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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9화)
2. 집 밖에는 (4)
방금 그를 때린 남자의 이름은 박성민.
잘나가는 기업가의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 평소에도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언제나 동급생들 사이에서뿐이었고 그의 아버지의 사업가 기질을 물려받은 탓인지 그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깍듯했기에, 특출한 공부를 잘하거나 얌전하다기보다는 사고를 치는 쪽에 속함에도 선생들은 그를 두둔하곤 했었다.
어른들에게 있어서 그의 이미지는 깍듯한 말썽쟁이 정도였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의 그런 행동은 오직 그보다 높은 이들을 향한 것, 동급생들에게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언제나 동일했다.
폭군.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단어였다.
차세대 벤처 사업가로 이름 높은 그의 아버지는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것을 가졌으나 단 하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만은 가지지 못했다.
그런 그의 아버지는 이를 대신하기 위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행여나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괴롭히는 이가 있을까 봐 많은 사람을 주었고, 아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기죽을까 봐 많은 돈을 쥐여 주었다.
그로 인해 탄생한 것이 지금의 박성민이라는 폭군이었다.
아버지의 걱정으로 아들에게 부여한 것들은 같은 학생들 계급에선 절대적인 권력이었고 누군가에게 괴롭힘 당하지 말라고 준 그 모든 것들은 다른 이들을 괴롭히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있어 깍듯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었고, 그런 아들이 누군가를 괴롭힐 거라곤 추호도 상상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저, 그런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비틀린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가 잘못된 것이다.
‘부성애라…….’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박성민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낸 칼롯 코즈너는 남몰래 중얼거렸다.
이론적으로 굉장히 세세하게 알고 있지만, 부성애라는 것이나 모성애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낯선 단어였으니 말이다.
그의 머릿속 새카만 구멍이 점점 부피를 늘려갔다.
이때, 교실 뒤편에 넘어진 채 멍하니 앉은 칼롯 코즈너를 향해 이번엔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퍼-억!
“크헙!”
복부 깊숙이 파고드는 깨끗한 신발 앞코는 머릿속의 생각을 깡그리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고통이었다.
덥석!
너무나도 큰 고통에 그의 배에 틀어박힌 다리를 반사적으로 잡았지만 그건 칼롯 코즈너의 모습을 보며 낄낄대던 박성민의 심기를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나!”
퍽! 퍼억! 뻐억!
“엉?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간간이 끊기며 들려오는 박성민의 목소리와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발길질.
그때서야 칼롯 코즈너는 떠올렸다.
박성민은 자신의 주먹을 제외한 다른 부위가 현우의 몸에 닿는 걸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을.
또한 그의 규칙대로 언제나 가만히 맞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한참을 맞아 정신없는 와중에 떠올릴 수 있었다.
툭!
어느새 박성민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풀렸다.
힘이 다해 풀린 것인지, 아니면 그의 규칙에 순응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힘없게 바닥에 떨어진 그의 손은 아주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
“허억! 허억……! 후…….”
지친 듯 이마를 쓸어 넘기던 박성민은 그의 발길질에 만신창이가 된 현우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렇게 된 건 모두 니 새끼 잘못이야. 알겠어?”
‘이게… 모두 내 탓……?’
의문이 떠올랐지만 어째선지 대꾸를 할 수도,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곰곰이 생각한다면 아니, 굳이 곰곰이 생각지 않더라도 할 말은 무궁무진할 텐데. 입을 열 체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지금의 그에겐 그저 이 단순 무식한 폭행이 끝나 다행이라는 마음뿐이었다.
머릿속은 이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까맣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박성민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시발! 빨리 자리로 안 가? 거기 자빠져 있다가 선생 오면 나한테 처맞았다고 하려는 거냐?”
스르륵.
박성민의 말을 듣자 힘이 빠진 채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느릿느릿 자리로 향했다.
그런 모습에 처음엔 무자비한 폭행에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던 이들 눈가에 ‘역시’라는 비웃음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럴 것이다.
여태껏 죽은 듯이 쓰러져 있어놓고, 불쌍한 척하던 녀석이 자기를 패던 녀석의 불호령에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비웃음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그는 아니, 김현우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조금씩 발을 끌었다.
지익- 지익-.
욱신거리는 다리 탓에 교실 바닥이 쓸렸지만 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다.’
……라고 현우는 생각했다.
이 거슬리는 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드는 박성민의 모습에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털썩-.
너무도 오랜만에 돌아온 교실이라 자리를 못 찾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돌아왔지만 현우의 자리는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책상을 새카맣게 메운 낙서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온 책상 서랍.
