일도 생겼다.
아주머니들은 꽃을 심거나 가정생활을 도모했다.
아이들은 언덕을 뛰어다녔다. 이따금 일손이 모자라면 엄마와 아빠를 도우기도 한다.
노인들은 회의에 참석하거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
청년들과 중년의 사내들은 농부가 되어 정식으로 농사일을 맡았다.
그리고 퓨리스는 바삐 움직인다.
‘모내기라는 게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군.’
모 하나를 쥐고 논에 심는다. 어찌 보면 대충대충 던져 놓으며 빠르게 작업하면 될 듯도 하지만 퓨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뭐든지 정성이 중요한 법이다.’
귀찮아서 대충하다가 나중에 후회할 수가 있다. 그럴 리 없을 것 같아도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또, 아주 크게 귀찮은 작업도 아니다.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될 뿐이다.
거기에 공들여서 작업하면 좋은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성취감과 기쁨 그리고 만족.
‘대충한 것보다 그 얼마나 편하단 말인가?’
한편, 농부들 역시 저마다 허리를 굽히고 모를 심고 있었다. 어설픈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돌연 깅스턴이 바지를 걷어올리고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에? 촌장님?”
“왜? 내가 오면 안 되나?”
“아, 그건 아닙니다만…….”
깅스턴은 아직 건장했다. 틈틈이 걷고 운동해서 건장한 남자는 아니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은 있었다.
고로 농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갑게 깅스턴을 맞는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동시에 바지를 걷어붙힌다.
이윽고 망설임 없이 모두가 논으로 뛰어든다.
“나도 도울래요!”
“당신 나 없이 잘할 수 있어요?”
“잘할 수 있으려나.”
아이들 여인들 할 것 없이 모두가 논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점마다 뭉쳐진 모를 들었고, 곧 작업에 임하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깅스턴의 경우만큼이나 오히려 더 기쁘게 맞아 주었다.
“고마워.”
“아니에요.”
부인과 함께 하는 작업! 금술도 좋아지고 작업의 효율도 좋아진다.
사랑을 나누며 하는 일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나 왔지요.”
“어이쿠, 오셨어요, 공주님.”
“헤헤, 그 호칭 좋은데?”
“좋다고? 그럼 이제부턴 안 해야겠다.”
“왜왜왜. 계속 해 줘.”
“싫거든요.”
존댓말과 반말이 뒤죽박죽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퓨리스와 에이린.
한참 동안 놀다가 이제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에이린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일을 해야겠어.”
“빨리도 말한다.”
“어머, 오라버니도 놀아 놓곤.”
“내 왼손은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고. 너처럼 모든 신체 부위가 놀지 않았지.”
갑자기 말이 없어진 에이린. 퓨리스는 뭔가 하며 에이린을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얼굴에 닿았음을 느꼈다.
“아.”
에이린의 손이 양볼을 뒤덮었다. 그녀의 손에는 흙덩어리가 묻어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너!”
“예쁘다, 우리 오라버니.”
“너도 묻일 거야.”
퓨리스는 양손을 논 속 깊이 집어넣고 다시 끄집어냈다. 그의 손에는 질펀질펀한 액체가 잔뜩 칠해 있었다.
“봐, 봐 줘, 오라버니.”
“안 돼.”
“이, 일! 일 열심히 할게!”
“정말이지?”
“응! 진짜 열심히 할 거야.”
천천히 내려가는 퓨리스의 손. 애초부터 그녀의 볼에 흙을 묻힐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협박 요소로 쓰기에는 좋은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에이린의 시선은 곧 퓨리스의 행동을 주시하게 되었다.
“우아, 이거 완전 대박이다.”
“너는 맨날 대박이래.”
“대박이지, 그럼! 이 상황에서 그 말보다 좋은 게 있어?”
에이린은 연신 웃음을 머금고는 다트 놀이를 하듯 모를 심어 넣었다.
하나 대충하는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할 때는 하는 아이다.’
퓨리스는 그런 에이린의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도중, 문득 에이린이 입술을 연다.
“오라버니.”
“응?”
불렀으니 고개를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인지상정. 한데, 그녀의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거뭇거뭇한 얇은 손가락 하나가 코를 찔러온다. 한 번 당해본 일이라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게 자꾸 하게 되네.”
“좋아.”
퓨리스는 이번만큼은 용서치 않고 검지 손가락으로 흙을 듬뿍 찍어 에이린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녀의 하얀 볼에 까만 점이 생긴다.
“해 보자는 거지?”
“어, 어?”
“좋았어. 내가 아까부터 생각해 왔던 게 있지.”
에이린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양손을 논 속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다시 올라온 그녀의 손에는 무언가가 잔뜩 쥐어져 있었다.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그것이 흙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퓨리스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도망쳐야 했다.
“제, 젠장!”
“히히.”
“미, 미안!”
“늦었어. 내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모내기 작업을 두고 두 남녀가 뛰어다닌다. 대개는 여자가 도망가고 남자가 쫓기 마련인데, 이 남녀는 뭔가 이상하다. 남자가 여자를 피해 도망가고 여자는 그 남자를 향해 죽기 살기로 쫓는다.
가만히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베그마와 코우즈가 대화를 나눈다.
“여자 쪽은 확실한데, 남자 쪽은 아직도 잘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선남선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군.”
두 사람은 두 남녀를 한참을 더 바라보다가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부럽지는 않았다. 예쁜 마누라가 옆에 있으니까.



