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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10화)
3. 꿈의 부정 (2)


벌컥!
“야! 너 진짜 짜증나게 굴 거야?! 빨랑 나와서 밥 처먹어!”
방문을 벌컥 열곤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는 이의 이름은 김예린.
현우의 동생인 그녀가 최근 신경질이 늘어난 이유는 며칠 전 우연히 학교에서 온 전화를 받고부터였다…….
그녀는 사실 현우가 학교를 가든 안 가든 알 바가 아니었지만 며칠 전 무심코 받은 전화가 학교에서 현우가 등교하지 않는 이유를 묻기 위한 전화였던 것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을 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선생님들 사이에선 그녀가 ‘김현우’라는 학교 역사상 최악의 학생과 남매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이라고 선생님들이 그녀와 현우의 관계를 아예 모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알고 있던 선생님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친했으며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오점이 있음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학교에 다니는 2년간 자신이 누구의 동생인지 알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며칠 전 전화 이후로 선생님들에게 알음알음 퍼져나가던 게 이제는 학교 내에 소문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보통의 학생이라면 누가 누구의 동생이든 간에 신경 쓸 일이 아닐 테지만 2학년 최고의 아이돌이 역대 최악의 문제아이자 왕따의 동생이란 점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물론 학교에서 김예린이 극구 부정하는 탓에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의심을 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겐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퍽!
“야! 빨랑 와서 처먹어!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 엄마 일 두 번 시키지 말고!”
스으윽-.
흠칫.
멍하니 앉은 현우를 호기롭게 발길질로 깨웠지만 반시체와 같은 모습이던 현우가 생기 잃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으……! 정말 재수 없어! 진짜 시체 같잖아! 기분 나빠!’
2주 사이에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방에 앉아 멍하니 있던 현우의 몰골이 정상일 리 없었다.
본래도 빈약하다 할 만큼 비쩍 말랐던 얼굴은 방금 관에서 꺼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해쓱해져 있었고 햇빛을 전혀 못 받은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현우의 몰골이 기분 나쁘다 못해 혐오스러운 김예린이었지만 차마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현우의 모습은 여자인 김예린이 조금만 세게 때려도 죽을 것만 같은 병자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현우를 보며 김예린은 결국 신경질을 내며 방을 나가버렸다.
“이익……! 재수 없는 새끼! 이젠 니 멋대로 해!”
콰앙!
현우가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벌컥 열려있던 문은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큰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닫혔다.
그러곤.
“엄마 저 나갔다 올게요!”
현우를 대할 때와 전혀 다른, 선명하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현우에겐 허락되지 않는 목소리였다.
“어디 가니?”
조금 높은 톤의 부드러운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채우는 따듯한 감정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잠깐 친구들 좀 만나고 올게요.”
“그래, 너무 늦진 말고.”
그리고… 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목소리였구나.’
현우로선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본 목소리였다.
칼롯 코즈너로 있던 수백 년은 제하더라도 현우가 이곳에 돌아오고 지난 2주간 현우는 그의 새엄마 목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현우 앞에선 말을 하지도 않거니와 그간 현우가 불안에 떨며 방 안에 처박혀 있는 동안 바깥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이전엔 전혀 듣지 못했었다.
아마 오늘도 좀 전에 김예린이 방에 들어왔다 나간 게 아니었다면 밖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망할 자식, 친구들 보러 가야 하는데 기분 더럽게! 차라리 죽어버릴 것이지! 저러다 방에서 죽기라도 하면……!”
낡아빠진 방문 틈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현관에 바로 붙어 있는 방이 현우의 방이었기에 들려온 소리였다.
비록 현우를 괴롭히긴 하지만 소녀로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인지, 아니면 혹여나 현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유서에 그녀의 말을 적어 버릴까 하는 걱정 때문인지, 그 소리는 지극히 작은 웅얼거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웅얼거림으로 비춰질 이 작은 소리는 본의 아니게 오랜 시간 조용한 방 안에만 있은 탓에 외부 소리에 민감하게 된 현우에겐 천둥만큼이나 커다랗게 들려왔다.
‘죽음…이라……?’
현우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나 며칠째 켜져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대기 화면으로 검게 빛나던 모니터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전문 용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걸 보는 현우의 얼굴에 다시 괴로움이 떠올랐다.
수많은 전문 용어와 전문 지식.
저건 많은 책을 섭렵한 현우조차도 알지 못하는 각 분야의 진짜 고등 지식들이었다.
개중에는 기존에 현우가 가지고 있던 지식들로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전문 지식답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이건 이곳이 현실이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했다.
