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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8화)
2. 집 밖에는 (3)


“…….”
그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났다.
칼롯 코즈너,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손길이 날렵해졌다.
그리고 몇 가지… 아까와 다른 정보들이 화면에 떠올랐을 때.
그의 이마에서 주르륵,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건… 설마…….’
……평행우주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선택 속에서, 그 선택에 따라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모든 세상의 그 누군가는 동일인물이지만 그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은 순간순간 선택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인 세계, 그런 세상이 모두 동일 선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평행우주이다.
물론 다중 우주론이나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한 평행우주이론을 펼친다면 틀린 말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이 생긴 세상이 우주 어딘가에 반복되고 있을 거라는 말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칼롯 코즈너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란 것을 인지하게 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이 평행우주 이론이었다.
사실상 본래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단 하나가 다른 세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곳이 진짜 평행우주 속의 세계라면 우주적 마법 지식에 통달한 그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니, 많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신적 존재의 개입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모순점을 무마할 수는 없을 터! 그렇기에 이곳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워오는 것들을 모두 신에게 떠넘겨 버린 그는 바싹 마른 소매로 땀이 흥건한 이마를 닦았다.
두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에 난 땀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이곳이 현실이라고 생각한 잠시 잠깐 동안 생겨난 변화였다.
스스로를 진정시킨 그는 한순간 돌아올 뻔한 김현우를 다시 깊은 곳에 가두고 이내 피시방을 나섰다.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끝이 없었고 알고 싶은 게 많았지만, 끓어오르는 지적 갈증에 비해 왠지 손이 가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게 의미하는 바 역시도 몰랐다.
만약 지금 자신이… 진짜 칼롯 코즈너였다면… 비록 이곳이 꿈속이라서,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뿐이라고 한들 대언령사인 그가 마법에 대한 호기심을 저버리지 않았을 거란 것을… 그는 전혀 몰랐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깊은 한숨과 함께 한마디 내뱉었다.
“……피곤하구만.”
특별히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피곤이 잔뜩 배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갈라져 나온 목소리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그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그의 감긴 눈, 그 뒤편 의식 너머로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빛 크리스털이 빛났다.
그 찬란하고도 청명한 빛깔은 칼롯 코즈너가 일평생을 바쳐온 마법과 마나의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빛이었다.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푸른 크리스털은 단 한 치의 틈도 없어, 어디에도 불안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털의 온전한 모습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스스로가 쌓아 올린 업적의 사물화, 대언령사 칼롯 코즈너라는 자신을 의식화, 구체화한 그것이 무사하다는 것에 대한… 아주 ‘인간적인’ 한숨이었다.
대언령사라는 완벽한 신인류였던 칼롯 코즈너와 큰 괴리감이 있는 그 한숨은 일순간 또 다른 ‘누군가’와의 통일감을 주었다.
그 순간.
쩌-적!
단단한 크리스털에 갈라짐이 일었다.
칼롯 코즈너, 안심한 그의 시선이 의식세계에서 잠시 눈을 돌린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크리스털은 빛을 잃고, 청명함, 그 맑음은 어둡게 물들어갔다.
쩡!
파문이 생겼다.
망치로 내려친들, 정으로 아무리 쪼아댄들 흠집조차 일지 않을 것 같던 그것에 순식간에 균열과 파문이 생겼다.
맑은 푸른빛은 탁한 녹빛으로 물들어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늪지를 연상시켰고 그 위로 난 균열, 그 흉터들은 그로테스크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크리스털은 이내 땜질하듯 균열과 일그러짐이 생긴 곳을 메워나갔다.
어그러짐이 잦아들고 흉측하던 표면은 이내 매끈해졌다.
마치 처음과도 같은 모습.
하지만 단 하나, 본래의 청명한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푸른빛 대신 까만색에 가까운 진녹색의 크리스털… 그 흐릿한 크리스털 너머로 새하얗고 빼빼 마른 얼굴이 언뜻 비춰지나갔다.
사람의 얼굴이지만 남들보다 많은 게 부족한… 휑한 얼굴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족한 부분은… 두 개의 검은 구멍.
본래 눈이 있어야 할 그 자리가 텅 비어있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잠시 멀어졌던 칼롯 코즈너의 눈이 크리스털을 향했다.
텅 빈 구멍과 현기 어린 눈동자가 마주했다.
벌떡!
“----!”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유달리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그는 꼭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듯… 살며시 뜬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눈이 이곳이 pc방의 구석진 자리임을 확인했을 때.
풀썩.
벌떡 기립했던 그의 몸이 pc방 의자 위에 축 널브러졌다.
“정말… 피곤하구만.”
목소리는 좀 전보다 선명해졌지만 어째선지 더욱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늘어진 상태로 기대어 있던 그는 이내 몸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아까도 확인했던 컴퓨터 화면으로 향한 탓인 듯싶었다.
그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딱히 목적지를 떠올리지 않았건만, 어째선지 그의 다리는 갈 곳을 아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의 몽롱한 발걸음이 학교를 향했다.