다른 이들과 달리 짝꿍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외톨이 책상은 이 반에서 사용할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 책상이지만.
‘다행이야.’
자리에 앉는 순간, 현우는 다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내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조금이지만 수업시간 동안만큼은 보장되는 개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우는 안심한 것이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현우는 책상 위에 펼쳐진 책 뒤에 가려진, 몇 번을 지운 대도 지워지지 않을 낙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새카만 구멍은 흐릿해져 가는 기억 덕택에 ‘구멍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는 상태였다.
“…….”
그렇게 공감 못할 수많은 욕설에 눈이 침침해질 무렵,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꽤나 앞자리에 앉은 현우의 모습은 그런 선생님의 눈에 띄기에 충분해보였다.
하지만.
그를 본 선생님은 눈을 피했다.
현우는 이 학교에서 그런 존재였다.
그들이 왜 현우를 피하는지 정도는 머릿속으로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예전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현우는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굉장히 똑똑한 편에 속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그런 취급 받는 꼴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머리로는 이해하되 가슴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현우의 탓이리라.
그렇다.
모두 그 자신의 탓이리라.
‘이런 꼴도, 이런 위치도, 이런 취급도… 그것은 모두 내 탓이야.’
총명한 머리에 들어찬 바닥을 알 수 없는 깊고 까만 구멍은, 시야를 가리고 생각을 가렸다.
그렇게 단 몇 분.
칼롯 코즈너라는 희대의 기인이 김현우라는 왕따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3. 꿈의 부정 (1)
학교에서 돌아오고 2주.
현우가 이곳 세상서 지낸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던 시간이었다.
“어째서…….”
‘꿈에서… 깨지 않는 거지?’
사실 현우는 이미 이곳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이 ‘꿈’이 깨길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모두에게 따돌림 당하는 이유와도 같았다.
머릿속으론 이해하나 가슴으론 인정하지 못하는.
‘이곳이 꿈이 맞는 걸까……? 그렇다면 그때의 생생한 고통들은 뭐지?’
반복되는 질문, 반복되는 대답.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지만 침대에 기대어 2주를 보낸 현우는 같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현우의 몸은 등교 첫날 당했던 폭행의 고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런 고통이 꿈속에서 느껴질 리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곳이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물증이 두 가지나 더 나타났다.
우우우웅-.
방, 한 켠을 차지한 낡은 컴퓨터의 구동음이 방 안을 채우는 지금.
현우의 눈은 이전보다 한결 선명해진 마나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이게 눈에 보인 지는 13일째.
그가 꿈에서 깰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붙이고 일어난 직후의 변화였다.
스윽-.
그가 살며시 뻗은 손길에 기분 좋다는 듯 순응하는 마나의 부스러기들은 그의 손끝에 수백 년간 느껴왔던 그것과 동일한 감촉을 전해주고 있었다.
‘꿈이라면… 이런 게 가능한 것일까?’
그는 일전에 마나가 제대로 감지되지 않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꿈인 탓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이 꿈이라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던 그것이… 지금 부정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점차… 조종할 수 있는 양이 늘어가고 있어.’
특별히 마나 수련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비법으로 단련한 것도 아닌데 그가… 아니, 현우가 조종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뛰어난 언령사의 자질로 남들보다 빠르게, 더 많은 마나를 다룰 수 있었던 현우조차도 겪어보지 못한 급격한 성장이었다.
‘어쩌면… 돌아오는 건지도…….’
성장해가는 게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현우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현우의 몸이 칼롯 코즈너의 마나 감응력과 마나 지배력을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변화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으득…….”
그럴수록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사실은 이미 마음속 한 켠에서 인정해 버린,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이 그의 마음을 피폐하게 했다.
이곳은 칼롯 코즈너, 그에게 있어서 꿈이어야만 했다.
꿈이었기에 마법과 마나가 있음에도 사용할 수 없던 것이어야만 했다.
그를 칼롯 코즈너가 아닌 김현우로 회귀시키는 이곳은 절대로 꿈이어야만 했다.
“으드득…….”
현우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거친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
이곳이 현실이었을 적 그에게 남겨진 생생한 기억들이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희석되고, 더 높은 지고의 경지에 오르며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단 하루의 등교와 이곳이 현실이라는 확신을 가져감에 따라 그의 마음을 침습하고 있었다.
텁텁한 공기로 가득한 좁은 방, 그곳에는 더 이상 칼롯 코즈너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기억하던 세상과 다른 점을 생각하며, 이곳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연약한 소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