만약 이곳이 현우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꿈속 세상이라면 현우의 지식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어야만 했다.
만약 새로운 무언가가 있더라도 그것은 현우의 지식을 바탕으로 조합된 무언가여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현우가 보고 있는 모니터에 나타난 각종 신개념의 지식들은 말 그대로 기존의 지식을 벗어난 새로운 것들이었고, 이는 이곳이 결단코 꿈이 아니란 반증이기도 했다.
“제길…….”
쾅!
앙상한 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큰 분노로 책상을 때리자 큰 소리가 났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온, 현우의 진짜 고향보다도 더 고향 같은 곳.
그를 거둬준 스승님과 자신을 사람으로 받아준 이들의 추억이 있는 곳.
그가 칼롯 코즈너이던 세상으로 돌아가길, 현우는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
게다가 너무나 큰 갈망과, 거대한 절망에 빠진 현우의 뇌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꽤나 황당무계하면서도 그럴싸한 생각을 내놓았다.
‘죽음……. 죽는다면… 차원 간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죽음을 계기로 차원 이동을 꿈꾼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현우가 가진 방대한 마법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특히나 현우는 칼롯 코즈너 시절 이미 영혼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한 바 있었다.
마법이 있는 저쪽 세계에선 네크로맨시와 같은 영혼이나 시체를 다루는 전문 마법 분야가 있었고 이는 다른 세상에서 귀신 같은 건 없다는 믿음을 가져온 현우에게 꽤나 흥미로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차원 이동 방식도 잠든 틈을 탄 유체 이탈이 차원 이동으로 연결된 건 아닌가 하는 가설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당시엔 이쪽 세상의 정보가 전무한지라 진짜로 유체 이탈을 해서 영혼이 넘어온 것인지, 아니면 육체 자체가 전이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곳에 기존의 칼롯 코즈너의 신체가 아닌 김현우의 신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혼 내지는 의식이 차원 이동한 것이란 생각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이곳에서 육체를 잃고 영체 상태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머물 곳을 잃은 자신의 영혼은 다른 세상의 칼롯 코즈너의 육체로 깃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그리 허무맹랑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물론 실패한다면…….’
완전한 죽음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현우의 정신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흔들린 상태.
칼롯 코즈너 시절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현우는 이미 이곳에 있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다.
덜컥!
흠칫!
오랜만에 방문을 열고 나온 현우의 모습에 거실에 식탁을 치우던 그의 새엄마 박예은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선 현우를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근래 2주간은 김예린이 대신 말을 전했으니 정면으로 현우를 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
“…….”
현우의 기괴한 몰골에 동그란 눈을 하고 있던 박예은이 이내 안정을 찾은 듯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가자 현우도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현관으로 향했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비록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이제 곧 아들이 죽으러 가니 잡아주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이제 결과가 어떻든 영원히 볼 일 없는 얼굴이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잠시 봐두고 싶었던 것일까?
현우는 그 찰나지간 스스로가 바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현관을 나서며 입가를 어루만졌을 때, 자신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탁탁!
급하게 나오느라 구겨 신은 운동화를 바닥에 몇 번 부딪치는 것으로 신발을 정리한 현우는 그렇게 집을 나섰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그런 건 가면서 생각해볼 참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새빨간 불빛이 을씨년스럽게 빛났다.

* * *

현우가 집을 나선 시각.
경기도 인근의 모처.
구름에 가린 미약한 달빛만이 간신히 들어온 어두운 방 안, 그중에서도 가장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일은 잘 진행되어 가고 있나?”
그러자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곳에 위치한 인영이 대답했다.
“예. 걱정하실 필요 없을 듯합니다.”
“……최근 국정원 쪽에서 난입을 한다던데.”
“그 부분 역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국정원 쪽 마법사들은 대부분 실전 경험이 터무니없이 적은 데다 주요 인사의 마법 수준도 고작해야 2클래스…. 저희 쪽 인력 중 일부만 나서도 정리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내는 인영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겨우 국정원 나부랭이들의 괴멸 같은 게 아니야. 그런 쓰잘머리 없는 짓을 해봤자 우리의 존재가 알려져서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게 될 테지. 최선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거다.”
“그, 그렇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있던 인영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