10장―귀족 회의 (1)


큐스의 영주, 스케일은 혹시나 빠진 것은 없을까 계속해서 채비를 가다듬었다.
“다시 한 번 살펴보아라.”
“예.”
시녀는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되는 점검에 얼굴 가득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채비를 맡은 사람은 이 도시의 영주.
말 하나라도 잘못했다가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도 했다.
귀족 회의!
벨스로크 왕국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대회의(大會議). 왕국의 ‘거대’ 귀족들이 전부 모이는 이 회의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내가 이 정도는 하는 귀족이라고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 조건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권력. 부. 명성.
이 세 가지 중에서 단 한 개라도 특출 난 것이 없으면, 애초부터 귀족 회의에 참가할 수가 없다. 비좁은 땅에 특산품이 없으며 남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라면, 죽을 때까지 귀족 회의에 발조차 디딜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귀족 회의에 참석한 그 순간부터는 아주 높은 귀족을 제하고는 여타의 귀족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스케일이 채비를 몇 번이고 신경 쓰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이미 초대장이 날라 와서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기정사실화가 되었지만,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좋으니, 고위 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고 싶었다. 잘 보이면 장차 상승 직위를 꿈꿀 때에 백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스케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흐흐.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웃음 짓던 스케일은 잠깐 지난날을 회상했다.
어언 15년.
어떻게든 귀족 회의에 들어가 보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 했다. 출산 장려금까지 주고 건물을 대거 공사하면서 중도시가 되 보려고도 했고, 이곳저곳 다른 도시들을 도와주면서 명성을 쌓아 보려고도 했다.
‘효과는 미미했지.’
분명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너무 미미했다. 아니, 스케일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큰 것이었지만, 다른 귀족들과 견주어 보니 부와 권력과 명성이 너무나 뒤쳐졌다. 고로, 귀족 회의는 그만큼 어려운 자리라는 것이었다.
시간은 흘러 현재가 되었다.
하나, 15년 동안의 노력이 헛되이 느껴질 만큼, 큐스는 여전히 중도시로 넘어갈 수 있는 인구수를 채우지 못했고 건물도 따라가지 못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부와 명성은 크게 바뀐 게 없다는 말이다.
‘직위도 올리지 못했다.’
또한 직위도 그대로였다. 15년 전에도 지금도 남작이다. 부와 명성에 더불어 권력으로도 귀족 회의의 조건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한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미친 일’로 생각했던 일들이 말도 안 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더트퍼리에 100채의 집이 지어졌다. 엄청난 육묘와 소도 더트퍼리로 갔다. 아무리 멍청한 바보라도 더트퍼리에 그러한 투자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수하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소식이 들어온다.

“도시 내의 건축소가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가축소를 세 배로 확장하겠다는 허가서가 들어왔습니다!”
“큐스 제일의 커스 육묘장도 가게를 확장하겠다는 허가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딱 이 시점. 큐스의 서신 통에 한 통의 서신이 도착한다. 밋밋한 보통 갈색 종이가 아닌, 번쩍번쩍한 종이의 그것은 굳이 왕궁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국왕’의 서신이었다.

친애하는 스케일 경. 형식적으로 하는 말로 보일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니 내 그냥 말해 볼까 하오. 변두리 지역에서 늘 도시를 키우고자 하는 스케일 경의 마음을 내 일찍부터 알고 있었소. 다른 도시와 교류도 활발하고 좁고 답답한 시장을 그 정도로 키운 것도 역시 놀라웠소. 그럼에도 승격되지 못하는 큐스를 보면서 본인은 늘 마음이 안쓰러웠소.
이 서신은 스케일 경의 큐스가 승격된다는 내용이 아니오. 목적은 스케일 경을 이번 귀족 회의에 초대하자는 것, 그것뿐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자의 내 말이 형식적으로 들리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큐스를 보면서 내 더 이상은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스케일 경. 혹, 이번 귀족 회의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같이 동행한 서신병들에게 답을 주기 바라오. 내 경을 원하는 마음을 여기에 쓸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지만, 경이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답을 하리라 믿겠소. 그럼, 기다리겠소.

스케일의 양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작의 직위를 세습 받았을 때보다 곱절의 곱절만큼은 더 큰 떨림이었다.
스케일의 눈동자가 커진다. 무언가에 홀린 듯 눈동자가 서신의 맨 윗줄로 향했다. 꼼꼼히 읽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의구심이 들었다. 서신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었다. 내용을 읊을 정도로 글자가 머리에 박혀 들었다.
스케일은 눈앞의 서신병 다섯을 보았다. 그들은 ‘병(兵)’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만큼이나 외양이 화려했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작의 위치에서 이런 것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임에 분명하나, 스케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현재 벌어진 상황이 그에게는 훨씬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