* * *

띵동댕동-.
고등학생이 등교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드르륵-.
수업 종료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해진 교실의 뒷문으로 학생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몽롱한 가운데 길을 걷던 칼롯 코즈너.
바로 그였다.
이미 그에게 있어서 이런 꿈속 세상의 바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선지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학교로 향했다.
아니, 사실 그에게 있어서 ‘바름’이란 것은 이미 오래전에 벗어던진 족쇄의 이름이었다.
이세계에서의 수백 년은, 칼롯 코즈너라는 이름 아래 기존의 김현우를 벗어던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도 다른 세상의 칼롯 코즈너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규격 외의 무법자와도 같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바름을 벗어던진 지 오래된 그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게 된 건 이곳 꿈속 세상의 ‘김현우’라는 몸의 기억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의 머릿속으로 새까만 구멍 두 개가 스쳐 지나갔다.
턱!
“어쭈? 오늘 안 나오는 줄 알았는데 나왔네?”
“키햐, 난 또 이 새끼 안 나오길래 어디 꼰지르고 잠수 탄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
“나도 그런 줄 알고 오늘 존나 쫄아있었는데. 씨이발! 야! 늦게 올 거 같으면 형님들한테 미리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
어깨를 붙잡고선 그를 향해 거칠게 쏟아내는 폭언들.
그건 사람을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이들 무리는 언제나 똑같은 행동을 해온 만큼 앞에선 ‘김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이 시작된다면 언제나와 똑같은 레퍼토리로 그를 괴롭히고, 이곳 교실에서 그들이 가진 힘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가르쳐 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시작되었다면 말이다.
빤히-.
“어허… 이 손 치우시게.”
“……?”
“뭐……? 너 방금 뭐랬냐?”
“치우시게……? 방금 치우시게라고 했냐?”
푸하하하하!
이들 무리의 웃음을 시작으로 교실 곳곳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이내 교실 전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물론 이들 무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웃음은 진심으로 웃는다기보다는 호응의 의미에 가까웠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멈칫-.
아무렇지 않게 무리의 틈새를 걸어 나오려던 학생은 자리에 멈춰 섰고,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말투가 이곳에서 보이는 연령과 어울리지 않는 게로군! 한국어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인 탓에 아직 어색하건만…….’
물론 그들 무리가 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같은 모습이었다.
“…….”
“……?”
“……?”
연쇄 반응을 기다리던 무리들은 그저 자리에 서서 심각한 표정만을 짓는 그를 보며 자기네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했다.
“이 새끼 이거 학교 좀 늦게 오더니 맛이 간 건가?”
“근데 이 새낀 원래 맛 간 놈 아니었어?”
“글쎄… 일평생 지각이라곤 모르던 놈이 지각을 해버려서 더 맛이 간 건가?”
이때, 이들 무리의 리더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뭐, 그럼… 확인해 보면 되는 거 아니야?”
“어? 어떻……?”
빠악!
쿠당탕탕!
다른 녀석이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부지불식간에 날아간 주먹이 칼롯 코즈너의 안면을 강타했다.
때린 녀석을 제외하고 물어보려던 녀석도, 주변에 선 녀석도, 구경하던 녀석들도 모두가 벙쪄 있는 사이 칼롯 코즈너만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노려봤다.
‘위험은 감지했다…. 주변의 마나가 확실히 알려줬어…. 하지만…….’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은 마나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제외하곤 그 옛날 김현우의 몸과 똑같은 상태.
마법은 물론이고 체술로도 대응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난… 이 녀석을 알고 있어… 원래 이런 녀석이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